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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책은 그와 첫 만남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통해서 간략하게나마 실존문학의 맛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실존문학의 선구자인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것을 집집마다 다른 김치맛에 비유하면 싼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그만큼 색다르고 맛 다른 경험이었다.

 

카프카의 <변신>에선 밑도 끝도 없이 바로 사건이 벌어진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독충으로 변신하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불쌍하게도 카프카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레고르는 가족들(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을 전부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불평 없이 충실히 치르던 장남에서, 하루아침에 가족들에게 있어서 외부에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쓸모없는 독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자가 갑작스럽게 그를 미물로 만들어버린 의도를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가 만들어낸 독충을 통해서 우리 시대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사회는 그들에게 백수라는 낙인을 찍고난 뒤 능력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는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경우에 따라서 가족 내에서도 우리 아들이, 딸이, 형이, 누나가, 동생이 백수라고 밝히기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한다. 그레고르가 독충이 되어버린 현실과 우리들이 백수가 되어버린 현실이 무엇이 다를까? 독충이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카프카는 예상대로 그레고르의 가족들을 비인간적으로 표현한다.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독충이 된 그레고르가 자신들 가족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에게 위로와 슬픔과 격려를 주기는커녕 그레고르의 슬픔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에게서 도망가 버린다.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모습을 잘 살펴보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발은 그와는 반대로 정신없이 뒷걸음질을 쳤다.(39쪽)

아버지는 구원의 손길은커녕 이때다 하면서 그에게 가차 없이 일격을 가했다. 그레고르는 피를 뿜으면서 방 안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40쪽)

 

그리고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던 그의 누이동생마저 그에게서 멀어져 간다. 독충으로 변한 그의 식성을 알아내고자 여러 음식을 가져다준 따뜻했던 마음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누이동생은 예전과는 달리 아침이든 낮이든 가게에 나가기 전에 뭐든 있는 대로 쓸어보아 그레고르 방에 밀어 넣고 나가버렸다. 요즈음에는 청소도 대강대강 해치웠다. 이제 먼지는 벽을 따라 띠처럼 쌓이고 군데군데 쓰레기와 먼지와 오물들이 흩어져 있었다.(80쪽)

 

마지막까지 보살펴주던 동생마저 그에게서 떠난 순간, 그를 담당하게 된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새로 들인 하녀가 되었다.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그레고르가 하녀라고 대접해줬을까? 그렇지 않았다. 하녀는 그를 마치 실제 벌레처럼 취급했다. 가족의 손을 떠난 순간 그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가정부가 늘 하던 대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 그레고르는 화가 나고 말았다. 그래서 덤벼들 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가정부는 놀라기는커녕 태연히 문 옆의 의자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들어올린 의자로 그레고르의 등을 내려치기 전에는 결코 그 입을 다물 것 같지 않았다.(83쪽)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수입에 의존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나섰지만,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생활고 때문에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해야 되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다. 하지만 집을 처분하려면 그레고르의 문제가 걸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이 괴물 같은 벌레 앞에서 오빠 이름조차 거론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우리는 이 괴물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해야만 해요. 우리는 이제껏 이 괴물의 시중을 들어왔고, 또 이 괴물로 인한 고통을 꾹 참아왔어요. 우리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이 괴물을 버리고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를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어요."(92쪽)

 

누이동생의 가시돋힌 독설을 백번 옳은 주장이라며 맞장구치게 하면서 카프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족들의 비정함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일어나는 가족의 비정함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카프카는 결국 그레고르를 가족들의 버림 속에서 괴로움만 겪다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는 불쌍한 존재로 만들면서 극을 고조시켰다.

 

그레고르는 삶의 무게를 벗어던졌다. 그러나 나는 그것과는 다른 무엇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제발 그를 원래대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그레고르가 꾼 꿈으로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으니 꿈이라고 말해달라고 기도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카프카는 나의 기도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카프카의 이야기에서 그레고르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프카는 떠난 그레고르를 바라보는 가족의 미묘한 심리를 표현해내면서 나에게 분노와 씁쓸함을 가득 안겨다 주었다. 가족들은 어찌되었건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들하고 이리 와. 지난 일에 얽매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 생각도 좀 해줘."(103쪽)

 

그레고르가 떠난 뒤 그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들에게는 가족보다 더 중요했던 경제적인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벗어나 점차 생기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새로움 꿈과 아름다운 계획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끝나버렸다.

 

씁쓸하면서 한편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족 개개인에게 독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는 부담해야 할 짐이었으며, 바깥으로 드러나서는 안될 치부가 되었다. 카프카의 이야기처럼 사라져 주는게 오히려 낫다고 가족들은 생각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은 지겹도록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가족들마저도 그 본능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카프카의 메시지를 접하고 나니 뭔가 빠진 것처럼 허무해졌다.

 

아마도 카프카가 노린 것이 이것일까? 허전한 마음을 돌아보고 이 이야기에서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찾아보라는 것이 책에 숨겨진 그의 질문이었던 것인가? 허무한 결말 대신 권선징악의 대표작들처럼 인륜을 저버린 이들에게 행복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메시지로서 그들을 괴롭혔다면 어땠을까? 왜 그들의 불행을 그리지 않았을까?

 

카프카는 끝까지 매정했다. 차도살인이라고 했던가? 우리에게 칼만 쥐어져 놓고서는 유유히 떠나버렸다. 우리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맞이할 불행을 우리가 직접 그리던지 아니면 우리는 그들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고 판단할지...  하지만 어느 면을 보더라도 <변신>은 타당한 근거를 가진 완벽한 모습을 하고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변신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문학동네(2005)


태그:#변신, #프란츠 카프카, #신원문화사 , #단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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