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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대목 초저녁인데도 인적이 끊긴 군산 평화동 양키시장. 자전거 옆 입간판에 적힌 ‘군복, 작업복’이 “여기가 ‘양키시장’이요!”라고 절규하는 것 같다.
단대목 초저녁인데도 인적이 끊긴 군산 평화동 양키시장. 자전거 옆 입간판에 적힌 ‘군복, 작업복’이 “여기가 ‘양키시장’이요!”라고 절규하는 것 같다. ⓒ 조종안

군산에 가면 기성복 전문매장이 밀집해 있는 ‘양키시장’이 있다. 감 도매시장이었던 ‘감독’과 재래시장을 이웃한 양키시장은 한때는 익산, 전주, 충남 서천 등지에서도 손님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군산에 살면서도 왜 양키시장이라고 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미군비행장에서 흘러나온 군수품을 사고팔면서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이다. 거기에 한국군 부대(보충대: 논산훈련소 전신)가 공설운동장과 중앙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어서 더욱 활기가 넘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피난민들은 좌판을 벌여놓고 미군 작업복과 군용담요를 염색해서 팔았고, 양키냄새가 풍기는 빈 깡통과 종이 박스, 잡지, 열쇠 등을 파는 가게들도 있었다. 미군들이 사용하던 침구류와 등산 장비를 팔기도 했는데, 씨-레이션(전투식량)에서 그릇, 커피까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처음에는 염색한 미군 작업복과 담요 등을 취급했는데, 초중고생 교복과 작업복을 만드는 가게가 하나둘 들어서더니, 맞춤 의류 가게 밀집지역이 되었고, 70년대까지 호황을 누리다 교복자율화가 되니까 기성복 매장으로 변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민들의 웃음과 애환이 넘치던 양키시장은 등·하교를 하는 길목이기도 했는데, 별별 희한하고 신기한 군수품과 생필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구경할 때도 있었는데, 알 듯 말 듯한 북한 사투리로 물건을 흥정하는 모습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놓칠 수 없었다.

옛날 친구 생각도 나고 해서 들렀는데, 초저녁인데도 휑뎅그렁한 도로와 굳게 닫힌 문들이 단대목 분위기를 망치고 있어 안타까웠다. 어머니가 교복을 맞춰줄 때마다 단골로 다니던 ‘송도사’는 지퍼 수리점으로 바뀌었고, 황해도 사투리가 정겨운 노인이 침침한 형광등 불빛을 벗 삼아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송도사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어서 물어봤다가 가족이 모두 경기도로 이사 갔다고 해서 아쉬워하고 있는데, 노인이 꼬마에서 육순이 코앞인 나이까지 양키시장을 지키고 있다는 ‘상우회’ 회장을 소개해주었다.

양키시장을 40년 넘게 지킨 ‘형 회장’ 이야기

 40년 넘게 양키시장을 지켜온 형 회장.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넉넉하고 밝은 인상이었다.
40년 넘게 양키시장을 지켜온 형 회장.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넉넉하고 밝은 인상이었다. ⓒ 조종안

건너편 가게 주인이 상우회 회장이니 궁금한 게 있으면 만나보라고 해서 찾아가 용건을 말했더니 친절하게 의자를 내주었고 인사를 나누고 나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곡절 많은 자신의 삶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형 회장'은 소탈하고 상대를 편하게 해줄 것 같은 밝은 인상이었다.    

"양키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니까 이곳에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언제 어떤 계기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으니까, 60년대 중반쯤 됐을 겁니다. 중학교에 못 가면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 수 있다고 이발소나 양화점, 철공소 같은 곳에 취직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저는 옷가게 꼬마로 들어갔습니다. 저쪽 사거리에 있는 원단을 파는 가게였는데 공장에서 일하는 기술자도 여러 명 되었어요.

새벽 4시 사이렌이 불면 일어나 세수도 못하고 달려와 문을 열고 가게 정리도 하고 공장 청소도 했습니다. 청소가 끝나면 배가 고픈데 주인이 밥을 주지 않으니까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서 아침을 먹고 다시 출근해서 기술자들 뒷수발도 하고 주인 심부름도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아요··· 허허.

밤 10시가 넘도록 일을 하고 집에 가면 11시쯤 됩니다. 그러면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잠을 자고 새벽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나왔지요. 그 집에 1년 넘게 있었는데 기술도 못 배우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심부름만 하면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진 겁니다. 지갑을 잃어버린 주인이 종업원들을 의심하는 눈치였고 그래서 찜찜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양복점에 있는 친구가 고생하지 말고 월급도 받을 수 있으니 함께 일을 하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양복 일을 배우게 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지갑 사건이 제 인생을 바꿔놓은 것 같아요.

