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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과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숍. 가로등홍보물에 걸린 작품은 '시골의 무도회(1883)'. 행복하고 유쾌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자는 알린 샤리고(르누아르부인). 연작인 '도시의 무도회(1883)'도 있다
 덕수궁 돌담길과 서울시립미술관 아트숍. 가로등홍보물에 걸린 작품은 '시골의 무도회(1883)'. 행복하고 유쾌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자는 알린 샤리고(르누아르부인). 연작인 '도시의 무도회(1883)'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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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인상주의의 거장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전이 오늘 9월 1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그의 전성기 작품 등을 프랑스의 오르세, 오랑주리미술관, 미국의 내셔널미술관, 일본의 미에미술관 등에서 대여한 유화 70여점 등 118점을 선보인다.

르누아르는 프랑스중부 리모주에서 출생하여 4세 때 파리로 이사한다. 재봉사를 보모로 둔 가정에서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처음엔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화공이었으나 산업화과정에서 주문이 없어지자 화가로 전업한다. 타고난 감각, 예리한 심미안, 빼어난 색채감, 우아하고 세련된 화풍으로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격동의 19세기후반에 잉태한 인상주의
1830년에 피사로, 1832년에 마네, 1834년에 드가, 1939년에 세잔, 1940년 모네, 1841년에 르누아르가 태어난다. 낙선전이 열린 1863년과 첫 번째 인상주의전이 열린 1874년 사이 10년간 당시 아카데미파와 앵데팡당파사이의 문화투쟁이 벌어진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발상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랐다. 서양미술사에 인상주의는 르네상스 이래 가장 위대한 혁명이었다. 커샛(미국), 모리조, 곤살레스(마네의 제자) 등 여성화가도 나온다.

19세기 유럽근대화를 이끈 건 산업혁명이다. 유럽은 자본주의와 식민지개척과 기술적 진보로 사회가 급변하여 모순이 생긴다. 1871년 5월엔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이 생겼으나 실패한다.

나폴레옹3세는 오스만남작의 주도로 시위방어용이긴 했지만 파리를 계획도시로 정비한다. 그래서 밀집현상은 없어지고 노상카페와 대로(大路)가 생기게 된다. 도시풍경이 그려지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19세기와 와서 물감을 주석튜브에 담게 되면서 화가들은 자유롭게 태양 아래 자연과 대기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상주의는 이런 덕분에 스케치 없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의 효과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외광파의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인상주의는 농민화가 밀레, 외광파 원조인 코로, 사실주의 쿠르베, 인상주의, 표현주의에 영향을 준 영국의 터너와 컨스터블, 낭만주의 들라크루아 그리고 사진발명가 다게르 등의 영향 속에서 발전했다.
그도 프랑스국립미술학교에서 입학했으나 주류화가가 되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살롱 전에 입선을 해야 화가로 데뷔할 수 있는데 그곳 심사위원들이 고전적 정형성만 인정하고 창의성을 인정하지 않는 아카데미회원들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르누아르는 인상파 중에서도 급진파인 마네보다는 온건파인 모네에 가깝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1879년부터 7년간 라파엘로, 앵그르 등 고전주의에 기운다. 그는 사회적 이슈를 일으키는 도발적 주제보다는 인간의 근원적 행복과 내적 평온을 그린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그는 "인생에 불쾌한 일이 너무 많아 그림만은 즐겁고 유쾌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림을 인간의 영혼을 씻어주는 선물로 보았다. 또한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La douleur passe. La beauté reste)"라며 예술의 힘을 믿었다. 비관마저도 낙관으로 바꾸는 삶의 역설로 사람들에게 용기와 긍정적 생각을 심어줬다.

야외의 활기찬 여성의 모습 속 시대상 읽기

'그네' 캔버스에 유채 92×73cm 1876. 아래는 그림을 보는 관객
 '그네' 캔버스에 유채 92×73cm 1876. 아래는 그림을 보는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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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에 나온 르누아르의 작품 '그네'는 마치 햇빛이 마치 춤추는 것 같다. 같은 해 나온 '물랭 드 라 갈레트'와 함께 최고작 중 하나다. 그는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햇빛의 굴절이나 바람의 파장까지도 생생하게 담으려 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이해 못했고 비평가들은 이런 시도를 '옷 위에 기름때가 묻은 것 같다'며 야유했다.

