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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글은 지난 2009년 5월 23일 갑작스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접하며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진 일주일간의 국민장 기간 동안 쓰고 다듬으며 이어왔던 내용들이었는데 컴퓨터에 올려놓기 시작한 웹페이지의 정기점검으로 인해 한줌의 재처럼 글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마치 바람처럼 우리의 곁을 떠나버린 노 전 대통령과 같이 말이다.

나는 노 전 대통령과 친하지도 관련도 없는, 하지만 나름대로 이 땅에 태어나 대한민국이라는 곳에 살면서 세상에 대해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해보고 뜻을 세우면서 평소 노 전 대통령이 꿈꾸었던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표현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나 역시 '저마다의 작은 꿈은 이룰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그런 세상을 직접 만들어 보고자 어찌보면 그런 이상을 실현해보고자 그에 맞는 지위와 힘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다만 밝혀두자면 지난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에게 '차선으로' 한 표를 던졌고 그는 드라마같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밝힌 것처럼 스스로 대통령이 되면 갖추어야 할 준비가 부족했고 실수도 많았다. 때문에 그의 재임기간 동안에 나는 '막연한 지지'가 아닌 '비판적 지지' 혹은 '냉정한 평가'를 부여했던 경험이 있긴 하다. ('평가'라는 단어는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잘한 일을 보통 '평가'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칭찬이 인색한 점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안타까움이 남아 있다.)

글 제목대로 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난 경험이 있었다. 우연히 만났다면 그냥 한때 지나가는 슬라이드같은 기억만 있겠지만 그런 우연이 아닌 그렇다고 필연까지는 아닌 어느 공식행사에 초청이 되어 근거리에서 그를 직접 만나고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손도 잡아보고 말씀을 직접 듣기도 했다.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이렇게라도 몇 자를 남기면서 노 전 대통령을 다시 한번 추모하고 몇 사람들과 나누어 보기 위해 그리고 나의 공간에 글을 남겨두어 가끔 꺼내보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물론 오늘이 노 전 대통령의 49재가 끝나는 날이고 묘에 유골을 봉안하는 날이라는 것은 안다. 불교의식에 따라 장례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나는 불교식 장례는커녕 신자가 아니기에 잘 아는 것은 없지만 명복을 빌어보는 마음으로 그와 만났던 기억을 시작한다.

한 사람 만나는데 왜 그리도 복잡한가

아무리 나라가 작고 국력이 부족하다라고 말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는 일은 절차가 간단치가 않다. 서점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금속탐지기 통과는 기본이고 만나기 몇 시간 전에 집을 출발해서 대기하는 시간 그리고 (국민이자 일일 국정보고상황 간접참여자로서의) 행동양식과 지켜야 할 절차를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형식적인 통과의례들도 노 전 대통령은 간소화시켰을 것 같다. 그가 직접 제안한 "국민과 함께 하는 국정보고"였으니까. 그렇게 그는 생전에 '국민과 함께'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던 것 같다.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나라에는 현재 외국인 노동자로 와서 돈을 벌고 나가려는 이방인들이 많지만 (주로 농촌지역에 집중되긴 하였으나) 반대로 결혼을 해서 적극적으로 우리 국민으로 살고자 하는 이민자결혼여성들도 상당히 많아졌다. 간단히 축약해서 말하면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고부지간 같은- 재래적인 관습 부적응으로 오는 태생적 한계와 언어문제와 가정폭력 등의 후천적 문제까지 이중고를 겪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학부시절 이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따뜻하게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책을 연구했고 이런 프로세스들을 좀더 현실화시키기 위해 어느 유명회사의 공모전에 도전했고 합격해서 배워보고자 선택했던 호주와 나누어주고자 했던 베트남을 동시에 방문하고 돌아온 경험을 얻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여성가족부에 출국 전부터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실현가능성을 타진했고 그게 운이 좋아서 탐방 후 '국민과 함께 하는 국정보고대회 - 여성가족부 편'에 초대된 것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나는 국민참여자의 한 사람이고 정책보고과정이나 질의응답에 참여할 수 없는 수동적 지위를 누릴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을 직접 보게 된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어찌 보면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아주 거리가 멀어 대통령의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앉는 위치에 앉아 있는 나에게 몇 번이고 주의사항을 얘기하고 Q/A를 들이대는데 공무원으로서의 무사안일과 안전제일이라는 양 날개를 나는 또 한번 직접체험을 통한 썩소를 날려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대통령을 만나는 데에는 적지 않은 통과의례가 필요했다. 한편으로는 그런 형식적 절차도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많이 조정되었을 것인데 그 전에는 정말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그 이전에는 왕이 행차하시면 지나가다가도 엎드려야 하는 그런 세상이었을까. 그런 측면 하나에서만 봐도 노 전 대통령은 분명한 신념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평가해 본다.

