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청년들은 의용군으로 나가면 남은 가족에게 식량 특별 배급을 하는 등 생활을 돌봐준다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상했다. 와서 보니 가족들은 식량은커녕 시래기죽으로 연명하기도 힘든 형편들이었다. 반면 박광태 같은 바닥빨갱이의 집에는 양식이 가마니째로 들어갔다. 박광태의 이웃 사람들은 박광태의 집에서 저녁마다 풍기는 조리 냄새로 굶주린 위장이 뒤틀린다고들 했다.
공습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 인민군은 고사포로 대응하는 일마저 중단했다. 대신 등화관제가 엄격히 시행되었다. 혹시 불빛이라도 조금 새어 나오면 정릉 골짜기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이 달려와 총을 겨누고 위협했다.
어제는 김성식의 앞집 유씨 집에 인민군이 달려갔다고 했다. 유씨네는 아들 둘이 의용군으로 나가고 70 노부부와 병든 여인과 어린 아이 등 7명이 굶다 지쳐서 모두 누워 있었다. 유씨는 밤이 되면 촛불을 켜 놓고 일부러 문을 열어 놓았다. 인민군이 와서 총을 들이대자 노인이 말했다고 한다.
"쏘라우. 이대로 창자가 비틀어져 죽는 것보담 나으니까. 폭탄이 떨어져서 다 죽으면 더욱 좋겠지."
인민군도 어쩔 수 없어 그만 물러갔다고 했다. 이렇게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었다.
학교 급사가 김성식의 집으로 찾아왔다. 7월 분 봉급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7월까지는 교수직이 있었으니 봉급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래도 김성식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봉급은 일급(日給)으로 계산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출근부 도장이 찍힌 날만 계산한 것이었다.
"난 본시 날품팔이가 아니었으니 7월 봉급을 포기하겠소이다."
"어떡합니까? 이런 세상에, 경우를 밝히시지 마시고 제가 이 먼 곳을 거듭 다니지 않도록 도장이라도 찍어 주십시오."
김성식은 분노를 참으며 눈 딱 감고 도장을 질러주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오후가 되자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김성식은 이두오와 함께 비를 맞으며 무·배추의 씨를 내렸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두오는 비쩍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데도 산에는 듬성듬성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여인과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도토리를 따고 있었다. 거의 모든 집들이 도토리를 따다 껍질을 벗기고 물에 담가서 유독 성분을 우려낸 다음 가루로 빻아 묵을 해 먹고 있었다. 김성식도 어제 진종일 도토리의 껍질을 벗겼다. 그는 지금도 손톱 밑이 얼얼하게 아팠다.
"선생님, 흙냄새가 참 좋습니다."
"배가 고픈 모양이군. 연구는 잘 되어 가나?"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결정론을 반박해야 하는데 생각뿐 계산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결정론이라니, 그게 무언가?"
"우주와 자연의 제반 현상이 미리 예정되어 있는 대로 흘러간다는 논리입니다."
"그럼 운명론이거나 예정론이라는 말인가?"
김성식은 물리학에서 그런 문제까지를 다루는 줄을 미처 몰랐었다.
"그건 철학적인 문제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철학은 관념이지만 물리학은 실증입니다. 그러기에 사실 물리학자들 중에는 철학자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럼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이 전쟁이란 것도 예정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신이 태엽을 감아놓은 거대한 시계라는 겁니다. 태엽이 천천히 풀리면서 역사와 자연 변화가 진행된다는 것이지요."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네. 그건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
말해 놓고 보니 김성식은 자신이 부질없는 것을 물었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자유의지가 있어서,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전쟁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운명론에 기울고 있는 자신을 의식했다.
"하기야 이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부하된 운명일지도 몰라."
"선생님, 제 생각은 그게 아니라니까요. 자연과 우주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보는 것처럼 안정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하이젠베르크 같은 사람은 결정론을 부정하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다음에 시간 날 때 조금 쉽게 설명해 주게."
김성식은 허리를 펴고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 인민군 장교는 요즘 안 오나?"
"올 때가 되었습니다."
이두오는 밭 너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의 눈에 그리움의 빛이 머금어지고 있었다.
"내가 물어 볼 말은 아니지만 두 사람 사이가 아주 가까워 보이더구먼."
이두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바뀌면 북으로 갈 여자 아닌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김성식은 분단만 아니라면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리는 청년과 처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남북녀 아닌가?' 하지만 생각뿐 김성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아니라면 벌써 통일을 이루고...
인민공화국에서 말하는 해방의 달이 지난 지도 꽤 되었지만, 또는 맥아더가 김일성에게 항복을 요구한 시한도 넘겼건만, 이렇다 할 아무런 신통한 소식이 없었다.
김성식은 전황이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좌익 인사 김일출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김일출은 전쟁 전 북한에서 평화호소문을 가지고 남하한 대표 3인의 한 사람인 김태홍의 아버지였다. 김성식은 새로운 뉴스거리를 얻어 듣고 싶었다. 또한 그는 사학자로서 점령지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정릉고개를 넘으니 성북동 골짜기가 이어졌다. 그는 골짜기를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야산을 넘어갔다. 그러자 혜화동이 나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두드렸다. 김일출은 강습으로 평양에 가고 없었다. 그의 아저씨뻘인 김두명이 대신 김성식을 반갑게 맞이했다.
김두명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이 손을 안 댔더라면 벌써 남북통일 이루고 우리끼리 오붓하게 새 살림을 꾸렸을 텐데, 참 객쩍은 친구들의 등쌀로 이 희생이 무어란 말인가?"
김성식은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째 자제 태홍 씨는 소식이 있습니까?"
김태홍은 월남 후 구속되어서 전향을 하고 방송을 통해 인민공화국을 비방했던 사람이었다.
"인민군이 죽인 건지 아니면 대한민국이 죽인 건지는 몰라도 종적이 묘연한 것을 보면 필시 죽기는 죽은 모양일세."
김태홍은 양쪽에서 다 미움 받을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불운한 사람이었다.
"분단과 전쟁에 희생이 되신 분입니다."
김두명은 말없이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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