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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롭게 내린 봄비

 

내가 사는 강원산골 안흥지방은 지난 겨울 가뭄이 몹시 심했다. 먹을 물조차 딸려 빨래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모아 두었다가 아내가 서울 가는 길에 해왔다. 농사꾼들은 기상이변을 크게 걱정하며 올 봄 농사를 매우 불안해 했다. 그 무렵 기상청의 예상으로는 봄 가뭄이 몹시 심할 거라는 예상이었다.

 

다행히 하늘은 기상청의 예상을 비웃듯 올 봄에는 비가 자주 내렸다. 요즘은 한창 모내기철인데 이삼일 한 번꼴로 비가 내려 농사꾼들에게는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사실 이즈음이 농사꾼들에게는 가장 물이 필요한 때로 가뭄이 심한 해는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제 오후부터 비가 내려 글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몸부림이 났다. 아직 몸살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지만 비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재 너머 목욕탕에 들러 몸을 닦은 다음 이발소를 들러 머리를 깎고 돌아올 셈이었다.

 

버스를 타고 운무가 가득한 전재 고개를 넘는데 안개구름 사이로 보이는 매화산 신록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지없이 싱그럽다. 아름다운 산하다. 나는 이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무 연고도 없는 이 산골마을을 내 고향처럼 사랑하며 살고 있다.

 

 

비오는 날이 대목

 

지하에서 갓 퍼 올린 맑고 따뜻한 물에 몸을 잠시 담근 뒤 다시 버스를 타고 단골 이발소로 갔다. 내 예상과는 달리 손님이 많았다. 나는 이곳에 와 이발소에 갈 때는 반드시 목욕탕에 다녀간 뒤에 간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꾀죄죄한 냄새가 나게 마련인데 행여 내 몸에서도 그럴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가위질을 하는 이발사에게 오늘 웬 손님이 이렇게 많은가 물었다.

 

"농번기 때는 비오는 날이 대목이에요."

 

이발사는 미처 내가 몰랐던 말을 했다. 이즈음 농촌은 모내기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하지만 오늘처럼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은 농사꾼은 쉬는 날로 미뤄두었던 머리를 깎는 날인가 보다. 예삿날과는 달리 두 사람 이발을 기다린 뒤 내 머리를 손질했고 그 새 새 손님을 맞았다.

 

면도도 생략하고 머리감기도 간소히 한 채 이발을 마치자 이발사 아내는 굳이 거스름돈을 내주는 걸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상쾌했다. 참 세상은 재미있다. 비는 농사꾼만 좋은 게 아니고 시골동네 이발사에게도 대목을 주는 것을 보고 세상만사가 서로 얽혀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계절의 변화, 가뭄과 홍수, 추위와 더위 등 이 모든 게 서로 얽혀 거기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세상은 돌아간다. 실비를 맞으며 앞집 노씨 배추밭을 지나오는데 반갑게 인사를 한다. 노씨 표정이 몹시 밝다. 배추밭 배추가 엄청 잘 자라고 있다.

 

6개월만에 하늘과 땅 차이인 배추 값

 

"배추농사 잘 지었네요."

"박 선생은 뭘 보고 잘 지었다고 그러시오?"

"올 봄은 비가 자주 내려 배추들이 죄다 아주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지 않아요."

"배추농사 잘 지었다는 것은 배추가 하나같이 골고루 잘 자랄 때 잘 지은 거지요. 내가 봐도 올 배추농사는 아주 잘 되었어요."

 

노씨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배추 값이 장난이 아닌 모양이던데."

"그런가 봐요. 서울에서는 배추 한 묶음에 만원도 더 간대요."

"파셨나요?"

"그럼요, 벌써 한 달 전에 넘겼어요."

"얼마나 받으셨나요?"

"일천팔백."

"좀 더 버텨보지 그랬어요."

"아 그 사람(중간 밭떼기 도매상)도 좀 먹어야지요. 객지를 떠돌며 물 밥 다 사먹으면서 처자식 먹여 살리고자 돌아다니는데 남는 게 있어야 올 가을 배추도 팔아주지요."

 

현지에서 보니까 밭떼기 중간도매상은 농사꾼에게는 필요악이다. 만일 그들이 없다면 농사꾼이 배추를 싣고 서울 가락시장에 가야 하고, 자칫 잘못하면 제 값도 못 받고 여러 날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게다. 또 중간도매상도 미리 배추를 밭떼기로 사지만 배추 값이 폭락하면 밭에서 뽑아가지도 않고, 이미 지불한 배추 값을 고스란히 날려버리는 위험 부담도 크다고 한다. 이들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다.

 

지난해 가을배추는 풍작으로 노씨네 배추는 밭에서 썩혔다. 풍작으로 아무도 사가지 않는 것을 평년작의 일할에 지나지 않는 팔십만 원에 중간도매상에게 팔았는데 그가 한 차 싣고 서울 가락시장에 가서는 차비도 안 나오니까 다시는 오지 않아 겨우내 밭에서 묵혀버렸다.

 

 

불과 6개월 사이 배추 값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만 아니라 농산물 팔자도 시간문제다. 엊그제까지 천하를 호령하던 고관대작도 불과 몇 달 사이 검찰의 칼날 앞에 고양이 앞에 쥐 신세가 되는가 하면, 엊그제까지 별 볼 일 없던 사람이 혜성처럼 나타나 오늘 언저리 사람을 놀라게 하는 세상사다.

 

지난 겨울 노씨네 배추밭의 썩어문드러지는 배추와 오늘 금값으로 팔린 배추를 보면서 누구나 세상만사 느긋하게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풍년 배추밭에서 시들어가는 배추처럼 별 볼이 없이 움츠려 사는 그대여, 묵묵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그대에게도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올 것이다.

 

우리 모두 힘들 때일수록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자.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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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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