의외로 차분하고 꼼꼼한 남자

여기까지 내 글을 읽은 독자들께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기간을 잠시 떠올려 보기 바란다. 얼마나 시끄러웠는가? 어느 언론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Chaos중의 Chaos" 라고 하는데 무조건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분명 자잘한 논란거리에서 국가적으로 거대한 정책집행과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하나에 좋든 싫든 시끄러운 잡음을 내고 객관적 사실은커녕 지나친 감정과 고집스러운 '나만의' 소신을 밀어붙이며 비판을 보냈다. 어떤 이는 '그냥 시끄럽게하니 싫다'고까지 했으니 정말 시끄럽긴 시끄러웠던 것 같다. 말 한마디가 신문1면에 왜곡되어 보도되고 툭하면 두들겨댔으니 노무현은 그렇게 시끄러운 사람으로 공인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그를 만났던 그 날 그런 '시끄러움'이라는 딱지는 떠올릴 필요도 어울리지도 않았다. 물론 국정보고라는 대통령의 정기적 통치와 관련된 한 부처의 가장 큰 행사이자 국가적인 일이기 때문에 다소 엄숙하고 진지해야 할 분위기가 있을 법하지만 그런 불편한 겉옷을 치워내더라도 그는 적어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노라고 체험적으로 말하고 싶다. (실제 만난 후에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행동이 약간의 변호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멀찍한 자리에서 느낀 대통령의 표정과 자세는 일단 '경청'이었다. 장관의 보고는 물론이고 실무부처에서 간단히 코멘트하는 것까지도 인상이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 손은 부지런히 메모장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대통령이 메모하면서 듣는 이야기들이 과연 무엇일까? 임기말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범인들의 업무와는 다를텐데, 그는 그렇게 '경청'의 스탠다드를 보여준 지도자였다.

물론 듣는 것으로 만족하진 않았다. 말하는 사람 즉 스피커의 말을 끊지 않으면서 중간중간에 적절한 반응과 격려가 곁들여졌고 의외로 장관이 상관인 대통령에게 대안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대통령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방안을 내놓았다.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는 내 수첩에 아직도 '키워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 2007년 3월 경이었고 임기가 아직 1년 여가 남았지만 정치적으로 그는 이미 '식물대통령'과 다름이 없었던 시기였다. 누구라면 이미 의욕을 잃거나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물론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그런 태도로 일관한 이는 없었을 거라 믿는다. 어쨌든 그럼에도 그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당위'로 생각하며 책임있게 일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해버릴 수도 있을텐데,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듣고 실제로 전문적인 분야까지 아우르면서 질문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매력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자 표도 던졌고 때로는 비판도 하고 어떤 면으로는 박수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 책임감 때문에, 그를 투표한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때로는 맨 선두에 서서 그의 진정성이나 통치행위에 냉소를 던지기도 했고(예를 들면 '대연정',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정책이 그랬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포털사이트에 인기 있는 글을 올리며 여론을 앞세우기도 한(예를 들면 '한미FTA', '이라크 비전투병 파병',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청산 및 사학법 개정등이 그랬다.) 전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는 별개로 대통령 자신이 그토록 인생 전체를 들여가며 밀어붙이고 이루고자 했던 참여민주주의와 인권보장 그리고 지역구도 해체 및 정책중심의 정당정치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나와 생각이 너무나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조건없이 지지하고 때로는 간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민과 함께하는 국정보고"에 참여신청을 한 것도 그래서 그렇게 그와 직접 만나게 된 것도 다 그런 과정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는 매우 꼼꼼하고 경청할 줄 아는 탁월하고 인간적인 지도자였다.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대통령과의 만남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업무보고와 대통령을 만나기까지

