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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이 짧은 시간 동안>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새벽편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서울의 예수> <별들은 따뜻하다> 등 주옥같은 시와 동화를 쓰고 있는 1950년생의 시인 정호승(鄭浩承) 선생이 있다.

하지만 같은 1950년 우리 문학사에서 자취를 감춘 충주 출신의 월북시인 정호승(鄭昊昇-본명: 정영택(鄭英澤)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인 정호승
▲ 시인 정호승
ⓒ 도서출판 온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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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충주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가 중앙고보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중 좌경 서적을 읽다 정학, 무기정학을 연이어 당하고 퇴학한다. 이후 약관의 나이인 1935년 '조선문학사' 발행 및 편집인으로 2년 간 활동하기도 했던 정호승 선생은 24살이 되던 1939년 시집 <모밀꽃>을 조선문학사를 통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문학, 시건설, 자오선, 풍림 등에 시를 꾸준히 발표하였고, 해방 직후 좌익 활동으로 복역을 하기도 했다. 1948년(33세)에는 남북협상을 위해 노력하던 김구 선생과 동행하여 북에 갔다가 돌아와 2차 복역을 하기도 했다. 전쟁 중이던 1950년에 충주지역 예술동맹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한 인물이다.

현재 그의 가족은 충주와 청주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1968년 북한의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확인된 바 없다.

그의 시집 <모밀꽃>은 출간 56년이 흘러 도서출판 온누리에서 1995년 재출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진대 국문학과 서범석 교수의 연구결과와 시인 도종환 선생의 도움을 받아 재출간되었다.

시인 정호승인 1930년대 한민족의 현실을 특유의 서정성과 사회적 현실성으로 묶어 꽃피워 낸 시인, 약관의 나이에 '조선문학'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사에서 이름이 사라진 이유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 않았고, 월북을 한 관계로 신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1974년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국어국문학사전>에도 '조선문학'은 창간초기 중국인 정호승이 발간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대한 정보는 잘못된 것이 많다. 또한 일제의 탄압과 해방 직후에도 좌익 활동을 꾸준히 한 관계로 소실된 원고가 많다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책 <모밀꽃>
▲ 책 <모밀꽃>
ⓒ 도서출판 온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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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의 시집 <모밀꽃>(도서출판 온누리)에서 압권은 제목도 없는 4줄짜리 서시이다.

나는/들 가온데 외로이 선 허수아비/소슬바람에 풍겨오는/메밀꽃 향기를 사랑한다

시인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지식인의 모습.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자조하고 자탄하며 스스로를 허수아비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심약하고 고독한 시인은 소박하고 순결한 꽃향기를 품고 살고 싶어 하는 희망의 모습을 품고 있기도 하다.

까닭모를 슬픔이/따스한 봄위에 차다//숨끼만하는 수집은 이乳房이/진달내 꽃까지 받어들고/바르르 떨기만 하노니//연못가에 수양버들/매디 매디 호들기여/행여나 어린꿈을 바숴놓지 마옵소.               호들기여(전문)

꽃다운 처녀에게 봄은 아직도 슬프다. 처녀의 가슴엔 진달래가 피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숫처녀 가슴 울리는 버들피리는 불지마라. 

어느넋의 슬픔이기에/이리도 구슬피 흐느끼느뇨//방안에 가득 초ㅅ불이 차듯/빗소리 가득 뜰에 차고/내마음에 차고//무슨傳說의 토막인양/머-ㄹ리 캉캄한 어둠속으로/반디불 깜박 호들기소리 잇겨/-太古속으로/뱅고름이 피여나는 동백꽃-//초마끝 낙수물 똑. 똑./잃어진 수집음이 문득 그리워/눈망울이 매끈히 젖고//아지랑이의 슬픔 촉촉이/햇쪽이 웃고 돌아서는 머리채로/서글피 도사리는 밤이다.            봄비나리는밤(전문)

시인의 봄비 내리는 소리를 구슬피 우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잔잔히 들려오는 낙수물 소리가 내 마음에 차고 가슴에서 넘치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나는 빗소리에 눈물 흘리며, 밤잠을 설친다. 
                          
