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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칙한 조선인물실록> 겉그림
 <발칙한 조선인물실록> 겉그림
ⓒ 추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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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황희 정승은 '서로 자기가 옳다며 다투는 두 계집종에게 "네 말이 옳다" "네 말도 옳다" "부인말도 옳다"는 판결을 한  일화'로 우리에게 유명하다. 일화 속 황희 정승은 지혜롭다. 게다가 워낙 청렴결백했다던가!

때문에 '은연중 지혜로운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랑 속에서 자란 그 아들들은 오죽 모범적이랴.' 이렇듯 그 아들들도 아버지 황희 정승처럼 지혜롭고 근검절약하는 바람직한 선비일 거라 당연시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발칙한 조선 인물실록>(추수밭 펴냄)을 통해 만나는 황희 정승의 아들들은 너무 뜻밖이다. '간 큰 도둑', '건달'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니 말이다.

저자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진 황희 정승이 실제로는 썩 청렴결백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얘기다'라고 쓰고 있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지혜로운 명재상으로 알고 있던 터라 너무 뜻밖이었다.

황희 정승은 청백리, 그 아들들은 '간 큰 도둑'에 건달?

병진년에 내탕의 금잔과 광평 대군의 금띠를 잃어버렸으나 훔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동궁이 쓰던 이엄을 잃어버렸다. 중생이 한 짓으로 의심하여 삼군진무를 시켜 그 집을 수색하게 하매, 이엄을 잠자리 속에서 얻게 되어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였더니, 그전에 잃어버렸던 금잔과 금띠도 모두 중생이 훔친 것으로 다 자복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22년(1440) 10월 12일 기록 중에서

설명을 덧붙이면, 황희는 여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중생'을 궁궐에 취직시킨다. 그것도 훗날 보위에 오를 왕자의 거처인 동궁전에. 이런 황희 정승의 속셈은 빤하다. 문장은커녕 무예 실력도 전혀 없는 빈충이 황중생은 부모 잘 둔 덕에 이렇게 입궐, 출세가도를 시작한다.

세종 18년(1436)에 내탕고에 있어야 할 금잔과 광평 대군의 금띠가 사라진다. 사사로운 도난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했지만 임금의 재산을 보관하는 내탕고 물건이 사라진 것은 보통사건이 아니다. 그것도 금잔과 함부로 팔아먹을 수 없는 왕실의 금띠라니! 범인을 잡고자 많은 사람들을 조사하고 문초하지만 끝내 밝히지 못한 채 4년이나 지나버린다.

그런데 4년 후인 세종 22년(1440)에 도난 사건이 또 발생한다. 이번에는 동궁(세자)이 쓰던 이엄. 이엄은 사모를 쓸 때 쓰던 일종의 방한구다.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도 '황희 정승의 아들'이라는 특별예우로 의심조차 받지 않던 황중생이 이번에는 지목받게 되고 집을 수색하자 도난당한 이엄도 나왔고 4년 전의 범행도 자백 받았다는 그런 기록이다.

4년 전에 황중생이 훔친 금잔의 실제 무게는 20냥, 그런데 이때 중생의 집에서 나온 것은 11냥. 잘려 나간 9냥의 금 때문에 의금부의 심문은 계속된다. 이때 중생이 금 9냥을 쪼개 가져간 사람으로 실토한 이름은 놀랍게도 황희 정승의 또 다른 아들인 황보신. 황보신은 황희 정승의 적자 3형제 중 한 사람으로 의금부지사까지 지낸 인물이다.

이런지라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증거가 분명하건만 의금부의 속사정을 빤히 아는 황보신은 빠져나갈 궁리를 하며 금잔에 대해 뚝 잡아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황보신이 의금부지사로 근무하면서 말 한 필, 배 두 필을 훔쳐다 첩 윤이한테 줬다거나 의금부에서 몰수한 금동곳을 첩의 노리개로 만들어줬다는 등 그동안의 부정들이 속속 드러난다.

다른 사람이 이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사나 유배와 같은 중형을 면치 못할 상황이건만, 세종대왕의 충직한 신하(?) 황희 정승 감싸기로 '장 300대에, 자자는 면하게 하고 유 3000리를 속(죄를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고 죄를 면하는 것, 일종의 보석금)으로 바치게 하고 윤이(보신의 첩)...' 이와 같은 파격적인 처벌에 그친다.

