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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 일과의 시작은 기상과 더불어 파주 헤이리를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산책 중에 만나는 이웃들과 수다를 부리고, 가지 위에 앉은 갖은 새들에게 시비를 걸고, 길섶의 풀들에게도 눈길을 보내면서 천천히 걷다보면 통상 한두 시간쯤이 걸리지요.

저의 헤이리 소요(逍遙)는 지난밤에 꽃잎을 닫은 낮달맞이꽃이 아직 꽃잎을 펴지 않은 시각에 시작됩니다. 달맞이꽃은 저녁에 피어 밤새껏 달빛과 정분을 나누다가 아침이면 기운을 잃어버리지요. 하지만 낮달맞이꽃은 아침에 꽃잎을 열어 햇살과 정을 나누다가 해가 기울면 꽃잎을 닫습니다. 노란 낮달맞이꽃을 햇살 아래에서 보면 꼭 꿈 많은 소녀 같습니다.

아직 꽃잎을 열지않은 낮달맞이꽃
 아직 꽃잎을 열지않은 낮달맞이꽃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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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의 뻐꾸기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저는 두 달째 뻐꾸기의 울음을 듣고 있습니다. 5월에서 8월은 뻐꾸기의 짝짓기 철입니다. 헤이리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뻐꾹 뻐꾹' 울음을 우는 애절한 숫뻐꾸기의 사랑 찾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숙주새를 감쪽 같이 속이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포란을 맡기고 부화에 성공해서 겨울이 오기 전에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뻐꾸기는 울음을 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들은 왜 스스로 둥지를 짓고 포란을 하지 않는지가 궁금합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 치고 순리에 어긋나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이것도 필시 자연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섭리일 것이라 믿습니다.

번식력이 뛰어난 뱁새(붉은머리오목눈이)나 딱새의 과잉번식을 이 탁란조가 아니면 어떻게 통제될 수 있을까요. 만약 지구상 모든 새의 1% 정도에 해당한다는 탁란조의 탁란 행위가 보름 동안 포란을 하고 한 달 가까이 벌레를 잡아 육아를 해야 하는 어미의 수고를 아끼기 위한 행위라면 얌치없고 비정하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생태계의 질서를 유지키 위한 창조주의 역할을 부여받은 의무행위라면 이 뻐꾸기는 사람들의 오해에 따른 누명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팽개치지 않는 희생자인 셈입니다.

쇠딱다구리 어미가 먹이를 물고 갓부화한 새끼에게 건네기위해 나무위에서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쇠딱다구리 어미가 먹이를 물고 갓부화한 새끼에게 건네기위해 나무위에서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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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서다가 청향재의 송효섭 교수님을 대면했습니다. 잔디깎기 연장을 들고 반바지를 입고 검은 장화를 신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작년부터 정원 돌보기에 취미를 붙인 송교수님은 점점 농부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농부의 제일 덕목은 부지런함일 것입니다. 절기에 따라 파종을 하고 그것을 때맞추어 수확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흙과 함께할 수밖에 없지요. 송 교수님을 이른 아침에, 혹은 밤늦은 시간에 정원에서 뵙기는 송교수님이 정원가꾸기에 빠지고 난 뒤부터입니다. 때로는 한 밤중에 뒷짐을 지고 정원을 살피는 모습을 보면 모종을 이식한 식물이 자라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보여주는 그 경외스러운 질서를 통해 이 정원의 생명을 돌보는 일이 평생 동안 열정을 쏟아 바친 그 학문을 연구하는 일만큼이나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침 일찍 정원으로 나오신 청향재의 송효섭교수님
 아침 일찍 정원으로 나오신 청향재의 송효섭교수님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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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의 밤꽃 향기는 더 짙고 농염합니다. 헤이리에서 밤나무는 밤나무골이 아니더라도 흔한 나무입니다. 모티프원이 있는 참나무골에도 정원에 밤나무가 주인인 밤나무집이 있고, 창포마을에도, 은행마을에도, 느티마을에도 밤나무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6월이면 헤이리 어디에서나 가을의 새벽 서리를 뒤집어쓴 것처럼 하얗게 핀 밤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실 밤꽃은 그 모양보다 향기가 독특합니다. 밤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피지만 향기는 수꽃에서 납니다. 건강한 암뻐꾸기를 만나기위한 수뻐꾸기의 울음만큼이나 애절한 향기입니다.

