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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 지역, 2010년 철거될 예정이다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 지역, 2010년 철거될 예정이다 ⓒ 곽진성

서울 지하철인 가산디지털단지역(1·7호선)에서 내려 가리봉동을 걷다 보면 낯선 풍경의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한자로 써진 간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중국말로 왁자지껄하며 대화하는 사람들이 성황을 이루는 곳, 가리봉동 중국 동포 밀집지역(가리봉 시장에서 남구로역 주변)이다.

디지털 1·2·3산업 단지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가리봉동에 형성된 중국 동포 밀집지역은 90년대 일거리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재중 동포들이 늘면서 생겨났다. 현재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재중 동포의 수는 대략 1만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가리봉 종합시장(동포타운)을 비롯 가리봉동 인근의 쪽방·전세방은 이들이 이용하는 삶의 터전, 이제는 재중 동포뿐 아니라 한족 등 중국계 사람들이 붐벼 중국의 어느 마을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가리봉동의 중국 동포 밀집지역은 2010년 그 운명을 '철거'로 마감할 예정이다. 가리봉 재정비촉진사업이 2010년부터 4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낙후 지역인 가리봉동을 첨단 미래형 도시로 재생하겠다는 '카이브(KAIV·Korea Advanced & Innovative Valley라는 명칭의 도시 브랜드)'계획은 공동주택 5000여 가구와 상업·업무·문화시설 등이 조성되는 대형 복합개발사업이다. 그러나 재정비촉진사업을 앞두고 있는 가리봉동의 민심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있다.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 철거 반대와 찬성 사이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 ⓒ 곽진성


지난 16일 방문한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중국어 간판이 달린 맥줏집과 순댓집이었다. 중국 하면 떠오르는 왕만두집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이 흐릿했지만 거리에선 총총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재중 동포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말과 중국어를 섞어 말하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론 정겨우면서도 또 한편으로 낯설었다.

일자로 형성된 길을 따라 쭉 들어가 보니 중국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노래방이 여러 개 있었다. 중국 전통 식재료를 파는 곳도 눈에 띄었다. 평일 낮인데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한족 등의 중국계 사람들도 종종 보였지만 대다수가 우리말을 쓰는 재중 동포였다.

가리봉동에 이렇게 많은 재중 동포들이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재중 동포 밀집 지역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으며 길을 걷다 73년에 가리봉동으로 이사왔다는 안정묘(66)씨를 만났다. 안씨는 이곳에 재중 동포들이 많아지게 된 이유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중국과 수교가 된 다음, 한국을 찾아오는 재중 동포들이 생겨났고 그 후 숫자는 점차 늘어났다. 구로공단에서 일하기 위해 건너온 그들은 잠잘 곳을 찾다가 가리봉동의 싼 쪽방을 찾아들어 왔다. 그렇게 점차 늘어나 가리봉동은 재중 동포 밀집 지역이 되었다. 지금 가리봉동에는 집주인들을 제외한 세입자들 태반이 재중 동포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가리봉동에는 얼마나 많은 재중 동포가 살고 있을까? 구로구청 민원 여권과에 문의한 결과 현재 가리봉동에 살고 있는 중국 동포수(신고자)는 7175명(한족 248명 미포함. 11월말 기준)이었다. 이는 가리봉동 주민 인구 1만5731명의(중국 동포 미포함)의 46% 에 달했다. 단순히 보면 가리봉동 사람 절반 가량이 재중 동포라는 것이다. 

가리봉동에 살고 있는 재중 동포의 비율은 구로구 전체에 살고 있는 재중 동포(2만5311명) 의 35%에 달했다. 미신고한 이들까지 포함하면 1만여명 넘는 재중 동포가 가리봉동에 거주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가리봉동은 재중 동포 밀집 지역이라는 명칭이 잘 어울려 보였다.

가리봉동은 고향을 떠나온 재중 동포들에게는 아련한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고 있다. 황연실(54·재중 동포)씨는 이곳이 고향 같다고 했다. 황씨는 올해 초 5년 기한의 방문 취업 비자(H-2)로 입국했지만 한국 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재중 동포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견뎌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황씨에게 있어 재중 동포 밀집지역은 속마음을 털어놓는 이웃들이 있는 소중한 장소다.

"한국에서는 재중 동포들이 옷 하나 물건 하나 고르기 쉽지 않다. 한국에서 옷가게에 들어갔다가 그냥 나오면 재수없다 꺼져라 소리를 듣는다. 서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가리봉 종합시장에 가면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준다. 이곳이 있어서 그나마 재중 동포들이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 같다."

 가리봉 종합시장 전경
가리봉 종합시장 전경 ⓒ 곽진성
황씨에게 가리봉 종합시장은  맘 편히 물건을 살 수 있는 장소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 쉽지 않게 됐다. 2010년 재정비 촉진 사업으로 인해 가리봉동 일대에 철거 계획이 잡혔기 때문이다.

"여기가 철거되면 앞으로 많이 불편해질 것 같다. 불편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만 여기 있는 동포들은 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또 값싼 방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야 할 텐데 마음이 안쓰럽다."

