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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효산고 입학식 317명 신입생들의 이름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화면에 떠오르고 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별이 되어 담임 선생님의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다.
▲ 순천효산고 입학식 317명 신입생들의 이름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화면에 떠오르고 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별이 되어 담임 선생님의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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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부분

3월 2일 오전 10시 순천효산고등학교 효산관. 사회자의 입학식 개회선언과 함께 입학생 317명의 이름이 삼삼오오 짝지어 핀 들꽃처럼 차례차례 화면에 수놓아졌다. 특이할 것도 없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고만고만한 보통아이들의 이름이었다.

순천효산고 입학식 이제 너에게 가슴으로 말하리라! 물오른 사랑으로 너를 만나리라!
▲ 순천효산고 입학식 이제 너에게 가슴으로 말하리라! 물오른 사랑으로 너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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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욱 가슴이 뛰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찍기 위해 뷰파인더를 통해 아이들 이름이 적힌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나는 잠깐 숨을 골라야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날 리허설을 하면서 이미 확인한 장면들이 아닌가. 나는 궁금했다. 화면에 별처럼 떠오른 자기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는 아이들 마음은 어땠을까?  

'진부한 표현, 혹은 판에 박은 문구'를 뜻하는 클리쉐(Cliche)라는 문학용어가 있다. 원래는 활자를 넣기 좋게 만든 연판(鉛版)을 뜻하는 인쇄 용어였는데 19세기 말부터 별 생각 없이 의례적으로 쓰이는 문구나 기법 혹은 편견 전형(典型) 등 다양한 의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순천효산고 입학식 3학년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준비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 순천효산고 입학식 3학년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준비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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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입학식이 그랬다. 시작을 시작답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시가 있고 음악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이 있었다. 내가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꽃이 되고, 의미가 되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된 아이들. 고만고만하면서도 고유한 제 모습 제 빛깔을 지닌 아이들.

여느 해 같았으면 잠시를 못 참고 떠들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아이들이 뭔가 가슴에 와 닿은 것인지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난 촛불 졸업식 때도 그랬다.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불빛과 닮아 있었다. 그랬다.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진부하고 상상력이 턱 없이 부족한 학교가, 판에 박은 문구와도 같은 우리 교사들의 안이함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 후 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교장 선생님의 입학허가 선언에 이어 이사장님의 장학금 수여가 끝나자 새로 임명된 아홉 명의 1학년 담임교사들이 아홉 명의 제자의 손을 잡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무대 위에는 아홉 개의 의자와 물이 담겨진 아홉 개의 대야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아이들은 의자에 앉고 선생님들은 아이들 앞에 반 무릎자세로 앉았다. 나는 사진기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가 셔터를 눌렀다. 양말을 벗기자 드러난 한 아이의 하얀 발을 어루만지는  담임교사의 손이 카메라 앵글에 잡히자 코끝이 찡했다.

순천효산고 입학식 사랑하는 제자의 발을 손수 씻겨주시는 1학년 담임 선생님들.
▲ 순천효산고 입학식 사랑하는 제자의 발을 손수 씻겨주시는 1학년 담임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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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들은 궁금했을지도 모르겠다. 교회도 아닌 학교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입학식  날 발을 씻겨주려는 것일까? 그 까닭을 전혀 모르는 아이도 담임선생님의 손길이 닿자 황송한 생각에 얼굴이 상기되었으리라. 그것이 설령 일회성 행사라고 해도 아이들 가슴에 파문처럼 번진 감동의 흔적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터. 다음과 같은 사회자의 멘트에 귀를 기울인 아이라면 더욱.

언제나 시작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어떤 기대감에 부풀어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앞에 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방학동안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등 떠밀리듯 나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 <강아지 똥>에는 "하나님은 쓸데없는 물건을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강아지 똥'은 자신은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고 늘 생각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민들레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듣게 됩니다.

"나는 네가 거름이 되어 주어야 꽃을 피울 수가 있단다. 그래서 예쁜 꽃을 피게 하는 것은 바로 네가 하는 거야." 

오늘 입학식 날 선생님들이 손수 여러분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남을 지배하거나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려 하지 말고 이웃을 돌아보고 남을 섬길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입니다. 교육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오늘 뜻 깊은 입학식을 맞이한 여러분들이 바로 그 희망의 주인공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순천효산고 입학식 새로운 시작과 만남, 그리고 행복한 동행
▲ 순천효산고 입학식 새로운 시작과 만남, 그리고 행복한 동행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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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이 끝나고 세족식에 참여한 한 아이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네 발을 씻어주시니까 기분이 어땠어?"
"좋았어요."
"어떻게 좋았어?"
"그냥 좋았어요."

기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아이는 정말 좋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면 족하다 싶었다. 세련되게 말하는 기술이야 앞으로 배우고 익히면 될 일이 아닌가. 그것은 우리 교사의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아이들은 미숙해서 아이들이다. 부족해서,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입학식 날, 나도 새로운 다짐을 해본다. 아이들에게 판에 박은 문구 같은 진부한 교사가 되지 않으리라. 해마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봄꽃처럼 환해지리라. 물오른 사랑으로 한 아이에게 다가가리라.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되리라. 

학교 뒷산에 핀 매화 꽃은 해마다 새롭게 피어난다. 새로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맞이하라는 듯이.
▲ 학교 뒷산에 핀 매화 꽃은 해마다 새롭게 피어난다. 새로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맞이하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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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효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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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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