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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초봄, '오존학번'이란 별명을 들으며 대학에 들어왔던 내가 어느덧 09학번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졸업할 때가 됐다. 군 생활했던 2006~2007년을 제외하고 딱 4년 동안 대학생으로 살았다.

 

올해 2월, 스물여섯의 나이로 졸업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 나오는 반응은 거의 이렇다. 

 

"벌써 졸업해?"

 

이 말의 앞뒤엔 다른 말들이 숨어있다. 앞에는 '요즘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데'고, 위에는 '졸업을 하다니 괜찮겠냐, 어디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느냐'다.

 

실제로 군대에서의 2년을 빼고 나처럼 바로 졸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자든 여자든 어학연수·공모전 준비·어학공부·자격증 준비 등으로 짧게는 한 학기부터 길게는 2년 이상 졸업을 미루는 게 요즘의 대학에서는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다.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는 나는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고 얘기하지만, 어려운 상황을 조금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두 달 후에 졸업한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취업 전쟁'은 여전해

 

졸업 자축하는 졸업생들 졸업식 모습. 현재 대학생들에게 졸업은 마냥 기쁜 일이 아니다.(자료사진)
졸업 자축하는 졸업생들졸업식 모습. 현재 대학생들에게 졸업은 마냥 기쁜 일이 아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전수영

내가 대학에 입학한 2003년엔 지금과 다른 모습과 같은 모습이 함께 공존했다.

 

지금과 다른 모습은 바로 '수배자'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던 나는 한 형을 농구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체대생이나 선수도 아닌데 거의 매일 농구공을 던지고 또 던졌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형은 다른 선배들이 말하길 "작년(2002년) 총학생회장인데 한총련 수배자라서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2003년 총학생회장 누나도 수배자였다. 누나는 난소 종양을 앓으면서도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통증으로 배를 움켜잡고 쓰러질 때도 마음 놓고 병원에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경찰은 수배의 그물을 거두지 않았다. 2003년의 캠퍼스는 그런 모습으로 내게 남아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건 '취업 전쟁'이다. 2003년엔 선배들이 취업 때문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올해에도 글로벌 경제 위기의 폭풍이 대학가에 몰아쳤다.

 

그 폭풍은 대학가에 '경쟁하지 않으면 낙오한다'는 절박함을 만들었다. 01학번·02학번 선배들은 "후배들이 점점 공부만 한다"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도 했다.

 

복학 후 만난 07학번·08학번 후배들 또한 자신의 계획을 세워 꿈을 당차게 말했다. 하지만 그 꿈의 대부분이 "멋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촛불의 열기, 캠퍼스 안으로 몰아치다

 

고3이었던 2002년 여름엔 장갑차 사건 때문에 교실 대신 거리에서 공부했고, 막 대학생활에 적응하려던 2004년 봄에는 중간고사도 내팽개치고 여의도로 달려가 "탄핵 무효"를 외쳤다. 그러다 군대를 가고 복학을 했다. 여느 복학생처럼 학점을 따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연애도 했다. 그러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당선됐다.

 

그 이듬해인 2008년 여름, 정부의 미 쇠고기 졸속 협상은 여느 때보다 보수화됐다는 대학생들마저 촛불을 들게 했다. 이른바 '명박산성'이라 불리는 거대한 컨테이너 벽과 물대포 세례는 그들을 분노케 했다.

 

정말 학생들이 많이 나왔다. 물론 최근 몇 년 동안의 집회에 비해서 많이 나왔다는 뜻이다. 비운동권 학생회가 몸을 사릴 때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깃발을 만들어 스스로 모였다. 전경과 버스가 벽을 치면 그 앞에 눌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촛불의 열기는 캠퍼스 안으로 몰아쳤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선 촛불집회에 미온적이던 학생회가 학생들의 반감을 사면서 인기를 잃었고, 촛불집회를 누비고 다니던 학생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언론에서는 촛불집회를 계기로 다시 운동권이 부활한다는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뜨거웠던 여름날, 거리에서 난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친구는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중에서도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이 많겠지? 솔직히 여기서 소리친다 해도 오히려 내 이익에 영향 미치는 사람을 찍는다고. 이럴 땐 사람들이 참 야속하단 말이야. 한 번 지켜보자. 이 사람들이 다음 선거에서 어떻게 변할지."

 

강의실 아닌 거리에서 배운 것들

 

 지난 6월 5일 서울 이화여대 정문 안 광장에서 이화여대, 연세대, 홍익대 등 신촌지역 대학생 300여명이 모여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문화제를 열고 있다.
지난 6월 5일 서울 이화여대 정문 안 광장에서 이화여대, 연세대, 홍익대 등 신촌지역 대학생 300여명이 모여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문화제를 열고 있다. ⓒ 안홍기

 

계절이 바뀌고 나니 얼어붙은 것은 날씨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의 사회에 대한 관심이었다. 경제가 어렵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면 왜 그런 것인가를 토론하기보다, 일자리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예전처럼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점점 줄었다. 2003년 흔히 봤던 수배자의 모습은 거의 찾기 힘들어졌다. 

 

한 후배는 일갈했다.

 

"촛불집회라는 거. 얘들한테는 그냥 '놀이'였어요. 다양하기보다 파편화되고, 끈기있게 하기보다는 한 때의 열정으로 끝나버린…."

 

언제나 그랬듯 대학가의 최대 이슈는 취업이다. 내가 1학년이던 2003년에도 그랬고 졸업하는 올해 2009년도 그럴 것이다. 아마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더 심해질 것이다.

 

대학생이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만이 고귀하고, 취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속물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이라면, 좀 더 넓은 곳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 생활을 취업을 위한 준비기간으로만 생각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것들이 많다. 지난 4년 동안 친구들과 거리에서 배운 것은 교과서 그 이상이었다. 미 대사관 앞에서 한미관계를 배웠고 국회의사당에서 대의정치가 무엇인지 깨달았으며 청와대 앞에선 이 나라가 얼마나 민의와 대의가 갈라진 나라인지 절감했다. 정치외교학도로서 이보다 더 좋은 교재는 없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곡기를 끊고 싸웠던 기륭전자 '누나'들, 이랜드 '엄마'들을 보며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도 알게 됐다. 이런 것은 경제학 교과서나 사회학 교과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손은 참 따뜻했다. 사회로 나가기 전 마지막 관문에서 남을 누르는 법보다 쓰러진 사람을 안아주는 것을 배우는 일. 사람의 체온을 느끼는 것이 대학생 때 얻은 소중한 재산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지난 학생 시절을 되돌아보니 강의실도 몰라 헤맸던 새내기는 간데없고 세상이란 경마장에서 달려야 하는 경주마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하다. 보이지 않는 곳을 가겠다던 선배들도 현실 안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나도 무수한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겠지. 하지만 난 다짐한다. 새해에는 짧은 욕심으로 날 쉽게 태우지 않고 세상을 따뜻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데우는 연탄불 같은 사람이 되겠노라고.


#2008#대학교#대학생#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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