황씨는 동포들 걱정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리봉동이 보존되면 좋겠다는 황씨의 바람과는 달리 가리봉동 철거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주택공사는 지난 11월, 가리봉동에 홍보타운을 개설하고 발 빠르게 재정비촉진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주택공사 관계자는 빠르면 2010년 첫 삽을 뜰 수 있다는 기대감을 피력했다. 재중 동포 밀집지역이 사라지는 대신 카이브(KAIV)라는 호텔·컨벤션센터·주상복합 시설 등이 세워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땅만 빼놓고 모든 것이 싹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가리봉동 철거 및 개발에 관해 주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철거에 반대하는 입장과 찬성하는 입장이 뒤섞여 지역의 민심은 뒤숭숭했다. 인근 상인들(재중 동포 포함)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구로구와 주택공사에 보상 대책 등을 요구하고 있다. 가리봉동 종합시장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는 임창현(43)씨는 철거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내년에 철거가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철거에 반대한다. 말로는 관련 보상이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현실적인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요즘 같은 불경기에 개발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상인들이다. 여기를 나간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찬성의 시각도 있다. 안아무개씨는 재정비 촉진 사업으로 인한 보상이 많을거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다고 우려하면서도 가리봉동 철거 및 개발에 대해 찬성 입장을 보였다.

"요즘 부동산 경기가 걱정이긴 하지만 주민들(집주인) 상당수는 철거와 개발에 긍정적이다. 잘 진행만 된다면 보상금도 적지 않을 것 같다." 

가리봉 재정비 촉진 사업을 1년여 정도 앞둔 재중 동포 밀집 지역, 이곳의 민심은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철거 찬성과 철거 반대로 나뉘어 있었다.

재중 동포 때문에 못살겠다 vs. 밀집지역 없어지면 편견 더 생길 것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 ⓒ 곽진성

문아무개(45)씨는 10년째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지역에 살고 있다. 매일 아침 남구로역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찾는 그는 2010년에 가리봉동이 철거되면 다른 지역의 단칸 방을 찾아 떠나야 하는 고충이 있다. 그런데도 문씨는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 지역 철거에 대해서는 찬성 입장을 보였다. 늘어나는 재중 동포로 인해 살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IMF 때만 해도 먹고 살만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거리가 없다. 재중 동포들이 너무 늘어나 우리 일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새벽에 남구로역 인력시장에 나가도 값싸게 부릴 수 있는 재중 동포를 우선적으로 뽑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변변히 일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을 하고 싶어도 겨우 며칠에 한번, 버는 돈이라곤 50만원 정도가 고작이다."

재중 동포들이 늘어나 일거리가 없어진 문씨에게 재중 동포 밀집지역은 눈엣가시 같은 곳이다. 이번 철거 계획이 잘됐다고 반기는 그는 정부가 무분별하게 재중 동포를 입국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금 제나라 국민조차 제대로 일을 못하고 있는 실정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재중 동포를 비롯해서 중국인들을 무작정 입국시키면 어떡하는가? 지금 인력시장은 지방까지 재중 동포들로 넘쳐나고 있다. 우리부터 먹고 살아야 그들도 받을 것 아닌가?"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 지역에 붙은 전단
가리봉동 재중 동포 밀집 지역에 붙은 전단 ⓒ 곽진성
인력시장으로 일 나갈때 재중 동포와는 절대 함께 일하지 않는다는 문씨, 그에게 재중 동포 밀집지역은 불편한 공간처럼 보였다.

그런 문씨와 달리 전인숙(71)씨는 재중 동포 밀집지역 철거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한국인인 전씨는 재중 동포 밀집지역이 철거되면 재중 동포에 대한 편견이 더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씨가 그런 우려를 갖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과거에 재중 동포였던 그는 당시 한국인들의 심한 차별에 시달렸었기 때문이다. 그가 재중 동포로 살았던 기간은 자그마치 50년이 넘었다.

1940년, 그의 부모는 일제의 수탈을 견디지 못해 중국 지린성에 터를 잡았다. 전씨는 자연히 재중 동포가 되었다. 그런 전씨가 한국으로 귀향하게 된 것은 91년이었다. 한국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고 회고하지만 재중 동포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눈물이 쏙 날 때가 많았다.

"재중 동포들이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경우는 말로 다 못한다. 그나마 공공서비스를 이용할 때 한국인이 받는 혜택이라도 받게 하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에 재중 동포 할머니가 서울 지하철을 타는데 80살이 다 된 분이라 우대권을 뽑으려고 했다. 그런데 지하철 직원이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똑같은 노인인데 왜 안되냐고 물었더니, 지하철 직원은 재중 동포는 100살이 넘어도 안된다고 하더란다."

전씨는 한국 사회에서 재중 동포로 살아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의 온갖 괄시와 편견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전씨는 한국에 남아 있던 오빠 덕택에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수 있었고 이제는 엄연한 한국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씨에게 있어 재중 동포에 대한 차별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국 정부에서) 중국 동포들이 마음 놓고 살 공간과 지원을 해주길 바랬는데 정작 현실은 있는 재중 동포 밀집지역마저 없애려고 한다. 안타깝다. 재중 동포 마을이 없어지면 재중 동포들에 대한 편견이 더 심해질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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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가리봉#중국 동포 밀집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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