하여간 '그네'를 보면 산업혁명 후 당시 중산층사람들에게는 주말이면 파리교외의 유원지 등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외출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정원문화도 생긴다. '물랭 드 라 갈레트(무도회)'와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 등에서 그런 시대풍속을 잘 읽을 수 있다. 야외의 범위는 전원에서 경마장, 야외연주장, 발레공연, 오페라극장까지 확장된다.

당대 이상화된 누드화를 뒤엎은 르누아르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일명 햇빛 속의 누드)' 캔버스에 유채 65×50cm 1876. '바위에 앉아있는 욕녀' 캔버스에 유채 80×64cm 1892. 두 작품은 15년 정도의 간격이 있는데 오른쪽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경향이 보인다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일명 햇빛 속의 누드)' 캔버스에 유채 65×50cm 1876. '바위에 앉아있는 욕녀' 캔버스에 유채 80×64cm 1892. 두 작품은 15년 정도의 간격이 있는데 오른쪽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경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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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의 누드화에 대해서 알아보자. 당대의 누드화는 작가라면 누구나 밟아야 하는 과정이고 음악에 비유하면 '대위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이상화된 정신과 그런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고 숭고한 단계를 뜻한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그런 기존의 고정관념을 깼다. 그는 자연광 속에 던진 여성의 알몸이  살아 움직이며 꿈틀거리는 듯한 누드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당대에 유행하는 신화, 역사, 종교를 주제로 한 것과는 달라 외면당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보티첼리처럼 인상주의 시기에 르누아르의 독창적 누드화를 창조한 셈이다.

여자를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하고 황홀하게 그릴 수 있다니!

'앙리오부인' 캔버스에 유채 65×50cm 1876. 이 부인은 프랑스국립극장 여배우로 당시 파리연극계의 최고스타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공연 중 화재가 나 그 불길 속에서 사라진다.
 '앙리오부인' 캔버스에 유채 65×50cm 1876. 이 부인은 프랑스국립극장 여배우로 당시 파리연극계의 최고스타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공연 중 화재가 나 그 불길 속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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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앙리오부인'은 소녀도 처녀도 아닌데 여성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깊게 패인 목선 사이로 풍만한 가슴이 감춰지고 하늘하늘한 드레스 속에 옷감과 피부가 중첩되면서 그 육감적 몸매가 빛난다. 그가 여자를 이렇게도 아름답고 우아하고 황홀하게 그린 걸 보면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여자를 좋아했다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닌가보다.

안정된 구성과 뽀얀 피부에 섬세하고 화사한 색의 뉘앙스가 일품이다. 동시대 시인 위스망스는 이런 미인도를 보고 "꽃과 같은 피부, 벨벳처럼 부드러운 몸, 진주 같은 눈, 우아한 머릿결을 가져 태양처럼 빛난다"며 감탄한다. "만약 신이 여자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내가 화가가 되었을까"라는 말에서 보듯 그의 여성찬가는 끝이 없다.

근대성의 상징인 피아노 치는 여자

'피아노 치는 소녀들' 캔버스에 유채 116×81cm 1892. '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놀' 73×92cm 1897.
 '피아노 치는 소녀들' 캔버스에 유채 116×81cm 1892. '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놀' 73×92cm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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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피아노 치는 그림에서 시대의 격동이 느껴진다. 상류층이나 귀족층이 아닌 일반소녀나 중년부인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니 놀랍다. 피아노를 치며 행복해 하는 여성들의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다. 당시 여성도 산업화로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취향과 행복을 누릴 권리가 움텄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르누아르는 그림 속 여성의 패션, 장식품, 머리모양까지 마음껏 멋과 개성을 드러나게 하는데 세심한 관심을 쏟는다. 가운데 레이스로 된 리본으로 테를 두른 드레스장식하며 피아노 위에 올려 놓은 촛대며 중후한 멋을 내는 벽과 커튼 등이 돋보인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사회가 발전하면 어둡고 소외된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에밀 졸라는 그래서 이런 사회를 고발하는 소설도 발표했고, 쿠르베는 그런 정서를 작품에 반영한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거기에 개의치 않고 만사를 낙관적으로만 본다.

책 읽은 여자가 악녀가 아닌 사회

'독서' 캔버스에 유채 50×59cm 1918. 아래는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
 '독서' 캔버스에 유채 50×59cm 1918. 아래는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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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작 '독서하는 소녀'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여긴 소녀보단 나이가 더 든 여자가 책 읽는 모습이다. 이는 근대적 자아의식을 가진 여성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책 읽은 여자가 불온하거나 악녀로 낙인찍히지 않는 것만 해도 그 시대가 전에 없는 문명기요 변혁기임을 알려준다.

