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독청년아카데미 겨울학기에서 '미래를 여는 한국근현대사' 강의를 함께 한 친구들과 마지막 모임을 전쟁기념관에서 하기로 했다. 전쟁의 위대한 성과와 업적을 본받아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서? 결코 아니다. 국가의 전쟁 기억 방식을 반면교사 삼아 평화를 일구기 위해서였고, 가까이 있는 용산 참사현장도 들러서 우리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현장 학습하기로 했다.

황량한 참사 현장

개인적으로는 용산 참사 현장을 처음으로 찾았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2번출구에서 5분정도 걸어가니 금방 도착했다. 참사현장은 어수선하면서도 휑한 풍경이었다. 골목길로 들어가는 입구를 경찰버스가 가로막고 있었고, 참사가 빚어진 건물 옆에 "진압이 아닌 구조였다면 살릴 수도 있었다"는 대형 조화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 1층 안쪽으로 현장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었고, 앞에서 전철연 회원분이 서명을 받고 있을 뿐. 언론을 통해 보이는 것처럼 북적거리는 인파는 간데없고 빈공간의 허전함이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현장 분향소 텅 비어있다. 와야될 사람이 안 오니까 더욱 허전하다.
▲ 현장 분향소 텅 비어있다. 와야될 사람이 안 오니까 더욱 허전하다.
ⓒ 김태훈

관련사진보기


약 한달반 전인 지난 1월 20일 오전 7시 20분 경 이 5층 건물 옥상에 설치된 철거민 농성용 가건물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망루 안에 있던 시너통에 불이 붙었고, 결국 철거민 5명이 사망했다. 철거민들에게 경찰특공대는 "국민의 편에서 새로워지는" 동지가 아니라, 침략자, 진압군이었을 것이다. 몸에 불이 붙어 타 죽는 전쟁과 같은 아비규환에서도 도망칠 곳 없이 그저 처참하게 죽어갔다. 황량한 가슴을 그대로 묻어둔 채 원래의 목적지로 발길을 옮겼다. 몸을 돌려 첫발을 떼는 순간, 누군가 바닥에 누워 바지 가랑이를 잡은 채 조금 더 울다 가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큰 빌딩의 은유 - 폭탄

용산참사 지역에서 전쟁기념관 가는 길에는 대형빌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아마 방금 보고 온 건물도 헐리고 나서 그렇게 으리으리한 건물로 둔갑하겠지. 그 대형건물들은 건축업자와 개발업자, 부동산 투기꾼들에게는 엄청난 재산가치가 담긴 보화로 보이겠지만, 지역주민과 철거민들에게는 거대한 핵폭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빌딩과 폭탄은 모양도 그 성격도 닮았다. 네모낳게 혹은 둥글게 생긴 둘은 누군가의 피를 담보로 자신의 생존을 지속한다. 구식 무기로는 많은 살상을 할 수 없어서, 신식 무기로 업그레이드를 해야하듯이, 낡아가며 투자가치가 없는 헌 건물은 마땅히 무너뜨려서 더 높고 세련된 건물로 바꾸어야 임대료를 많이 받아먹을 수 있는게다.

빌딩 폭탄 무시무시한 폭탄이 화려한 빌딩의 모습으로 갑갑하게 서 있다.
▲ 빌딩 폭탄 무시무시한 폭탄이 화려한 빌딩의 모습으로 갑갑하게 서 있다.
ⓒ 김태훈

관련사진보기


폭탄의 반대편에서 솟아나는 불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와 같은 무의식적인 그러나 강렬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재개발을 위해 무너지는 건물 혹은 불이 붙은 건물은 폭탄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의 몸과 닮았다. 그런 이미지의 은유에 빠져 한숨을 깊게 내뱉으며 5분 정도 걸어가자 전쟁기념관의 장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놈의 전쟁 기념관은 세계적인 규모로 지어졌단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홍순관 선생님이 추진하고 있는 평화박물관 건립에는 절차적 어려움과 재정적 빈곤함에 허덕이고 있는 반면에. 전쟁기념관은 초호화, 초대형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그 크기에 압도당하며 넓디 넓은 광장의 묵직함에 허우적거리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기념관 안으로 옮겼다.

