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 개인이 꼭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故 노무현과 연관시키는 일은 어찌 되었던 아전인수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故 노무현을 역사적 인물로 편입시킨다는 함의가 담겨 있기 때문에 더더욱 논쟁의 여지가 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이 역사에 기록될 만큼 위대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故 노무현은 일관된 정치행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성공과 좌절은 역사로 기록될 만하다. 비록 한미FTA, 노동자 탄압, 언론사 대못질 등 자기모순적인 사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故 노무현 전체의 평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 故 노무현을 빼닮은 삶을 살았던 인물은 <오기병법>을 쓴 초나라의 장군 오기(吳起)이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오기의 인물됨이 몹시도 각박하기 때문에 앞에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이다. "온정 있는 오기"라고.
오기는 위나라 사람으로 병사를 다루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일찍이 증자에게 배웠으며 노나라 군주를 섬겼다.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에서는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여자였기 때문에 의심을 품었다. 그러자 오기는 이름을 얻기 위해 자기 아내를 죽여 제나라 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노나라는 마침내 그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오기는 병사들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 사마천 사기열전, <손자ㆍ오기열전> 일부사기열전을 쓴 사마천은 그를 평가하며 "오기는 사람됨이 의심이 많고 잔인하다"고 했다. 오기가 아내를 죽인 장면은 마치 故 노무현 후보가 대선 경쟁을 하면서 "아내를 버리고 대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대통령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위기를 돌파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오기는 초나라 도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초나라 재상이 된다. 초나라 재상 오기는 법령을 확실하고도 세밀하게 만들고, 긴요하지 않은 관직을 없앴으며, 왕실과 먼 촌수의 왕족들의 봉록을 없애 거기서 얻은 재원으로 군사를 길렀다. 초나라는 오기의 개혁 정책으로 당대의 어떤 강대국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부국강국이 되었다.
故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시절 탈권위주의와 경제민주와, 언론민주화, 역사바로세우기 등을 목표로 개혁 작업을 전개했는데, 이를 통해 다수의 약자들은 민주주의라는 후광을 거의 처음으로 맛볼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축축한 그늘에서 이익을 누리고 살던 기득권들에게는 이 시기가 악몽 그 자체였다.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10년을 잃어버렸고, 경찰은 시위대를 한껏 두들겨 팼던 10년을 잃어버렸고, 대기업은 무분별하게 탈세하며 사업을 확장했던 10년을 잃어버렸다. 보수언론은 세무조사 받지 않고 기사를 마음대로 썼던 10년을 잃어버렸고, 정치인들은 마음껏 돈다발을 뿌리고 다녔던 10년을 잃어버렸고, 군인은 아무 생각 없이 태평스럽게 국가안보를 남의 나라에 맡겨 놓은 10년의 좋은 세월을 잃어버렸다. - 오마이뉴스, "그들은 '제2의 노무현' 탄생이 싫었다" 일부경제정책 면에서도 수출 51개월 연속흑자를 기록하며 500억불 수준에서 3200억불을 달성시켰고, 연구 개발비 예산이 6조원 수준이던 것을 24조원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육아지원예산을 1000억원 에서 10000억원으로 격상, 복지지출추이를 17%에서 27% 이상 격상, 남북 인적왕래수를 16000명에서 10만명으로 높였다. 하지만 재임 기간 동안에는 나라를 파멸시키고 경제망국을 초래한 원흉으로 그려졌다.
故 노무현이 오기와 극적으로 결합하는 지점은 바로 '죽음'이다. 오기의 죽음은 동양사에서도 무척이나 보기 드문 극적인 장면이다. 자신의 후원자인 도왕이 죽자 평소에 오기의 구조조정 정책으로 이를 갈아 오던 귀족들이 오기를 죽이기 위해서 초나라를 쑥대밭처럼 뒤지고 다녔다. 이 장면을 사마천은 아래와 같이 묘사해 놓았다.