국정보고대회는 약 1시간 반 가량 이어졌던 것 같다. 적지 않은 국민들이 참여해서인지 날씨가 아직 쌀쌀한데도 경내는 후끈 달아올랐다. 눈치로 보기에 이미 공식적인 보고는 끝난 것 같았는데 그의 열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 같다. 실무자와 간단한 토론을 하면서 정책점검을 하기도 했고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미리 준비된 국민 몇 사람에게 질의를 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는 그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만남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든 돌발상황은 있는 법. 업무보고시간 중에 나는 약간의 긴장을 한 나머지 잠시 달콤한 잠에 빠졌는데 아마도 그 사이에 여성가족부 업무 중 내가 제안했던 결혼이민자 여성과 관련한 현실가능성이 높은 대안책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던 것 같다. 사실 나 스스로의 아이디어라기보다는 호주라는 선진국에서 이미 실행하고 있는 실질적인 복지, 생활정책들을 참고로 보고서를 만들어 건넨 것이라 내가 특허는 고사하고 저작권 같은 것을 주장할 수도 없는 보고서들인데 실무자에게 감동이 되었든 비교적 컴팩트하게 작성된 형식이 장관의 눈에 들어왔든 간에 결혼이민자여성들에게 해줄 수 있는 실용적인 정책이 되었던 것은 분명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 생각은 대통령의 눈과 생각에 조금씩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등포에서 열린 업무보고가 그렇게 끝이 났고 관례에 따라 대통령이 일어나고 장관이 일어나고 이하 실국장들이 일어나고 마지막에 여러 참관자인 국민과 함께 그 중 한 사람인 나도 일어났다. (대통령이 자리를 비우고 내가 일어나기까지에는 약간의 러닝타임이 존재했다.) 일어날 때에도 여전히 약간의 통제가 있었던 것임은 물론이고 이미 내 전화번호와 신상에 관한 약간의 내용들이 여성가족부 실무자에게 알려져 있는 상태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와 덧붙여서 자리에서 조금 오래 시간을 끈 나의 진득함도 더해졌을 것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나보다 나이는 좀 많은데 실무자인 것 같은 한 사람이 내게 달려왔다. 간단히 얘기해서 VIP의 호출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어제 차를 몰고 가다가 몰래 신호위반을 했고 안 걸린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얼굴이 굳어졌는데 그런 태도들은 나뿐만 아니라 범인(凡人)들의 일반적인 마음가짐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것이 참 부럽네요. 해보지 못했는데..."

"아, 그런가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일단 거부는 물리적이나 상황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일테고, 무엇보다 내게 무슨 얘기를 할지가 궁금했다. TV나 인터넷으로만 봤던 얼굴이 실제는 어떨지도 좀 궁금하긴 했지만, 그냥 눈 딱감고 대답 안하고 고개만 끄덕여야지 하는 마음으로 별실(별도의 대기실)로 실무자를 따라갔다.

별실에 들어가기 전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꼭 회사 임원 면접 보러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 넥타이도 안 맸는데, 손에 약간 땀이 나기도 했지만 인터넷으로 글을 쓰는 용기 정도만 있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금세 그 축축함을 날려 버렸다.

"%*#ㅎRL!150ㅅㅠmfeoㄴ"

사실 그 때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내용들의 정확한 기억은 사라지고 없다. 나는 주로 "네"라고 했던 것 같고 주로 보고서에 대한 내용들을 내게 물었고 나는 간략하게 "네" 혹은 "그건 이렇습니다"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대화를 주도하는 위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짧게짧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본능적인 감각같은 것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어른에게 갖추어야 할 예의라는 도덕적인 부분에 사로잡혀 어찌 보면 그때는 내 자신이 생각해도 지나치게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 바로 앞에서 몇 십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근거리에서 내게 묻는 그를 찬성하고 지지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 누구보다도 불같은 분노 혹은 용기를 가지고 그의 정책과 관련해서 그 누구보다도 키보드워리어가 되기도 했던 것을, (물론 대통령의 인간적인 부분은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참 부럽네요,, 나도 그 시절에 그런 것 해봤으면 했는데..."
"... 아닙니다...^^;"
"좋은 정책제안 해주어서 고맙게 생각할게요."