전쟁의 기운에 압도되다

박물관 1층부터 전쟁 영웅의 동상이 즐비하게 서있다. 그들의 주요 업적은 어느 전투에서 몇명 살상, 고지 탈환, 군사 작전 성공 등이다. 그들로부터 호국 정신을 배운다기 보다는 호전 정신을 배울 것만 같다. 이는 분명 비정상이다. 전쟁은 이성적인 인간을 비이성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평화의 가치를 얻기는커녕 우리에게 고통과 눈물을 준 인민군을 응징해야 한다는 호전적인 주장에 압도당한다. 전쟁 기운과 스트레스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한층만 둘러보았을 뿐인데도, 어깨쭉지에서부터 느껴지는 뻐근함과 편투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스산한 기운이 몰려왔지만, 길게 호흡을 다듬고 비판적 관람을 계속했다.

넓은 광장 비싼 용산땅에 이렇게까지 넓은 광장이 어이없고 가슴 아프다.
▲ 넓은 광장 비싼 용산땅에 이렇게까지 넓은 광장이 어이없고 가슴 아프다.
ⓒ 김태훈

관련사진보기


국가주의 틀의 전쟁관

2층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을 전시하는데, 전쟁에 대해서 철저히 국가의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넓은 의미의 한국전쟁은 여순 사건부터 시작되는데, 여수 사건을 '반란'이라고, 제주 사건의 주범을 '무장 공비'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의 책임은 오직 세계 공산주의 그리고 북한과 김일성에게만 있다는 식이다. 민족적 관점은 물론, 피해 대중인 민중, 그리고 인권, 평화, 더 나아가 여성의 관점은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국가주의 관점, 반공주의 관점만이 허용된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인류의 영원한 적이라는 등식이 너무도 쉽게 성립해 버린다.

한국전쟁의 이면(전쟁 중 국가와 국민의 관계, 군대와 사회의 관계)은 5.16 쿠데타와 군사정권의 성립, 남북한의 긴장, 한미관계, 현대 한국의 시민사회, 인권 현실 등을 이해할 수 있는 현미경인 것 같다. 한국전쟁 과정을 주목하면 전쟁 이후 수립된 국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국가권력이 중앙집권적이고 전제적으로 정착되는 방식, 군대가 시민사회를 압도하고 군인의 총과 칼이 민간인에 대한 통제기구로 변하는 과정, 국민의 자격과 기준 혹은 시민권의 구체적인 내용 등은 모두 전쟁 과정에서 구체화된 것. 국가의 성격이 이렇게 전쟁으로 규정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역사임에 틀림없다. 국가권력 혹은 지배방식은 전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사회질서가 반복, 재생산되어 모든 사회 영역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니까.

은폐된 진실

3층까지 그 광활한 전시실에 글자가 빽빽이 기록되어 있지만, 가려있는 사실도 그만큼 많았다. 대표적으로 전쟁의 원인을 북한의 남한 공산화를 위한 기습이라고 하는 사실. 전쟁 이전까지 874회의 충돌로 소규모 전쟁이 지속된 사실과 미군과 국군이 준 피해는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다. 미군과 한국군도 못할 짓을 많이 했다는 전쟁 체험담은 유언비어로만 돌아다닐 뿐. 남한에서는 약50만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으며, 북한에서는 약 250만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는데도.

또한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다리를 폭파한 사실도 보도 수준에 그친다. 4천여명이 사망한 진실은 전달되지도, 질문하지도 않는다. 이승만과 정부가 대전으로 피란가면서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국가의 생존은 맥아더와 미군에 의존하게 된 것. 이로써 미국과 이승만은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또하나 중요하지만 물어지지 않는 사실은 전쟁이 3년이나 지속된 이유다. 당시 남북의 군사력만 단순비교하면 북한이 훨씬 우위에 있지만,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은 비교조차 안 될 수준이었다. 전후 세계의 냉전질서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보면 미국의 무책임성을 알 수 있다. 누가 무엇을 얻었는가가 반드시 점검되어야 한다. 이처럼 남한의 지배질서는 비공식적인 경험과 기억을 폭력적으로 억눌러 왔던 것 아닐까.

