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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가 고향인 내가 충청도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의 사투리가 느린 것 같아도 정말로 구성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속에 감추고 있는 듯 느글느글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때가 되면 진귀한 것들을 내 놓기 때문이다. 때론 정석으로 가다가도 곁길 도랑으로 빠지기도 하고, 제 포석대로 가다가도 엎어버릴 때가 많다. 그 때문에 곰삭은 듯 오래도록 사귀면서 들어야만 그 말의 진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시백의 〈누가 말을 죽였을까〉역시 그랬다. 이 이야기의 텃밭이 되고 있는 충청도 시골 마을을 중심으로 행정 타운이니, 에프티에이니, 골프장 건설이니, 농민궐기대회니 하는 여러 화제 거리들을 반찬 삼아 한 지붕 여러 가족들처럼 동네 이장을 비롯해 나이 지긋한 어른들과 아들 벌 되는 젊은 부부들, 그리고 미래의 농촌지도자가 될 청년들이 몰려들어 비빔밥을 비벼 먹듯 여러 사건들을 엮어 나간다.

 

어린 시절을 시골 농촌에서 보낸 나는 누구보다도 마을 어른들이 화투 노름에 쉽게 빠져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봄부터 가을 막바지 농사철까지는 쉴 새 없이 논과 밭에 온 몸을 비비다가도, 겨울 농한기에 접어들면 하는 일 없으니 동네 한 곳이나 멀리 읍내에까지 나가 노름판을 기웃거리다 빈 털털이 신세가 되거나 땅문서까지 날리는 일도 많았다.

 

거기다가 빠질 수 없었던 게 있다면 막걸리와 술판이다. 술이 들어가면 그토록 잠잠하던 어른들도 이웃집 담 하나를 두고 한 달 가량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실제로 마을에서는 식칼을 들고 설쳐대는 살벌한 진풍경도 벌어지곤 했다. 그 모습들을 구경하던 나는 대문 앞까지 나설 수는 없었고, 담장 너머 멀찍이서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야말로 간이 두 근 반 세 근 반 했다.

 

20세기 대한민국 농촌의 부끄러운 속살 드러내는 작품

 

그것이 70-90년 시대 시골의 숨은 풍경이었다. 들판의 노을이 낄 때까지 이삭을 줍던 밀레의 만종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시백은 그런 밥상에다 여러 진미가 곁들여진 이야기들을 몇 개 더 얹고 있다. 이를테면 여흥 민씨가 타고 다니던 말을 묻어두었다는 동네 앞 외진 밭 구석구석을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서 금궤라도 건져보겠다는 젊은이들의 모습이라든지, 동네 전임 이장이 아예 부동산 사무실에 의자까지 두고서 땅을 팔려고 안달하는 모습들은 진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더욱이 그 동네에 톱밥 날리는 가구공장과 파리 끓는 단무지 공장, 개울물을 흐리게 하는 염색공장들이 들어선 까닭에 자연적으로 외국 노동자들도 몰려들어 한 집단을 이루는데, 그 동네 슈퍼 주인인 '평식'씨가 한국말을 모르는 그들에게 함부로 욕을 해 대는 모습과, 그곳으로 시집 온 외국 여자들의 고단한 삶은 20세기 농촌의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어찌됐든 이시백 표 연작 소설은 손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물론 입담만 재밌는 게 아니었다. 바둑을 둘 떼 포석을 깔아 놓듯 그가 깔아 놓은 여러 돌다리는 정말로 두들겨 봐야 재미있게 건널 수 있고, 한 모퉁이에 숨겨 놓은 진풍경과 살풍경은 찬찬히 뜯어 봐야 그 맛을 더 할 수 있고, 중간 중간에 뒤엎는 묘미들은 술판을 확 깨게 만들 정도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시백이 충청도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도 능청스럽고 자연스럽게 입담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연히 그 지방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작 그는 경기도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구수한 토박이 말투를 자연스럽게 비벼대고 엮어내는 그의 이야기들은 영화 〈황산벌〉보다도 더 재미난 입담의 연속이지 않겠나 싶다. 요즘처럼 언어가 획일화 되는 세태 속에서 이토록 구성진 소설은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누가 말을 죽였을까 - 이시백 연작소설집

이시백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08)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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