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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9년 3월 초, 날짜를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인권변호사로 활동을 하고 있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을 첫 대면을 한날이다. 그해 3월 16일 지하철파업을 앞둔 서울지하철노조 집회 현장에 그가 나타났다. 성동구 용답동 군자기지 노동조합 광장 앞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그렇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가끔 집회 현장에서 연설을 한 모습이 <한겨레>, <주간 노동자신문> 등 언론에 약간 비춰지는 그런 모습이라고 할까. 그는 집회가 시작되기 전 서울지하철노조 앞 광장 한 모퉁이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바로 그 중 나도 포함돼 있었다.

 

노태우 군사 정권의 부도덕한 노동자 탄압에 대해 주로 얘기를 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지난 89년 당시 그는 노동자 대투쟁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노동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군사정권에 항거해 노사분규가 자주 일어났던 현대중공업노조, 현대 자동차 노조, 서울지하철노조, 풍산금속 안강공장노조 등 대기업 노동자 투쟁현장에 주로 찾아다니며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 후 통일민주당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대통령과 당시 안기부장 출신 장세동씨에게 광주 5.18시민혁명의 관련 질문을 했고, 거짓 답변에 예리한 논조를 펼쳐 꼼짝 못하게 하는 그런 모습이 스타 의원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모습을 TV로 간접 경험했다.

 

 

그리고 그가 부산시장 후보와 국회의원에 출마해 고배를 마시는 모습, 종로에 입성해 국회의원이 된 모습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모습 등이 뇌리를 스쳐간다. 그 후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되는 과정,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성공 및 무효선언 등으로 곤혹을 치렀던 기억들도 되살아난다.

 

그를 두 번째로 직접 대면한 일이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기 전, 2002년 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한국일보> 송현 클럽에서 노무현 예비후보 초청 간담회가 열렸다. 아마 시민단체 주최로 열렸던 것 같다. 당시 디지털텔레비전 전송방식을 두고 미국식이냐 유럽식이냐 하는 논쟁이 한참 가열될 때였다.

 

당시 디지털텔레비전 전송방식과 관련해 이동수신이 강한 유럽식에 대한 입장에서 많은 글들을 인터넷매체에 기고할 때였다. 이 때 "대통령에 당선되면 전송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려고 그곳을 찾아 갔던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하려는 순간, 바로 직전 누군가가 내가 하고자했던 질문을 해 버린 것이 아닌가. 노 예비후보는 "시민사회단체가 원하면 유럽식으로 가야한다"고 명확히 답변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돼 미국식이 최종 선택된 아쉬움도 있었다. 당시 이기명(당시 <용인신문> 논설위원) 후원회장과 남영진(당시 <미디어오늘> 사장을 그만 둠) 보좌관도 그 자리에 함께 동승했다.

 

세 번째 만남은 대통령이 당선돼 당선자로서 여의도 민주 당사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민주당사 당직자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던 노무현 당선자의 취재 경쟁이 한창일 때였다. 나는 많은 기자들 앞에서 큰소리로 이번 선거에서 '인터넷언론 보도 어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날 내·외신을 비롯한 인터넷언론까지 가세해 민주당사는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기자들의 여러 질문이 쏟아졌고 너무 시끄러웠다. 하지만 나의 질문에 대해 "좋았습니다"라는 짤막한 답변을 했다. 그리고 당직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옮겨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당선 인사말을 이어갔다.

 

이런 모습들도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았다. 이날 권양숙 여사도 함께 동승했다. 현장 스케치기사를 <오마이뉴스> 기사로 전송했다. 이후 대통령 재직시 인터넷기자초청 토론회, 김미화 씨가 진행한 초청 토론회, 2007년 임기가 종료 시점에서 기자실 문제관련 언론관계자 토론회에 배석자로 참석해 그의 발언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재직시절 한미 FTA 비준 문제, 한나라당 연정문제 등의 발언에 대해 실망감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귀향해 농민들과 진정성을 가지고 평범한 농촌 활동을 한 모습, 농촌생활로 새로운 삶을 추구한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후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검찰의 출두와 가족, 측근 등의 비리로 도마에 올랐다. 그는 괴로움을 못 이겨, 그가 바라던 세상을 뒤로하고, 하직인사(유서 남기고)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퇴임 후, 1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소박한 삶에서 연민의 정을 느껴 본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한 식당 주인이 가게 앞에 검정색 현수막을 내걸었다. 퍽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16대 노무현 대통령, 다 잊고 편안히 잠드소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금 지나가니 청학 농협 사거리에도 검정색 천으로 만든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조문 안내 현수막이었다. '근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임시분향소 -장소 퇴계원 풍향출장소 옆 일석빌딩 4층-' 농협 사거리에서 바로 옆을 지나는 백발 노인의 가슴에 근조 리본이 달려있었다. 구석구석에 추모의 물결이 일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일(29일) 경복궁 앞에서 고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과 시청광장에서 추모행사에도 많은 추모객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 추모행사에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기대해 본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엄숙하게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명복을 빌어본다.

 


태그:#고 노무현 전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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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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