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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꽃망울 꼭지만 남은 무가 이렇게 곱고 예쁜 꽃망울을 노랗게 매달 수가 있다니
무 꽃망울꼭지만 남은 무가 이렇게 곱고 예쁜 꽃망울을 노랗게 매달 수가 있다니 ⓒ 이종찬

 

끝나지 않은 노동이 헛간에 걸려

먼지 쌓인 시간을 갈고 있다

우직한 황소의

붉은 근육이 비틀리던

저 군살 박힌 삶들

거미줄 엉킨 텁텁한 헛간에서

그날의 노동이 경련처럼 일어난다

봄이면 제일 먼저

쟁기를 손질하시던 아버지

막걸리 한 사발에

쟁기 걸고 황소 앞세우면

날 끝에서 갈증을 토해내며

일어서는 밭이랑

황소의 헉헉거림,

쟁기로 전해오는 아버지의 땀과 근육,

그 꿈틀거림이……갇힌,

주인 잃은 헛간 위로

오늘은 봄비가 온다

 

이랴!

내 마음 묵정밭을 갈고 오는 아버지

 

- 박재희, '쟁기' 모두

 

무 꽃망울 마침내 노오란 무 꽃망울이동글동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무 꽃망울마침내 노오란 무 꽃망울이동글동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 이종찬

 

나날이 곤두박질만 치고 있는 서민경제에 발맞추듯이 올해 들어 강추위가 몸과 마음을 꽁꽁 얼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봄날처럼 포근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위가 주춤해 그나마 다행입니다. 긴 불황에 찌들어 지친,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매서운 추위는 '때린 데 또 때리는' 것처럼 정말 서럽고 눈물겹습니다.

 

1월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가운 추위와 기약할 수 없는 경기침체로 저만치 양지 바른 텃밭을 기웃거리는 봄조차 꽁꽁 얼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여기에 용역직원들까지 끼어든 경찰특공대가 생존권을 부르짖는 용산 철거민 5명을 죽이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져 올해는 봄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용산 참사를 조사하고 있는 검찰 발표도 이랬다 저랬다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대체 나라 꼴이 왜 이 모양이야!'라는 소리가 절로 비어져 나옵니다. 청와대는 청와대대로, 내각은 내각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제 각각 잔머리만 살살 굴리며 나라 곳곳을 헛바퀴만 돌게 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집도 없고 직장마저 잃어 오갈 곳 없는 가난한 서민들은 어찌 살란 말입니까. "끝나지 않은 노동이 헛간에 걸려 / 먼지 쌓인 시간을 갈고 있다"라는 시구처럼, 무너진 삶 새롭게 일으킬 봄을 기다리는 서민들은 "쟁기 걸고 황소 앞세"워도 땀 흘려 갈아엎을 논과 밭(일터)이 보이지 않습니다.  

 

분꽃 싹 무 꼭지 곁에 두었던 텅 빈 화분에서도 연초록 싹이 서너 개 돋아났습니다
분꽃 싹무 꼭지 곁에 두었던 텅 빈 화분에서도 연초록 싹이 서너 개 돋아났습니다 ⓒ 이종찬

동백꽃 동백나무가 빠알간 꽃 두 송이를 피워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그네에게 봄을 안겨주었습니다
동백꽃동백나무가 빠알간 꽃 두 송이를 피워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그네에게 봄을 안겨주었습니다 ⓒ 이종찬

 

아무리 하찮은 생명이라도 꽃을 피운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내 집안은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

 

- 하종오, '초봄이 오다' 모두

 

1월 29일(목) 오후 4시쯤, 하종오 시인이 쓴 '초봄이 오다'라는 시를 읽다가 행여 가까운 공원으로 나가면 초봄이 왔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리는 산수유와 매화 꽃망울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중랑천 고수부지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고수부지 곳곳에 서 있는 산수유와 매화나무 가지에 매달린 꽃눈은 아직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로 밑반찬 거리라도 좀 살까 싶어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 동원시장에 갔습니다. 뭘 살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고 있는 데, 저만치 800원짜리 제주무가 눈에 띄었습니다. 연초록 이마에 하얀 몸뚱이가 매끄럽게 잘 빠진 제주무가 몹시 탐스러워 얼른 한 개 샀습니다.

 

그 제주무로 아삭아삭 새콤달콤한 무채나물을 만들어 먹으면 마음에 봄이 다가올 것만 같았습니다. 지난해부터 갑자기 꽉 막히기 시작한 일거리도 다시 물꼬가 트일 것만 같았습니다. 그날 저녁, 무채나물을 만들기 위해 부엌칼로 무 꼭지를 썰어내 버리려 하다가 무 꼭지 곳곳에 아주 여린 싹 몇 개가 파랗게 돋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연초록빛 싹을 바라보자 문득 뉴타운 건설로 쫓겨나는 용산 철거민이 떠올랐습니다. 무를 반듯하게 채 썰어 무채나물을 만들기 위해 무 꼭지를 잘라 버리는 자신이 마치 무 꼭지를 철거시키는 경찰특공대처럼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아무리 하찮아도 이것도 생명인데, 이걸 버리지 말고 한번 키워보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 꼭지를 홈이 조금 깊게 패인 찻잔 위에 올려놓고 물을 조금 부은 뒤 탁자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아침마다 무 꼭지에 물을 흠뻑 뿌려주면서 마치 화초를 키우듯이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무 꼭지에 돋아 있던 그 작은 싹들이 점점 싱싱한 무잎으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자 무잎이 너무 크게 자라 잎사귀를 반쯤 잘라 주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자 꽃대가 올라오는가 싶더니 이틀 쯤 더 지나자 마침내 노오란 무 꽃망울이동글동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꼭지만 남은 무가 이렇게 곱고 예쁜 꽃망울을 노랗게 매달 수가 있다니.       