헤이리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밤꽃
 헤이리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밤꽃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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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밤꽃 향기가 날리는 때 여자들은 외출을 삼갔다고 합니다. 밤꽃 향기가 정액 냄새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밤꽃 필 무렵이면 동네아낙들 사이에서 정숙한 과부들조차 수다의 도마에 오르곤 했지요. 과부들이 바람나기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때론 동네처녀들이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밤꽃 냄새에 얼굴을 붉히면 처녀가 아니라는 속설 때문입니다.

밤꽃 향기가 흩날리는 지금은 무릇 사랑의 계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밤꽃이 비록 최음효과는 입증된바 없다하더라도 그 향기의 심리적 효과는 남녀 간 사랑이 예전 같지 않다는 분들에게는 충분히 묘약일 수 있겠다싶습니다. 밤꽃향기에서 충분히 이즘 유행하고 있는 아로마세러피(aroma therapy, 향기요법)의 효험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이리 6월은 밤꽃의 계절입니다.
 헤이리 6월은 밤꽃의 계절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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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는 아트스페이스강의 강제순 화백이나 아침운동을 나온 가을이네 진영효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눈이 마주치면 오른손을 흔들어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역사사랑방의 이이화 사모님을 뵐 수 있는 것도,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오고 있는 한스갤러리의 둘째딸 진주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새로운 용도의 집짓기를 시작한 천호석 부부가 그 집터에서 잡목 한그루라도 더 건져내기 위해 품을 들이고 있는 모습도 이 아침 산책길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침 일찍 꽃가루를 채취하기 위해 금계국 꽃위로 일을 나온 꿀벌의 부지런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이 아침입니다. 서로 마주치는 횟수가 잦을수록 이웃 간의 정도, 자연과의 교감도 깊어집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아침을 맞는 가을이네 진영효선생님과 아트스페이스강의 강제순화백님
 각자의 방식으로 아침을 맞는 가을이네 진영효선생님과 아트스페이스강의 강제순화백님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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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경재의 이상억 선생님의 아침 산책길은 청소하는 때입니다. 이상억 선생님은 늘 집밖을 나올 때 빈 자루를 들고 나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쓰레기를 줍습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며 금전이 생기는 일도 아닙니다. 단지 깨끗하지 못한 헤이리보다 말끔한 헤이리가 더 좋지 않겠느냐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상억 선생님의 쓰레기 줍기는 이 분이 헤이리로 이사 온 후부터 바로 시작되었으므로 3년째 계속되는 일입니다.

제가 만난 누구도 헤이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목소리로 헤이리를 사랑하는 일은 쉽습니다. 저는 아무리 고매한 인격도 행동하는 양심을 앞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상억 선생님을 어떤 학식 높은 사람보다 마음으로 존경합니다.

집게가 아닌, 면장갑을 끼고 손으로 줍습니다. 이미 무거워진 마대자루를 들고 다니기에는 힘겨워 검은 비닐봉투를 재활용합니다.
 집게가 아닌, 면장갑을 끼고 손으로 줍습니다. 이미 무거워진 마대자루를 들고 다니기에는 힘겨워 검은 비닐봉투를 재활용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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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민속악기박물관의 이영진 관장님은 한 달쯤 앓았습니다. 몸은 수척해지고 목소리는 윤활유를 치지 않은 기계음을 닮았습니다. 아마 박물관 고을 영월에 또 다른 박물관을 오픈하느라 몸과 마음을 혹사한 듯싶습니다. 이번에는 한결 좋아진 모습이었습니다.