학살 - 강요된 망각의 반복

얼마전에 1950년 7~9월 부산·마산·진주형무소 등에 수감된 재소자와 민간인 최소 3400여명이 후퇴하는 군인과 경찰 등에 의해 불법적으로 희생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의혹이 있었지만, 국가기관이 공식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였다고는 하나, 대한민국이 통치하고 있던 비전투지역인 부산·경남지역에서 남하하는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형무소 재소자들과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은 엄연한 범죄행위이다.

한국전쟁 발발 30년 뒤에 또다시 광주 학살이 재발한 것은 한국전쟁 당시 발생했던 학살을 역사적으로 규명하지 않고 책임자를 법적,정치적으로 단죄하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전쟁전후의 모든 학살, 특히 국군이 자행한 학살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린아이와 여성 등 저항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방법이 동원되었으며, 학살한 이후에는 시체를 불태워 없애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잔인한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15년 이후 베트남전쟁에서 그대로 반복되었고, 30년 후 광주에서도 재연되었다. 이렇듯 전쟁기 군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의 폭압성은 맹수의 발톱처럼 그 존재를 숨기고 있다가 간간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집단 학살은 분명 전쟁의 산물이다. 국가가 폭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쟁 상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학살은 발생한다. 과잉진압의 정치학. 경찰은 전쟁이 종료되기 전까지 정치,교육,종교,도덕,건강,공공복지 등 모든 대민업무를 담당했던 지역사회의 실질적인 군주였으며 인구통계에서 뇌물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것을 가장 일차적으로 수집하는 권력체였다. 50년이나 지났는데도, 용산에서의 경찰은 변한게 없으니 참 슬프다. 전쟁과정에서 민중이 당한 비참함과 인간 존엄성의 훼손이 오늘날의 소외계층의 궁핍과 사회적 배제의 현상과 뿌리가 같으니 더욱.

전쟁의 상처

또 다른 전쟁의 산물을 직접 만났다. 우리가 유엔연합국의 다양한 군복들을 감탄하며 구경하고 있을 즈음에 뒤쪽에서 "맥아더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자유는 못 누려!"라는 할아버지의 도도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이북에서 넘어왔는데 말이야..."하며 허공에 대고 약간 흥분된 억양으로 말씀을 이으셨는데,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들은체 만체했다. 어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자는 생각에선 죄송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할수 있는 반응의 최선이었다. 옆 전시실에서도 그 할아버지를 또 만났는데, 어딘가 앉아서 쉬고 싶은 듯한 기운으로 방향을 잃고 빙빙 돌고 계셨다. 갈 곳이 없어 쉽게 떠나지 못 하시며.

한국전쟁을 경험한 대다수의 민중들은 국가가 더 이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지 못하며 또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소기의 성과라고 할 수 있지만, 왜곡된 사실을 접하고, 전쟁의 상처가 실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경우에는 이런 반응도 나오는 거겠지 싶다. 안타까운 마음도 들면서도 역시나 슬펐다.

비상대비 수준 비상대비 체험관은 정말 최고의 코메디. 퀴즈, 너나 푸세요!
▲ 비상대비 수준 비상대비 체험관은 정말 최고의 코메디. 퀴즈, 너나 푸세요!
ⓒ 김태훈

관련사진보기


'비상대비체험관'은 또 뭐야?