왕족과 대신들은 도왕의 죽음을 계기로 난을 일으켜 오기를 공격했다. 오기는 달아나다가 도왕의 시신 위에 엎어졌다. 오기를 공격하던 무리들이 화살을 쏘아 오기를 죽이자 도왕의 시신에도 화살이 꽂혔다. 도왕의 장례식이 끝나고 태자가 즉위하자, 영윤에게 오기를 죽이려고 왕의 시신에까지 화살을 쏜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도록 하였다. 오기를 쏘아 죽인 일에 연루되어 일족이 모두 죽은 자는 70여 집안에 이르렀다. - 사마천 사기열전, <손자ㆍ오기열전> 일부故 노무현의 죽음이 단지 정치권에만 후폭풍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언론과 문화, 사회 각계에 불어닥칠 파장에 비하면 찻장의 태풍에 불과하다. 오기가 몰고 온 후폭풍은 폭력적인 방법이지만, 아직 故 노무현 후폭풍은 진행중인 상황이다. 한비자의 역사를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 개인이 꼭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년 비주류, 오랑캐 왕이 이탈리아 제국을 위기에 빠뜨리다로마 제국 시대는 유럽의 찬란했던 역사라고 칭송받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럽이 몰락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스티아누스는 권력을 분산시킨다는 명목으로 다섯 명이나 되는 하급 사령관에게 이탈리아 통치를 맡겼다. 그러다 보니 사령관들은 자기들 멋대로 영토를 분배하여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 고트족 영토에서 왕이 된 이십대 초반의 토틸라는 자신의 영토에 이탈리아 하층민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고 신분이 다소 낮은 계층 즉, 중산층, 도시의 무산계급, 농민에 집중해 정책을 펼쳤다. 노예를 해방하고 대단위 사유지를 해체하고 토지재분배를 실시하는 것은 물론, 백성들이 내는 혈세가 비대하고 부패한 궁정의 배만 불려주고 천릿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거대한 궁전을 짓고 이탈리아인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민족에게 보호금을 지불하는 일 따위로 쓰이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말은 곧바로 백성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불과 3년 만에 그는 이탈리아 반도를 손에 넣었고 544년 1월에는 비잔티움 사령관들의 항복도 받아냈다. 사령관들은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대의를 더는 지킬 수 없게 됐다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탈리아 제국을 대한민국 600년 역사를 지배한 기득권으로 보고, 故 노무현 대통령을 고트족의 이십대 왕 토틸라로 보면 우리나라의 상황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극우파 권위주의 아래에서 오랫동안 지배당해 왔기 때문에 비상식적인 지배를 당연시했고 비상식적인 정치 역시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故 노무현이 집권함으로 해서 달라진 정치와 달라지는 현실의 맛을 보면서 그의 사후에 이렇게 많은 추억들을 되새기는 것이다. 토틸라 왕은 이탈리아 제국의 총력 공격으로 인해 권좌에서 일찌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토틸라는 치명상을 입고 병사들과 도망쳤으나 몇 시간 뒤에 죽고 말았다. 이로써 고트족은 모든 희망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굴복하지 않고 토틸라의 용맹한 장수들 가운데 한 사람인 테이아를 만장일치로 고트족 왕에 선출한 뒤 투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테이아 역시 강력한 제국에 맞설 수 없었다. 겨냥이 잘 된 비잔티움군의 창에 고트족의 새왕이 쓰러지자, 비잔티움군은 왕의 머리를 창에 꿰어 모든 병사가 볼 수 있게 높이 쳐들어 보였지만 고트족은 퇴각하기를 거부하고 이튿날 저녁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탈리아 땅을 떠나겠다는 것과 두번 다시 제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탈리아 제국의 야망은 이루어졌다.
고트족 왕의 선정은 고트족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제국 본토의 민심까지 흔들어놓았다. 이탈리아 제국은 용병을 통해 권세를 유지하다가 점차적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날의 제국처럼 자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외부의 힘을 통해 해결하고, 식민지나 전쟁, 공포정치가 없으면 유지될 수조차 없는 비참한 현실을 낳으며 점점 몰락의 길을 간다. 고트족의 선정기간은 짧았고 제국에 의해서 짓밟혔지만 그 꿈은 대대로 남았고 남은 자들은 이를 계승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속에서 나는 중국의 오기장군과 고트족의 젊은 왕은 떠올린다. 그들의 좌절이 몹시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