요  죄많은 꽃아/고  해맑은 눈초리로/왜  햅필 이가슴에다/빩안 생채기를 내여놓는단 말이냐//내  속사랑을 아서가겠거든/조꼼도 남기지말고/나  몰내 싹싹 핧어가든지//요  서투른 도적아/고  볼우물에 고힌 웃음으로/선불만 질너놓고 어찌하겠느냐?//왜  대답이없느냐?/어찌하겠느냐?/요  서투른 도적아........               서투른도적아(전문)
                 
예쁘지만 3~4일 밖에 가지 않는 꽃을 두고 서투른 도적이라고 표현하는 시인의 글 솜씨가 대단하다. 첫사랑처럼 마음 설레게 하는 꽃들이 피고지면서 나의 마음에 선불만 지피고 떠난다.                                                             

해마다 봄이오면/나는/한가지 꽃을 피우기위하야/만가지 잡초를 솎어왔소.//그러나/아!/꿈심은 터전엔/회오리바람도 잦었소.//뜯맞는 벗들은/生活이 아서가고/사랑은/生活아닌 生活이 짓밟었소.//이해도 벌서/봄이 왔나보오/저 들창문을 닫어주오/호들기소리 듣기싫소.//알알의 슬픔을 색인/슬픈 마음의 墓誌銘은/푸른술로 달내주어야하오.//女人의 때묻은 속옷/한떨기꽃인양/내 나비되면 고만아니겠소.//나는 외로운 蕩兒/나는 마음弱한 蕩兒/술과 게집과 그리고/한가닥 담배연기를 사랑하오.      나는蕩兒(전문)

식민지 지식인의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작품이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과 한 가지 꽃을 피우기 위해 만 가지 잡초를 솎아내었던 자신의 무능력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 속에서 술과 담배, 여자로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질타하고 있는 듯하다.
            
山蔘꽃 香기로운/저 - 山말냉이에/무지개 박었다 하기로/내 그곳을 찾어갔소//아아 !/꼬리를물은 山봉오리만/숨막킨 눈알을 볶어댈뿐/무지개는 나를 피해/저 바다복판으로 옮겼구나//山蔘마저 뽑어가지고 갓기에/기 - ㄴ 한숨 박어놓고/타박 타박/내 흐느껴울며 도루왔소         무지개(전문)

희망과 무지개를 찾아 떠났지만, 눈앞에 잡힐 것 같은 무지개는 다가설수록 멀어지고 한숨은 두고 돌아오면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내일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어느 女人의/슬픈 넋이 실린양/햇쪽이 웃고 쓸쓸한/모밀꽃//모밀꽃은/하이얀꽃/그女人의 마음인양/깨끗이 피는꽃//모밀꽃은/가난한꽃/그女人의 마음인양/외로이 피는꽃//해마다 가을이와/하이얀이 피여나도/그마음 달랠길없어/햇쪽이 웃고 시드는꽃//세모진 주머니를 지어/까 - 만 주머니 가득/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아모말없이 시드는꽃      
      모밀꽃,1(전문)

슬픈 여인의 모습을 한 모밀꽃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시인 정호승의 서정성과 목가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올해 같이/가무는 해는/들에 가 - 득/모밀꽃이 피여나//모밀꽃이/많이 피는해는/마음이 가난하고/나라가 가난하고//올해 같이/목마른 해는/젊은이 가슴가득/모밀꽃이 피여나//모밀꽃이/많이피는해는/마음이 가난하고/나라가 가난하고//하이얀 메밀꽃을/위로해 주지못하고/주머니 가득/하이얀 비밀을/어루만저 주지않어//몇해만큼 한번씩/들에가득/마음에 가득/모밀꽃이 피여나기 위하야//날은 가물고/목은 마른다.            모밀꽃.2(전문)

전편과는 달리 가난한 농촌의 현실과 힘없는 나라의 모습을 모밀꽃을 통하여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날이 가물고 목이 마른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뉘를위해 아껴왔는지/싹싹 긁어뫃아야 석섬을/두섬을 짊어지고가니/凶年이라고 두말을 減해주더라//今年같은해/農事 참 잘되었다구/연방 치하도 하고/장예벼나 속히가주오라구/命令詞를 붙이는 地主님/눈초리도 음침하다//視線을 피해서 고개를돌리니/옆에있는 도야지울엔/누룩도야지가 길게누워 낮잠만자는구나/그-욕심많은 놈이/배ㅅ대지가 여간 불러서야/죽을 저-만큼 남겼을게냐/그놈의 배ㅅ대지/地主님의 배ㅅ대지와 흡사하다//가-마니있자 이도야지가?/그렇지! 우리것과 한날 사왔었지-/우리새끼가 원악 적기야했지만/짐성두 먹어야크지!/내꼴좀보지 살한점붙었나//말해야 所用없을줄 짐작은하면서/延期해달란게 나의불찰일가?/안된다면 그만이지/눈을 그렇게 흘겨뜨고/소리소리 지를게 뭬-람//집에남은 베한섬을 마저/질머지고 나오는 나의꼴을/바라볼 식구들의 表情이/지금부터/눈에 발피구 발피구//         - 풀무고개에서                 소작인(전문)                     

앞에서 선보인 시인의 시와는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주와 소작인 그리고 소작인이 키우는 돼지를 통하여 나라 잃은 백성 가운데 특히 소작인의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소작인 보다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소작인의 돼지가 부러운 날이다.


모밀꽃

정호승 지음, 온누리(1995)


#정호승#월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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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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