다리는 마음과 마음, 현재와 과거를 이어 준다. 담이 일정한 경계를 표시한다면 다리는 경계를 허물어트린다. 다리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기 때문에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다. 다리는 일정한 영역을 넘나드는 소통의 길이기도 하지만 때론 일정한 자격, 올바른 마음가짐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리는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존재이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이 벌어진 공간이기도 하다. 다리는 쓰린 역사적 현장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아름다운 사연 혹은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기도 하다.
내 마음속의 다리, 금산 큰다리내 마음속의 다리는 금산 읍내의 '큰다리'다. 진악산에서 출발하여 읍내 한가운데를 흐르는 냇물을 건너는 다리다. 읍에서 제일 커서 그냥 이름도 큰다리다. 팔려고 재배하지 않고 그저 먹다가 남은 채소나 산에서 따온 산나물, 느타리버섯이나 먹버섯을 펼쳐 놓고 파는 것이 장날 큰다리 풍경이다.
방금 따온 축축한 싸리버섯 향을 맡으며 금산 장날 어머니의 뒤꽁무니를 뒤좇던 어릴 적 생각이 난다.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런 싸리버섯 향기를 맡아본 적이 없다. 요즘 명절 때는 일부러 일찍 내려가 어머니의 장길을 따라 나선다.
어릴적엔 나를 집에 떼놓고 가려고 몰래 장에 가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염려는 없다. 어머니는 나하고 장에 같이 가는 걸 좋아하신다. 막내 며느리라도 동행을 하면 더욱 즐거워하신다. 코를 킁킁대며 여든이 넘은 어머니 뒤를 졸졸 따르며 버섯향을 맡으려 하지만 어릴 적 그 버섯향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역사속의 다리, 청다리
나는 어렸을 적에 어지간히 왈패군이었나보다. 일찍 서울로 올라와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갔는데, 이웃집 아주머니는 -지금은 그 아주머니도 읍내로 이사해서 낯선 사람이 차지했지만-나를 보고 '왈패왔구먼'하곤 했는데 왈패질을 하고 있으면 그 아주머니가 살짝 와서 '너 이 놈 다리밑에서 주워 온 놈이 어지간히 까불고 댕겨'라고 나를 놀리곤 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라 말은 각 지역마다 달라, 놀리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우는 애를 달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 말이 유래가 된 다리가 있다. 영주 순흥의 청다리다. 청다리의 유래는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도모한 사건(정축지변)과 관련이 깊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수양대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의 누명을 쓰고 순흥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유배지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을 만나고 그와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관노의 밀고에 의해 관군의 습격을 받게 되고, 순흥고을은 순식간에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순흥부는 폐부되기에 이른다.
이 때 죽은 사람이 수천에 이르러 순흥에는 순흥을 관향으로 사용하는 순흥 안씨가 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운 좋게 살아남은 노비들이 시체를 묻어 주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은 다리 밑에 수장시켰다. 죽계천은 피가 냇물을 이루어 그 피가 20여리 흘렀고 그 피가 그친 마을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확인사살까지 당한 상황에서 운좋게 생명을 부지한 어린애들을 관군들이 데려다 키우고 이들이 성장하여 '나를 낳아 준 생부는 어디있소'라고 하면서 부모를 그리워하면 차마 칼 맞아 죽었다고 할 수 없어 '너는 머나먼 순흥땅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라고 둘러댔다.
이 때부터 이 청다리가 '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청다리는 다리(橋)와 사람의 다리(脚)가 발음이 같아 여성의 다리를 무로 비유하여 무청자(菁)를 써서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청다리라 하였다.
쓰라린 역사의 현장, 소화다리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에는 멋진 무지개다리 홍예다리가 있고, 지난 상흔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다리 중간이 움푹 패고 난간은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소화다리가 있다. '아름답다'라고 표현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홍예를 버리고 소화다리에 애착이 가는 건 이 다리가 안고 있는 상처가 너무나 크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소화다리는 거의 80년전(1931년 6월)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서 부용교(芙蓉橋)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 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인지 소화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우익과 좌익이 서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다. 국군과 경찰이 벌교를 장악할 때는 빨치산들에게 협력했거나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빨치산이 읍내를 장악했을 때는 악덕지주 등 인민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을 소화다리에서 죽였다.