"건강에는 숲이 최고더라고요. 아토피도 암도 숲에 들어가니 기적처럼 말끔해지는 모습을 보고 식물이 그리고 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저는 이 헤이리 공기의 고마움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헤이리도 마치 수목원처럼 나무를 더 심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최근에 본 TV의 건강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내용에 대해 말을 쏟았습니다.

헤이리 주민들이 구입해서 숲을 보존하기위해 파주시로 기부체납한 헤이리의 노을동산
 헤이리 주민들이 구입해서 숲을 보존하기위해 파주시로 기부체납한 헤이리의 노을동산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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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전 대관령에서 옮겨온 청개구리갤러리의 암수 두 마리 양은 지난번보다 털이 수북해졌습니다. 저의 산책길에 동행한 목양견 해모를 보자 이 양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구애 행위를 했습니다. 이제 만 세살의 해모는 양을 처음 대하고, 한살도 채 되지 않은 이 양 두 마리도 양몰이개를 처음 보았을 테지만 서로의 밀접한 관계를 본능적으로 간파한 듯싶습니다.

양떼를 주인의 의도대로 방목지로 몰고 나가고 다시 축사로 유도하는 목양견은 개와 원숭이 사이처럼 나쁜 관계가 아닌 공생관계에 가깝습니다. 원래 무리를 지어 생활하던 개의 습성이 양떼를 동료집단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양견은 늑대 같은 다른 육식동물이 양을 공격하면 스스로 공격당하는 듯 양떼를 보호하게 됩니다. 양과 해모는 서로 코를 부비며 오랜 연인을 만난 듯 애정을 교환합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과 지도자가 이런 돈독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대화가 단절된 동상이몽의 현 모습에 진력난 사람들이 아나키즘으로 기우는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만나 양과 목양견의 살가운 입맞춤
 처음 만나 양과 목양견의 살가운 입맞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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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 산책을 끝내야할 시간입니다. 제가 모티프원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은 해가 헤이리를 고루 비추고 풀 속의 장끼가 따가워지는 볕을 피해 숲속으로 푸드덕 날개를 치며 자리를 옮기는 시간쯤입니다. 모티프원으로 향하는 때에 북카페 반디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오는 양영은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양 선생님 모녀가 해모와 반갑게 아침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카페의 이종욱 시인의 사모님께서 대잎차를 정원으로 내오시고 마침 이집을 들린 갤러리더차이 정호권 선생님 부부와 푸르고 맑은 대잎차를 한잔씩 나누었습니다.

북카페반디의 플라타너스 아래를 지나칠 때면 이종욱시인의 사모님께서는 얼른 저를 플라타너스 거늘에 잡아 앉히고 그날 이 카페에 준비된 가장 귀한 차를 내오시곤 하십니다. 이날은 대잎차였습니다.
 북카페반디의 플라타너스 아래를 지나칠 때면 이종욱시인의 사모님께서는 얼른 저를 플라타너스 거늘에 잡아 앉히고 그날 이 카페에 준비된 가장 귀한 차를 내오시곤 하십니다. 이날은 대잎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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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산책은 6시부터 11시 반까지 5시간 반이 소요되었습니다. 반디의 대잎차를 닮은 헤이리의 하늘 탓이었습니다. 시야는 남태평양의 무인도처럼 청명하고 공기도 상쾌해서 발걸음도 가벼웠고,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아기의 피부처럼 보드랍고 투명해서 저의 카메라가 제 어깨에 다시 걸릴 시간이 통 없었습니다.

제가 모티프원에 돌아오면 앞집 청향재의 차돌이는 이미 지루한 시간이 되었을 쯤입니다.
 제가 모티프원에 돌아오면 앞집 청향재의 차돌이는 이미 지루한 시간이 되었을 쯤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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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태그:#헤이리, #모티프원,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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