여기에서 끝냈으면 좋으련만, 이 상황에 이번에는 또 다른 아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황보신이 죄를 짓고 파직됐으니 연봉으로 받던 과전을 반납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시 호조 참판인 황희의 또 다른 아들 황치신이 나라에 바쳐야 할 땅 대신 자신의 허접한 땅을 반납한다. 즉 좋은 땅을 자신의 허접한 땅과 바꿔치기 해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그동안 수많은 신하들이 탄원을 해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황희 정승 편들기를 하던 세종대왕도 두 손 다 들고 만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물불을 가리지 못한 황희 정승의 아들들. 명재상 황희 정승은 나랏일이 바빠 아들들을 제대로 관리할 시간이 없었던 걸까?

책을 통해 청백리 명재상 황희의 실체를 조금 더 알아가는 재미와 함께 드는 생각은, 이런 아들들 때문에 속깨나 끓었을 황희 정승의 아버지로서의 아픔이나 도둑질을 한 아들을 호적에서 파낼 수밖에 없는 그 아픔에 대한 공감이다. 밖에서는 권위가 꼿꼿한 재상이었지만 집에서는 마누라와 자식의 말 한마디에 웃고 울었을 것이라는 일상인의 공감까지 들었다.

역사적 인물들, 그들도 우리처럼 뼈가 있고 피가 통하는 사람이다

▲며느리 문제로 골치깨나 썩은 세종 ▲'고위공무원윤리법 위반'으로 불명예 퇴직한 악성 박연 ▲'떡 대결' 이후 출세한 한석봉, 참 까칠하시네! ▲자신만의 논리로 임진왜란 공신책정을 한 선조, 해도 너무 하셨네 ▲목화씨로 민족의 영웅 된 문익점은 실은 반역자 ▲연산군에게 젖을 물린 봉보부인 최씨 왈, "사랑은 젖을 타고 흐른다" ▲대단한 노비 임복, 왕에게 딜을 걸다 ▲부마자리 거절하다 양반에서 노비로 전락한 남자 이속 ▲동래에서 왜인들에게 조선 여자 팔던 국제 포주 고갑산 ▲ 중국어를 잘해서 인생이 꼬인 남자? ▲허리세우기 데모를 한 사관들?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궁상에도 이유가 있다?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한석봉이 까칠했다거나 문익점이 반역자였다는 것 등의 제목을 보면서(물론 필자가 붙인 것이지만) 혹자들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역사인물들의 흥미위주 사생활이나 치부를 꼬집자는 가십거리 책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글쎄 그럴까?

황희 정승의 아들들 이야기만 봐도 알겠지만, 책 속 이야기들은 모두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당시 사람들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저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우리가 그간 역사 알기에 소홀한 나머지 미처 몰랐거나 교과서 등을 통해 한 면만 지나치게 부각시키다보니 우리에게 잘못 인식된 역사인물들의 진실과 인간적인 면을 들려준다.

역사적 사실의 한 면만 보거나 한 인물의 업적만 부각시켜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행이도 최근 우리 역사를 솔직하고 제대로 보자는 취지의 책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이 책은 <엽기 세계사> <엽기 조선 풍속사><엽기 조선왕조실록> 등 쉽고 편안한 역사쓰기로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저자의 신간이다.

또 다른 재미는 각 주제 뒤에 덧붙인 주제와 관련된 역사상식들이다. 북경 친구 사귀기에 집착한 연암 박지원 편에는 조선의 베스트셀러인 <열하일기>, 문익점 편에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전래된 작물들을 알려준다. 간택 절차와 방법, 왕족들의 행운과 불행, 사관들의 파워, 공직자들의 윤리기강 등은 알아두면 사극을 보는 데 도움이 많을 그런 이야기.

"어린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펼쳐봤음직한 학습대백과사전이나 위인전기를 보면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은 인간의 욕망도 본능도 무시한 성인 그 자체였다. 그들도 우리처럼 배고프면 밥 먹고 예쁜 여자를 보면 가슴 한쪽이 요동치는 사람일 터인데, 그런 책에서 그리고 있는 인물들은 이런 최소한의 본능마저 억제한 인조인간 같은 느낌이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왜 영웅 아니면 역적으로만 그려지는 걸까? 이 책을 쓴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박제된 영웅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그들도 우리처럼 뼈가 있고 피가 통하는 사람이란 걸 전해주고 싶었다. 그들의 업적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단순히 교과서와 역사책 속에 있는 인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옆집에 사는 좀 잘나가는 아저씨 아줌마로 바라본다면 역사는 새로운 재미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발칙한 조선 인물실록>(이성주 지음/추수밭 펴냄/2009.1/13000)



발칙한 조선인물실록 - 역사적 인물들, 인간적으로 거들떠보기

이성주 지음, 추수밭(청림출판)(2009)


#황희 정승#위인들#세종대왕#이성주#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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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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