 

동백꽃 수줍은 듯 잎사귀에 숨어 피어난 꽃
동백꽃수줍은 듯 잎사귀에 숨어 피어난 꽃 ⓒ 이종찬

명자나무 꽃망울 명자나무 울타리에서도 여기저기 제법 붉은빛이 감도는 동글동글한 꽃망울들이 예쁘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명자나무 꽃망울명자나무 울타리에서도 여기저기 제법 붉은빛이 감도는 동글동글한 꽃망울들이 예쁘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 이종찬

 

몸 밖에는 벌써 봄이 이미 다가와 있는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무 꼭지 곁에 두었던 텅 빈 화분에서도 연초록 싹이 서너 개 돋아났습니다. 분꽃 싹입니다. 지난 해 이맘 때 산 그 화분에는 처음 관음죽이 있었는데, 관리를 잘못해서 그랬는지 어느 순간부터 잎사귀가 슬슬 마르더니 그만 깡마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관음죽을 뽑아버리고, 지난 가을에 분꽃 씨앗 예닐곱 개를 재미 삼아 묻어 두었습니다.

 

그 분꽃 씨앗들이, 하찮은 무 꼭지 하나가 노오란 꽃을 올망졸망 피워내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던지 싹을 틔운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꽤 추웠던 지난 설 연휴 때에는 비음산(510m, 창원시 사파동) 들녘 양지 바른 곳에 있는 동백나무가 빠알간 꽃 두 송이를 피워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그네에게 봄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많이 피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딱 두 송이였습니다. 그것도 한 송이는 맹추위에 꽃잎 몇 개가 거무스레하게 변한 데다 꽃망울조차 다 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백나무 곁에 선 명자나무 울타리에서도 여기저기 제법 붉은빛이 감도는 동글동글한 꽃망울들이 예쁘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대자연은 이처럼 위대하고 질서 정연합니다. 삼라만상은 대자연을 어미로 삼아 저마다에게 주어진 생명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어미로 삼아야 할 국민, 그것도 가난한 서민들만 골라 제멋대로 짓밟으며 죽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사람 질서도 지키지 못하는 정권이 '대운하'를 '4대강 살리기'라는 말로 은근슬쩍 바꾸며, 대자연의 질서까지 바꾸려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울화통 터질 일입니까.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작은 방과 제 고향에는 벌써 봄이 다가와 있습니다. 하지만 제 얇은 지갑에는 아직 봄이 찾아오지 못하고 땡겨울 찬바람만 씽씽 불고 있습니다. 이젠 촛불이 아니라 예전처럼 짱돌을 들어야 무너진 삶, 부황 든 나라를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 몸 밖에 이미 다가와 있는 봄을 몸 안까지 맞이하기 위해서는.

 

평지나물꽃 이 평지나물꽃(유채꽃)은 지난 해 봄에 찍었던 것입니다
평지나물꽃이 평지나물꽃(유채꽃)은 지난 해 봄에 찍었던 것입니다 ⓒ 이종찬

         

나주 배꽃 흰 가슴 확 풀어헤친 봄이 아니겠나. 그것들, 그 요망한 것들 벌이란 벌과 나비들 모조리 불러들여 한바탕 애애한 사랑냄새로 천지가 진동터니. 으음, 내 조로의 몸과 마음 어디에서도 꽃이 피는지 신음소리 절로 터져나오고.

 

담양 대나무숲 죽순들 발기의 팔뚝 하늘로 내지르는 봄이 아니겠나. 처녀 유방처럼 반남고분도 탱탱하게 부푸는 봄이 아니겠나. 그리하여 해남 부근의 땅들 더욱 벌겋게 달아오르고, 무수하다는 다도해 섬들도 저마다 새 몸단장으로 뭍 가까이 올라오나니.

 

어디 그뿐이리, 이름 없는 들꽃들도 즈이들끼리 귓속말로 뭐라뭐라 속삭이고 깔깔거리고, 산이란 산들도 겹겹 몸을 포개고 어디로들 유장하게 잦아들고, 거대한 구렁이마냥 꿈틀대던 영산강이사 마침내 기진하여 나자빠졌구나.

 

오호라, 지천으로 지천으로 물이 올라, 어디를 가도 한참은 정신이 몽롱한 남도의 봄 연애사태여. 그리하여 나도 대지 위에 벌러덩 누워 뒹굴고 싶은 아흐, 더는 참을 수 없는 봄의 오르가즘이여.

 

-김선태, '봄의 오르가즘' 모두


#무꽃#동백꽃#명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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