내가 대통령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눈 대화 가운데 당시 내 수첩에 적어놓은 문구는 이 것이 전부이다. 당시 나는 소극적이었고 VIP의 이야기를 듣느라 급급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의 아쉬움과 후회도 든다. 혹시라도 퇴임 후라도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몇 개 있었는데, 나도 현재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고인이 된 그도 나와 비슷한 시절에는 법관이 되고자 율사라는 직업을 가져보고자 치열하게 공부하고 노력했을텐데, 그런 것들도 한 번 물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매력으로 느끼고 응원하며 지지를 보냈던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평가하는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원칙과 소신'을 지켜오기까지의 힘든 과정들을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그 분위기에서는 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닐 뿐더러 아주 나중에 퇴임 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때문에 언론의 관심도 떨어질 무렵이 되면 찾아가 물어보고 싶었던 소소하고 개인적인 질문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영영 그런 질문은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점이 너무나 안타깝다.) 

못다 핀 꿈, 이루지 못한 이상 하늘에서 꼭 이루기를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보고 느낀 기록들을 글로 표현해 보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스토리들조차 부질없고 하릴없는 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지금 현재 내가 VIP라고 생각하며 조심하고 손에 땀을 쥐었던, 그랬던 대상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정치역정을 넘어 삶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장식해 왔던 사람, '잘 믿지 못해서 신앙이라는 것을 가져보기는 어렵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은 했다'고 말했던 사람, 모두가 실리를 좇아 말을 바꾸고 행동이 돌변하고 그래서 장사꾼같은 사람들만 가득한 여의도 정치판에서 나름대로의 괜찮은 소신과 꿈을 가지고 지키고자 노력해서 그의 희망대로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 떳떳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던' 사람... 그는 그렇게 햇살이 조금씩 뜨거워지던 5월의 끝자락 홀연히 바람처럼 우리의 곁을 떠났다.

전직 대통령 중 한 분은 "죽어도 죽지마라"는 당부를 그리움처럼 묻어냈다. 명문대에서 명예교수까지 지냈던 어떤 분은 "자살했는데 장례에 국민 세금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도 했다. 약 500만이라는 숫자의 국민이 봉하마을에서, 서울역 합동분향소에서 그리고 덕수궁과 각 지역의 주요장소에서 떠나버린 그를 추모했다. 반면 영정을 들고 분향소를 철거하며 이제 장례절차는 끝이 났으니 질서유지가 더 소중하다며 그들의 가치를 이루고자 행동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어록에서 엿보이듯이 노무현 그가 있든 없든간에 이 좁고 작은 대한민국에는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도 자신의 삶에 분주히 뛰며 살아가고 있다.

현 시국에 대한 평을 하면서 안 그래도 주관적인 이 글을 더 주관적으로 평론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이 바람처럼 날아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가 열리는 날인만큼 오늘만큼이라도 노무현 그 석자의 이름을 가진 사람 그 자체에 대해서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와 만났던 짧은 기회와 시간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뿐이다.

불교에서 49재를 지낸다는 의미에 대해 신자도 아니고 종교적 정신도 별로 갖고 있지 않은 내가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상식같이 알고 있는 약간의 불교적 지식을 빌리자면 49재가 지나고 나면 떠나간 사람이 그 자신의 업보와 행위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의 인연'이 결정되는 날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노무현은 어디로 갈 것인가, 개인의 평가가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그가 적어도 하늘로 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이생에서 못다 핀 꿈과 이상을 하늘에서는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한 번 더 주어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이것은 단지 추모하는 마음을 넘어 열망과도 같은 소신이라 할 것이다.

이제 오늘이 지나고 나면 종교적으로도 그는 우리의 곁을 완전히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아련하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물론 그와는 반대인 사람들도 존재하겠지만 49재와 함께 나 역시 이제 그를 떠나 보낼 것이고 어쩌면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를 조금씩 잊어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내게 여러가지를 남기고 갔다고 확신한다. 그 가운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분량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단순히 국가와 민족이라는 비교적 크고 대단해보이는 개념을 붙이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를 수록 좀 더 살만한 세상, 따뜻한 세상'을 향해 노력하며 살아 보는 것이다. 그런 소박하지만 쉽지 않은 과제를 그는 내게 던지고 이 생에의 무거운 짊도 남기고 간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제는 좀 모든 것에서 가벼워지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자신에게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당신의 조국에게 적지 않은 과제를 남기고 떠나버린 당신을 미워하지 않고 계승해 가려면 무엇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일까요, 하늘에서 대답을 해주실 수 있다면 그 중 몇 가지만이라도 제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편히 쉬십시오.


태그:#노무현 49재,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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