기념관 건물 구석 한켠에 새로 지은 작은 공간이 하나 있었다. 이름도 특이했다. 전장체험실. 말로다 형언할 수 없는 그 처참한 현장을 체험시키겠다고? 왜? 소개글에서 "행정안전부"라는 문구를 보아하니 MB 정권이 만든 듯하다. 그러니 이 곳은 결코 전쟁시기 민중들의 애환을 간접 경험하며 위로하는 공간은 아닐게다. 공포심을 불어넣고 불안을 조장하여 반공의식으로 무장되기를 원하는 수작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역사를 거꾸로 가도 한참 돌아 이상하게 거꾸로 가는 것만 같다.

옆에 딸려있는 비상대비체험관은 더욱 가관이다. 퀴즈풀이를 통해 비상대비 수준을 평가해보고 인증서를 출력해보기도 하고, 각종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안전한 행동요령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비상사태시 정부의 대응과 함께 국민 각자가 스스로 안전을 책임질 수 있는 행동요령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친절한 설명문구가 을씨년스러웠다. 비상사태를 조장하고 북한의 무력 도발이 성공하면 보수세력의 응집으로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려는 작전은 이미 만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이 정권은 이렇게까지 발악을 하는구나.

탈주의 삶으로 전쟁 상처 변혁하기

전시실 바닥에는 관람 방향 안내표지가 길목마다 그려져 있었다. 화살표 방향대로 따라 걸어가면 가장 효율적이고도 순차적으로 관람할 수 있게 해 놓은 것. 덕분에 편하게, 비판적인 생각 없이 따라가면 된다. 사람들은 역방향으로 갈 생각을 안 한다. 워낙 잘 되어 있으니까. 혼자 탈선하면 뻘쭘하고 외롭고 불안하니까. 그때 호탕한 지혜누나가 "야! 이리로 와봐~"했다. 누나 덕분에 정해진 길을 처음으로 벗어났다. 그랬더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강요된 지식에 대한 폭력에 전혀 다른 지식 활동으로 맞설 수 있음을 깨달았다. 전시 문화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생활실에서 '지친 국민의 시름을 달래려고 교육,문화활동을 했다'는 안내판 문구는 그 깨달음을 더욱 증폭시켰다. 국가권력은 전시 교육활동을 그저 감정적 위로로만 치부하는데, 우리는 거기서 더 많은 함의와 희망을 발견해야 겠지 싶다. 

전시 교육 전쟁기의 교육활동은 역사를 변혁하기 위한 희망의 몸짓이었다.
▲ 전시 교육 전쟁기의 교육활동은 역사를 변혁하기 위한 희망의 몸짓이었다.
ⓒ 김태훈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피곤한 관람을 함께 마무리하기 위해 1층 한켠에 앉아 소감을 나누었다. "예속된 앎은 불온한 생각으로 간주되므로, 한국전쟁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예속된 앎, 압제된 앎을 부활시키자.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말문을 열게 해서 감춰 온 상처를 드러내야 하겠다. 분단 이데올로기로 기득권과 권력을 누리고 있는 세력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그런 힘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살아가자. 나아가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면 전쟁의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을 기억해야 하자.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부터 진정 사람으로 보는 훈련을 해나가겠다. 메시아적 시간으로 현재를 잘 살아가겠다. 빛으로 진리를 드러내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과 꿈을 나누었다.

그렇다. 우리는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끌어안고 여기서 살아내야만 한다. 칼 슈미트의 말마따나 "행위로서의 전쟁은 종료되었으나, 상태로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은 전쟁 피해자의 회복이 안되었다는 뜻. 누군가에 의해 잘못되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원한을 풀어주는 일은 진실을 밝히는 말과 다르지 않다. 아직도 암조직마냥 사회 곳곳에 뿌리박고 있는 전쟁 상태는 우리의 탈주의 삶으로써 바꾸어낼 수 있으리.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는 말씀따라 폭탄을 해체하여 따뜻한 가구를 만들고, 부동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여 내 어머니,아버지의 일상적 삶을 지켜드려야겠다. 오늘도 부단히 다른 삶을 살아내고 아이들에게 교육해야겠다.


태그:#전쟁기념관, #용산참사 묵상, #폭탄 빌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