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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 통에 한가롭게 별을 연구하시다니...

 

조수현이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두오에게 물었다.

 

"이렇게 움막에서 혼자 지내시는 것을 사람들이 압니까?"

"김 선생님 댁 식구 말고는 모릅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남의 의심을 사기도 쉽고요."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풀지 않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하시고 그래도 누가 물으면 여기서는 낮에 공부만 하고 잠은 김 선생 댁에서 잔다고 하십시오."

"잘 알겠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맘이 놓이는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별을 연구하시나 보죠?"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 통에,,, 참 한가하시군요."

"별은 전쟁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입니다."

 

이두오는 조수현을 물끄러미 보더니 더벅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구 생명체의 기원이 별이라는 것과 우주의 나이를 밝히는 게 제 연구 목적입니다."

"대단하시군요. 성공한다면 놀라운 일이 되겠네요."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성공을 확신하신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제 직감이 맞을 거라는..."

"기회가 되어 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두오는 일어나서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김성식 선생님이 오시는 모양입니다."

 

김성식의 손에는 냄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조수현을 보더니 당연히 깜짝 놀랐다.

 

"장교님이 어떻게 여기에... 두 분이 아는 사인가요?"

 

조수현은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경위를 간추려 말했다. 김성식은 조수현의 말을 들으면서  냄비를 책상에 놓더니 뚜껑을 열었다. 멸치 국물에 파와 계란을 푼 하얀 국수가 들어 있었다. 조수현은 가슴이 찡해졌다. 그녀는 "불기 전에 어서 드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식이 같이 일어나 그녀를 배밭 입구까지 전송해 주었다.

 

지구대 집무실에 돌아온 조수현은 김성식의 말을 생각했다.

 

"이두오 군은 천재입니다."

 

조수현은 세계적인 천재라는 청년이 움막에서 가마니를 깔고 앉아 생쌀이나 씹어가며 지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녀는 청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어서 전쟁이 끝난다면 그는 러시아나 유럽 같은 데에 가서 공부를 더 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김성식과 이두오를 번갈아서 생각해 보았다. 둘 다 남자로서 보기 드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속되지 않으면서도 명민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현실에 임하는 태도는 전혀 달랐다. 김성식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는 가운데 자기가 속한 사회와 더불어 최선의 것을 추구하는 형이고, 이두오는 현실과는 거의 무관한 가운데 자기만의 관심 세계를 따로 구축하고 있는 형이었다. 김성식은 민족이나 전쟁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지만 이두오는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둘 다 개성 있는 남자들이었다. 북에서는 그들과 같은 남자들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타락한 사회임이 분명해 보이는 남측에 오히려 순수하고 개성적인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뭔지를 잘 알 수 없었다. 아버지라면 분명히 김성식을 더 좋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느낌은 달랐다. 그녀는 이두오의 모든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난초의 시인 가람 이병기

 

김성식은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그는 방학 기간이기도 하려니와, 학생들이 부쩍 설치고 교수들은 비굴한 눈동자를 돌리며 옹기종기 모여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랬더니 조교가 집에 찾아와 교수 소집령이 내렸다고 전해 주었다. 그는 면바지에 셔츠 차림을 하고 이백 원짜리 보릿짚 모자를 썼다.

 

학교 건물의 반 이상은 인민군이 사용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인민군에는 의외로 나이 어린 병사들이 많았다. 게다가 제대로 영양이 섭취된 얼굴이 드물었다. 그러나 규율이 엄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인민군에 대한 그의 인상은 과히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김성식이 교무과장실에서 교수 네댓 명과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따발총을 든 인민군 병사 둘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교수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손을 들라고 했다.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교수들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교수들의 팔과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김성식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총을 가졌다는 것밖에는 없는 어린 것들이 노교수들을 윽박지르며 벌세우듯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민군 병사는 교수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지금 반동분자를 색출하는 중이오."

 

참다못해 김성식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이 대학 선생들이오."

 

인민군 병사는 자못 경멸하는 듯한 웃음을 흘리더니, "선생들이라고 반동분자가 없으라는 법은 없지요."라고 비꼬았다. 키가 큰 다른 병사도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남반부의 대학이란 반동의 소굴이라고 들었소."

 

그러자 교수 하나가 나섰다.

 

"그런 게 아니오. 우리 문리과대학은 좌익사상의 온상이라 하여 이승만 괴뢰정권의 주목을 이만저만 받은 것이 아니었소."

 

김성식은 옆 눈을 흘겨 그를 보았다. 교원 숙청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뒤에서 부채질을 하던 문학 교수였다. 김성식은 그런 자의 말에 기생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자신의 삶이 주접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학 교수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인민군 병사는 손을 내리도록 했다. 교수들은 너 나 없이 안도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인민군 병사는 다시 총을 겨누며, "이 중에 김00란 사람 있으면 나오시오."라고 말했다. 순간 모든 시선이 김00에게 쏠리었다. 김00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병사 하나가 김00을 끌고 나갔다. 김00은 김성식과는 거의 친분이 없는 사람이었다. 방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잠시 후 나머지 병사도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갔다.

 

이 바람에 회의가 될 리 없었다. 하지만 교수들은 미리 짜 놓았는지 일사천리로 의정을 진행시켰다. 김성식은 회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입을 열기조차 싫었다. 교수들은 국문과 이병기를 교수 대표로 미리 합의해 놓은 듯했다. 이병기는 난초를 좋아한다는 시조시인이었다. 김성식은 그의 시조를 읽은 적이 있었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다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이병기는 '가람'이라는 호를 쓰면서 일제 말 정지용, 이태준과 함께 <문장>파를 자처하면서 난초와 고전과 골동품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리던 위인이었다. 그는 시를 썼다 하면 으레 자연과 탈속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레 겁을 먹었는지 누구보다 더 약삭스럽게 처신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주 2~3회 게재됩니다.


#인민군#반동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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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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