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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미국 작가 업톤 싱클레어가 <정글>이라는 소설에서 소비자 주권 불모지대로 묘파(描破)한 1백여 년 전 미국 도살장의 참혹함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겉은 문명(文明)이라는 포장지로 덮였으되 속을 보면 정부와 기업의 인식이 그렇고, 자신과 이웃의 이익과 권리를 단지 무지(無知)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는 일부 소비자의 태도 또한 그렇습니다.

랄프 네이더 12년 전 서울에서 만났던 미국 소비자운동의 기수 랄프 네이더
랄프 네이더12년 전 서울에서 만났던 미국 소비자운동의 기수 랄프 네이더 ⓒ 강상헌
전체주의 또는 독재로 회귀하는 듯한 최근의 음울한 분위기가 시민들에게는 큰 짐일 것입니다. 이때 오래 전에 만났던 랄프 네이더를 떠올린 것은 우리 생활이 민주주의와 직결(直結)돼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잘 살기 위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일부) 포기한다거나, 타인에게 이런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미국 소비자운동의 기수(旗手)'라고 불리는 랄프 네이더를 만난 것(1996년)은 필자로서는 가슴 벅찬 행운이었습니다. 기자 일을 한다고 해서 자기 보고 싶은 사람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당시 일하던 신문사가 관계된 강연회 등 소비자 관련 행사에 그가 올 수 있도록 열심히 팩스도 보내고 전화도 하며 마음을 졸이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미국 대선 때마다 매번 타의(他意)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유명하기도 한 그는 변호사 자격증과 '행동하는 양심'만을 무기삼아 초대형 기업들과 맞짱을 뜨는 일로 소비자 주권(主權)을 확립한 인물이지요. 당초 '미국 소비자운동의 기수'라고 설명했지만 실은 미국만이 아닌 세계 소비자운동의 표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1934년, 코네티컷 출신입니다.

그에 관한 여러 기록이나, 다양한 상황에서 그가 택한 결정들을 돌이켜보니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의 면모가 또렷했습니다. 시민운동으로서의 소비자운동의 개념을 처음 확립한 사람이니 이 부문에 큰 관심을 가진 젊은 기자에게 그의 존재는 자못 큰 것이었지요. 만나보니 ‘과연 랄프 네이더로구나!' 감탄이 절로 났습니다. '과연!' 

꽤는 까탈스러운 성품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소탈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줬습니다. 그가 내민 손도 따뜻하고 부드러웠지요. 필자가 스스로를 소개하며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 했다고 말하자 그는 커다랗게 웃으며 잡은 손을 좋아라 흔들어댔습니다.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고요.

당시 필자는 식품안전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소비자운동과 다양한 관점의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를 바로 펴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라는 신념으로 기자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대학시절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요. 랄프 네이더의 존재, 필자가 기자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동기 중의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강연회(1996년 11월 27일, 동아일보사 강당)를 앞두고 그가 동아일보 사장과 면담하기 전에 단독 인터뷰가 예정돼 있었습니다. 필자는 이런 '짝사랑 속내'는 꼭꼭 감추고, '우리 독자들'의 대표 자격으로 정색하고 대화를 나눴지요. 당시 취재수첩을 톺아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할 말이 꽤 많았던' 대화였군요. 지금 보아도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여럿이고요. 기회 되는대로 나머지 내용도 정리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 '소비자운동은 민주주의의 핵(核)'이라는 강연 제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소비자운동(campaign)과 민주주의의 체계(system)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까?
"경험적인 얘기입니다. 시민이 민주주의를 학습하기 위한 경험으로 소비자문제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이해가 걸린 문제이지만, 동시에 모두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슈 아닙니까? 이웃과 전체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 '전투적인 소비자운동'의 모델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소비자와 기업, 또는 소비자와 반(反)소비자 세력 간의 관계는 이렇게 살벌한 것인가요?
"제가 사회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 이야기지요. 당시 기업의 폭력적이고 무지한 사고(思考)구조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 소비자 측도 좀 거센 방법을 강구했기 때문에 그런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겠지요. 지금은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훌륭한 방안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고, 소비자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지으려는 분위기가 일반적입니다. 소비자의 대응도 좀 세련된 것이어야 할 필요가 있지요."

- 그렇지만 기업이 노력한다고 해서 소비자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중요한 부분이지요. 소비자가 스스로를 세력화해 자신의 권익을 제약하는 세력과 싸우는 것은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수단이지요. 소비자의 힘을 조직화하면 소비자 문제의 해결을 지나 훨씬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 과학기술의 진전에 따라 소비자 문제에서 '정보'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기업의 발 빠른 영리(營利)행위를 '소비자'들이 따라잡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은 아닌지요?
"무엇이 소비자에게 피해를 끼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정보를 확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이 정부에 모든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법적 장치와 관행이 확보돼야 하지요. 가령 식품 안전성을 규정하는 5개 기준인 청결 살충제성분 방부제성분 방사선오염 유전자조작여부 등의 정보는 정부가 소유한 자료 속에서 거의 완전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소비자 스스로 연구해야지요. 조직화의 필요성이기도 합니다."

- 개별 기업이 아니고 정부를 상대로 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개별 기업들의 관련 업무를 총괄하여 통제하는 시스템인 정부와 효과적으로 '거래'할 수 있어야 비로소 소비자의 이익이 확보됩니다. 그러나 세계의 거의 모든 정부는 기업과 유착(癒着)하는 것이 보통이며, 이런 까닭에 대개 정부가 소비자의 목소리를 듣기를 꺼리지요. 소비자가 알고 싶은 정보를 정부가 공개하기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 '공적(公的)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먼저 실천해야 한다고 늘 주장하십니다. 시민의 권리에 짝하는 개념이겠지요?
"가령, 식품이 소비자와 가까운 곳에서 생산될수록 안전하고 값이 싸다는 것은 이제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업이나, 기업의 유혹에 약한 정부는 비교우위론 등의 논리로 무역을 확대하고 결과적으로 대부분 나라의 농업기반을 파괴하고 있지요. 초강대국이 배경인 이런 음모는 국제적으로 식량을 무기화하는 역할도 하고 있는데, 이를 막는 방법은 시민의 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각국 소비자들의 이런 측면의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자는 것인가요?
"의무나 희생(sacrifice)이 아니고 기쁜 봉사지요. 이웃과 후손, 인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름다운 마음의 발로(發露)입니다. 또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해 나서고, 필요하면 시위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행동'은 자위(自衛)의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워질 경우, '공적시민'의 뜻으로 무장한 따뜻한 이웃들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류공영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지요. 당신이기도 하고요.”

- 시민운동의 관점에서 한국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너지효율을 높이거나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려는 진지한 노력 없이 핵발전소만 짓겠다는 한국정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한국은 아직도 핵발전소를 짓는 4개국 중 하나지요. 20년 전부터 미국은 핵발전소를 짓지 않습니다. 체르노빌의 비극에서 지혜를 얻어야지요. 또 10대 소년소녀들에게 담배 피우기를 강요하다시피 하는 미국 담배회사의 시도에 왜 한국의 소비자와 정부는 침묵하고 있습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뷰선데이(www.interviewsunda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인터뷰선데이의 에디터이며 여의도통신의 편집위원입니다.



#랄프 네이더#소비자운동#미국#시민#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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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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