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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사천은 가마터가 아주 많은 지역입니다.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 사촌리, 정동면 소곡리, 곤양면 포곡리, 곤명면 성방리, 축동면 반룡리 등등. 곳곳에서 옹기나 자기를 굽던 가마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발굴이나 연구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가마터의 숫자나 규모가 어느정도인지 또 어느 곳에 가마터가 더 있는지 자세히 파악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천시 축동면 반룡리에 있다는 가마터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가족 사적으로는 증조부가 사셨던 곳이면서 어릴 때 본인의 본적지이기도 합니다. 본적란에 적혀있던 사천시 축동면 반룡리가 어떤 곳인가를 집중 탐구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에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지금의 사천시 축동면 반룡리는 가화강이 사천만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예전에는 제법 큰 규모의 가마터가 있던 자리였나봅니다. 옹기 파편과 자기 파편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습니다.

가마터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도자기 파편 옹기와 자기 파편들이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 가마터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도자기 파편 옹기와 자기 파편들이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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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춧돌 구조물과 자기 파편 남강댐 방류로 깎여 나간 흔적입니다.
▲ 주춧돌 구조물과 자기 파편 남강댐 방류로 깎여 나간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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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물이 사천만으로 방류된 시점부터 사천만 생태계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 남강댐 방류구이기도 하면서, 깎여 나간 부분에서 공룡화석과 발자국이 발견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가마터도 발견되면서 주목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천지명지에는 '본래 진주군 부화곡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용이 서리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반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동, 관동을 병합하여 사천군 축동면에 편입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룡리에 언제부터 도기소가 있었는지 여러가지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1434년)>에는 '도기소는 주(州)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있다. 오로지 누른 옹기만을 만드는데, 하품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각종 기록에서 보여지는 '반룡포(盤龍浦)' '반룡소(盤龍所) '반룡진(盤龍津)'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가화강 상류 남강댐 방류구와 사천만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 가화강 상류 남강댐 방류구와 사천만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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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댐 방류가 시작되기 전의 가화강 상류에 대해 상상해 보았습니다. 사천만으로 흘러든 바닷물이 내만을 따라 축동면 가산리를 거쳐 반룡리 본촌 마을 앞까지 깊숙이 들어옵니다. 가화강과 사천만이 만나는 중간 지점에는 넓은 갯벌층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 사진에서 보여지는 지점입니다. 가산창까지는 세곡미를 실어나르는 큰 배가 드나들었고 이곳 반룡리까지도 배가 드나들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옛날에 항아리와 옹기, 도자기 파편 등으로 큰 둑을 만들어 나루터로 이용했다는 얘길 들었다"고 동네 어른들이 옛날 얘길 전해 줍니다. 엄청나게 큰 가마터가 있었고 그 가마터에서 나온 파편들로 나루터를 만들 정도였다는 얘기입니다. 

가마터 흔적 대밭 밑으로 큰 규모의 가마터 흔적이 보입니다.
▲ 가마터 흔적 대밭 밑으로 큰 규모의 가마터 흔적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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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 지금은 경작지로 변했습니다.
▲ 가마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 지금은 경작지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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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지로 변한 이곳과 왼쪽 대밭 부근이 가마터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파편들로 나루터를 만들었다는 곳은 오른쪽 대나무 숲 아래였는데 지금은 남강댐 방류로 인해 많이 유실된 상태입니다.

흙속에 묻혀있는 도자기 파편 옹기 파편이 땅속에 묻혀있습니다. 그 당시 사용했던 숯덩이도 나옵니다.
▲ 흙속에 묻혀있는 도자기 파편 옹기 파편이 땅속에 묻혀있습니다. 그 당시 사용했던 숯덩이도 나옵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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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언급되어진 여러 기록과 답사 자료, 사진 자료를 종합해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유추해 보았습니다.

'황옹'은 조선 막사발의 원조로 여겨지는 누른 옹기 항아리입니다. 막사발은 일본에서 '이도다완'이란 이름으로 국보로 지정되어진 아주 귀중한 도자기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1434년 이후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 왜구가 침략해올 시점까지 160여년 동안 옹기와 자기 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누런 옹기 항아리를 지칭하는 '황옹'이 있던 자리인지 아닌지는 전문가들과 연구자들의 몫인듯합니다.

다만 약 420여 년 전의 가마터 흔적을 살펴보며 느낀 감흥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옛날을 상상하며, 옛 자료를 뒤적이며 그 시대를 유추해보는 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몹시 흥분됩니다.

다가오는 매월 첫째주 일요일에 답사 여행은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지역인터넷신문 news4000.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황옹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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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들로 다니며 사진도 찍고 생물 관찰도 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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