양복점은 옛날 시내버스 터미널이 있는 사거리에 있었는데, 그 집에서는 빵이라도 사먹으라고 월급을 주더군요. 쥐꼬리보다도 작았지만, 월급을 받으니까 기분이 좋았고 2년만에 재봉틀을 다루고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으니 엄청나게 발전한 셈이지요.

양복점에 있으면서 버스 차장과 기사들이 ‘삥땅’ 챙기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면 버스 차장들이 주머니를 던져놓고 갔다가 일이 끝나면 찾아가는데, 알고 보니 그 주머니에 동전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때는 버스도 공짜로 타고 다니고 월급도 받으면서 삥땅까지 챙기는 차장들이 부러웠어요···. 허허. 

경기가 좋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도 돈으로 보인다고 했어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하나씩 사가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주인이고 종업원이고 길에 나가 손님을 끌었지요. 그런 걸 보면 피난민들 생활력이 남한 사람들보다 강했던 것 같아요. 하긴 나도 객지로 나가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때는 설이나 추석 보름 전부터 밤새워가며 일을 했는데, 심부름을 하면서도 신이 났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뱃사람들이 옷을 사 입고, 철공소 주인들은 일꾼들에게 작업복을 맞춰줬거든요. 그런데 선박이 줄어들고 철공소도 하나씩 문을 닫으면서 지금은 손님이 끊긴 상태입니다. 모두 어디로 갔는지 뱃사람들도 안 보여요.

나운동에 도시가 조성되기 전에는 옷을 맞춰 입는 가게가 영동과 이곳 두 군데밖에 없어서 장사가 잘되었는데, 대기업들이 의류시장에 끼어들면서 너나 나나 메이커만 찾는 바람에 시장이 죽어버렸어요. 거기다 교복 자율화까지 되니까 학생들 얼굴도 보기 힘들고···.

교복자율화가 되기 전이었던 80년대 초만 해도 학생들이 이집저집으로 몰려다니며 단체로 맞출 것이니 싸게 해달라고 해서 흥정하는 재미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모두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중동과 금암동에 뱃사람들이 많이 살았을 때는 학교에 가는 아이들도 무척 많았는데 지금은 어쩌다 한 명씩 지나가요. 걔네들이 모두 손님이었거든요. 그리고 밤에는 술래잡기하는 소리 때문에 귀가 따가웠는데 지금은 아이들 얼굴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사람 지나가는 것도 보기 어려워요···.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식들 교육을 마친 나이이기 때문에 돈을 벌기보다는 놀고 먹기 그렇고 하니까 문을 열어놓는 겁니다. 서울이나 대도시처럼 집값이 오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도 먹고 살게 해준 터전이니까 지켜야지요." 

초년에 고생은 했지만, 그런대로 무난하게 살아온 것 같다는 '형 회장'은 가을에 감독으로 감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길에 버린 감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청소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그래도 흥청거리던 옛날이 좋았다며 지나가는 사람을 보려는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30여개 점포가 명맥을 유지하는 양키시장

60년대까지만 해도 양키시장은 사거리를 중심으로 100개 가까운 좁은 가게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데 돈을 번 주인들이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되어 지금은 30여개의 기성복 매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꼬마로 들어가서 기술도 익히고 개업해서 돈도 벌어 장가도 들고 여우 같은 아내에 토끼 같은 자식이 둘이나 되고 상우회 회장 직책까지 맡고 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셈이지요"라며 껄껄 웃는 '형 회장' 웃음에서 메이커에 대한 서운함과 세월의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10여 년 전까지도 하루 품삯 정도는 벌었는데 메이커에 밀려 영업을 포기한 상태라니, 경제도 어려운 시기에 세련되고 멋진 백화점과 대형매장으로 향했던 눈길을 잠시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맞춤옷이 진열되어 있던 자리에 걸려 있는 보세품 의류들. 어디서나 흔하게 보는 옷이고 문구이지만, ‘U.S ARMY’가 눈길을 끈다.
맞춤옷이 진열되어 있던 자리에 걸려 있는 보세품 의류들. 어디서나 흔하게 보는 옷이고 문구이지만, ‘U.S ARMY’가 눈길을 끈다. ⓒ 조종안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양키시장#단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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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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