인상주의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조도 어머니와 여동생 에드마가 독서하는 그림을 그렸지만 이런 모습은 여성미에 지성미까지 첨가되어 더 매력적이다. 여성도 독서로 세상이 정해준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새로운 역사의 창조와 책은 관련이 깊다. 프랑스혁명도 계몽주의자들이 펴낸 백과사전을 통해 일반대중들이 정보와 지식에 다양하게 접하면서 시작된다. 그 영향으로 그들은 눈과 귀가 열렸고 카페에선 열띤 토론이 일어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혁명이 터진다.

마네와 다르게 승화된 여성과 모성을 보여줌

'가브리엘, 장 르누아르와 어린 여자아이' 캔버스에 유채 54×74cm 1896. 1894년 둘째 아들 장이 태어났고 사촌인 가브리엘이 르누아르의 집에서 20년간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가브리엘, 장 르누아르와 어린 여자아이' 캔버스에 유채 54×74cm 1896. 1894년 둘째 아들 장이 태어났고 사촌인 가브리엘이 르누아르의 집에서 20년간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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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충실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였던 만큼 여자는 애만 잘 키우고 살림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1885년 작 '모성'은 그런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 아이를 돌보는 르누아르부인의 사촌인 가브리엘도 유쾌한 모습으로만 그려져 있다. 하지만 드가는 독주를 마시며 해롱거리는 여자도 익살스럽게 화폭에 담았다.

그런데 너무 예쁘고 행복한 르누아르의 그림만 보고 나니 느닷없이 거칠고 도발적인 마네의 그림과 그의 개인전이 보고 싶어진다. 사회의 통념을 깨고 창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뒷골목에서 들먹거리는 남성의 위선과 타락을 폭로하여 미술계의 스캔들을 일으킬 정도로 근대적 정신을 담고 있지 않은가.

인상주의를 세상에 알린 화상 폴 뒤랑-뤼엘

'바느질하는 마리 테레즈 뒤랑-뒤엘' 캔버스에 유채 81×66cm 1882. 마리 테리즈는 뒤랑-뤼엘의 맏딸
 '바느질하는 마리 테레즈 뒤랑-뒤엘' 캔버스에 유채 81×66cm 1882. 마리 테리즈는 뒤랑-뤼엘의 맏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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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과 조르주 뒤랑-뤼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81cm 1882. 뒤랑-뤼엘의 두 아들. '폴 뒤랑-뤼엘 초상' 65×54cm 1910. 뒤랑-뤼엘의 70대 초상
 '샤를과 조르주 뒤랑-뤼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81cm 1882. 뒤랑-뤼엘의 두 아들. '폴 뒤랑-뤼엘 초상' 65×54cm 1910. 뒤랑-뤼엘의 70대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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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으로 르누아르의 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기여한 사람을 알아보자. 그는 바로 화상 폴 뒤랑-뤼엘(1831~1922)이다. 르누아르보다 10살 위인 이 화상은 47년간 그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는 르누아르의 유화, 파스텔 등 무려 1300여 점을 구입해주고 그의 개인전을 파리에서 12번, 뉴욕에서 17번이나 열어준다.

그는 르누아르뿐만 아니라 모네, 피사로, 드가, 시슬레도 그의 화랑에서 개인전도 열어주며 지원한다. 당시 인상주의는 대중적 인기가 없어 위기를 맞았고 1880년에는 파산 직전까지 갔으나 1900년에는 그런 경제난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뒤랑-뤼엘은 자녀가 딸 둘, 아들 셋이 있었는데 위 작품은 그의 첫째 딸과 둘째, 셋째 아들의 초상화다. 르누아르는 무지갯빛 7가지 색을 뒤섞어 현란한 색채를 연출한다. 인상주의를 빛낸 이 색채혁명가는 1900년엔 레지옹 도뇌르훈장의 영예도 얻는다. 1919년 78세로 타계한다. 또한 뒤랑-뤼엘도 3년 후 세상을 떠난다.

덧붙이는 글 | 서울시립미술관 평일 오전10시-오후9시까지 주말공휴일 오전 10시-오후8시 전화 02-1577-8968 www.renoirseoul.com 요금은 12000원에서 8000원까지. <인상주의 화가들(마로니에북스 2008)> 참조



태그:#르누아르, #인상주의 , #마네 , #뒤랑-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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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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