최근에 움푹 파인 다리바닥은 물론 앙상하게 남은 다리 난간도 네모반듯하게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한다. 이런 공사로 소화가 안고 있는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소화다리 한편엔 그 당시에 벌어졌던 생생한 모습이 동영상으로 재연되듯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문서방이 김범우에게 소화다리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하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겄구만이라. 재미가 오진 싸까쓰도 똑겉은거 두 번씩 보먼 질리는 법인디, 사람 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그라고, 그 사람덜이 가난허고 배곯는 사람덜편이랑께 나쁠것은 없는디 사람도 지각각이라고, 사람마동 진 죄가 달블것인디 워째서 마구잽이로 쥑이기만 허는지 날이갈수록 그 사람덜이 무서짐스로 겁이 사살살 난당계요." (태백산맥1권66쪽)세속의 때를 씻는 절집의 다리, 송광사 청량각
절집을 가다 보면 다리 하나쯤은 건너게 된다. 절이 산속에 있기도 하거니와 다리를 경계로 세속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 피안의 세계로 나누어지는 의미도 있다. 절집 앞다리는 한 영역과 다른 영역이 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절집의 다리 중에 물리적으로 건너가게 편하게 하는 다리와는 달리 상징적 의미를 갖는 다리도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다리인 불국사 청운·백운·연화·칠보교는 일반 다리와는 달리 계단식 다리로 다리 아래의 범부의 땅과 구별되어 다리 위로 올라서며 부처의 땅으로 통한다.
송광사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다리는 청량각.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에 누각을 얹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거기에 쉴 수 있는 나무의자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어 눈을 감고 계곡물소리며 새소리를 듣는 맛이 좋고, 더 자세히 들으면 식물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다. 사람들의 소리도 귀따갑지 않게 들리는 건 이미 세속의 세계에서 벗어나 일시적이나마 모든 번뇌가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아무나 건널 수 없는 궁궐의 다리, 창경궁 옥천교
궁궐은 대문을 들어서 정전에 이르기 전에 냇물을 하나 흐르게 하였다. 이 내는 배산임수의 명당수이기도 하고 금천이 되기도 한다. 금천으로서의 물은 나쁜 기운이 이 물을 건너지 못하게 함으로써 궁궐을 보호하려는 의미가 있다.
조선 궁궐은 모두 금천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창경궁의 옥천교도 마찬가지다.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금천(禁川)은 잡스러운 것들이 궁궐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뜻이다.
창경궁에 갈 때마다 이 옥천교는 무심히 건너곤 했다. 명전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붕, 명전전 창살에 홀려 옥천교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는지, 옆에서 보면 홍예모양이 귀면상의 팔로 보이는지 전혀 관심없었다.
이제야 옥천교 밑으로 자연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궁궐이 메말랐거나 가짜물이 흐른다면 이 옥천교는 진짜 물이 흐르고 있다. 그야말로 옥천이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다리, 주천 섶다리
징검다리로는 물을 견디어 낼 수 없고 그렇다고 그럴듯한 홍예교를 만들기는 여유가 없어 섶다리를 만들었다. '섶다리'라는 이름은 섶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섶나무는 억새·갈잎나무· 참나무·진달래 따위 또는 도끼로 팰 것이 없이 부러뜨려서 땔 수 있는 잡목 등을 말하는 것으로 땔감으로서는 질이 낮은 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섶다리는 다리 중에 그리 고급의 다리가 아닌 것이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예전엔 가을철 농삿일이 끝나면 겨우내 지게 높이의 두세배 되는 섶나무를 베어다 처마밑에 처쟁여넣고 한 겨울을 나았다. 좀 살 만한 집이라면 파란 연기가 나는 장작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했겠지만 여유가 없는 집이라면 축축한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잘 마르지 않은 섶나무를 때어 처마는 항상 까맣게 그을려 있기 일쑤였다.
이런 나무가 섶나무다. 섶다리를 만들자면 밑받침은 통나무로 대었겠지만 다리 상판은 소나무 가지나 섶나무로 엉기성기 엮어만들었다. 어릴 적 시골 생활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소나무 가지도 귀하여 섶나무가 많이 들어간 것은 당연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는 여름 장마철이 되면 물이 불어 물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공들여 만든 다리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니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제 할일을 다하고 자연의 힘을 거역하지 못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니 자연에서 빌려온 것은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준 것이라 여기며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섶다리가 그리 크지도 깊지도 않은 동강, 서강 그리고 섬진강에서 주로 만들어졌으니 이 지역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것은 누구다 다 알고 있다. 섶다리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들의 처지가 그려지며 어려운 삶이 숙명처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눈으로 보면 섶나무로 만들어 섶다리지만 마음으로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섶다리를 보고 서운하고 아쉽고 애틋한 감정, 즉 섭섭한 마음이 들어 섶다리일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