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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거쳐 중국의 서안(옛 장안)에 이르는 1만 2천 킬로미터의 길이다. 대상들이 1000프로의 수익률을 꿈꾸며 낙타에 상품과 문화를 싣고 다니던 실크로드는 험준한 산맥 사이사이에 카비르 사막, 고비사막, 타클라마칸 사막이 번갈아 놓여있는 아름답고도 가혹한 길이다. 

 

터키와 이란의 국경지대에 있는 '아라라트산'은 터키어로 '큰 고통의 산'이라는 뜻이고, '타클라마칸'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살기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하는 길목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이름에 고통만큼의 원망을 담았으리라.

 

거기다가 이곳을 둘러싼 정치상황은 자연환경보다 더더욱 끔찍하다. 터키의 쿠르드 반군, 안팎으로 긴장상태인 이란, 러시아에서 독립한 후 부족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투르크메니스탄, 위그루족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 신장성의 우루무치와 카스 등 해결이 요원한 분쟁지역의 연속이다.

 

참고로 이 지역에 분쟁이 많은 역사적인 이유는 실크로드의 거점들을 점령하려는 제국들의 수많은 침략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어떤 도시는 그 결과로 열두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비극적인 살육과 수탈이 있었고, 결국 그들은 정치가 아닌 종교와 민족을 정신적인 버팀목으로 삼고 있다. 

 

예순 두 살의 노인이 자연의 시련과 국경의 삼엄함을 뚫고 오로지 걸어서 실크로드를 건넜다 (사실 1만 2천 킬로미터 중 6킬로미터 한 번, 30킬로미터 한 번해서 36킬로미터를 차로 건너가긴 했다. 그 이유와 장소는 독자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라). 그의 이름은 '베르나르 올리비에'.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여섯 살에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뒤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체육교사, 웨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독학으로 대학에 입학, 졸업 후 신문기자가 되어 30년간 정치부 기자이자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사람이다.

 

그는 4년 동안 길이 막히는 겨울을 피해 봄부터 가을까지 이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여행을 두툼한 세권의 책과 한권의 덜 두꺼운 책으로 써 냈다. 1권 '아나톨리아 횡단' 편은 이스탄불에서 터키의 '에르주름'까지, 2권은 '에르주름'에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까지, 3권은 '사마르칸트'에서 중국의 '서안'까지의 기록이고, 4권 격인 <베르나르 올리비에 여행>은 사진을 요구하는 독자들의 요청에 못 이겨 2006년, 삽화가 '프랑수아 데르모'와 차를 타고 다시 그 길을 따라간 기록이다. 지난 여행에 대한 추억과, 길 위에서 만났던 천사들의 모습들, 그들과의 재회, 지난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의구심이 앞섰다. 우리나이로 예순 넷의 노인(노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젊은 축이긴 하지만)이 순전히 걸어서 이 길을 완주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실크로드를 걸어서 건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각각 400여 페이지가 넘는, 사진 한 장 없는 이 세권의 여행기를 끝까지 다 읽어 낼 수는 있을까?

 

왜냐고 묻지 마라

 

사실 여행기중독자에게 이 책은 돌아가고 싶은 파미르 고원과도 같은 책이었다. 압도적인 분량과 빼곡한 글자들을 보고는 읽을 엄두가 나질 않아 미뤄왔던 것이다. 그런 나를 이 책 속으로, 여행 속으로 미끄러지듯 잡아당긴 것은 '서문'이다.

 

프랑스 편집자가 쓴 이 책의 서문은 여행기중독자가 본 여행기의 서문 중에 가장 사려 깊고 훌륭하다. 이 책을 출판하게 된 경위와 저자 베르나르에 대한 소개, 그와 만나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이 여행과 여행기에 대한 존경심을 차분하게 써 내려간 글은 마치 또 한편의 여행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베르나르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일면식도 없는 출판사에 직접 찾아가 여행기를 출판해 줄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베르나르는 자신과 자신이 떠나고자 하는 여행에 대해 설명하고는 여행기에 사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계획을 흥미롭게 생각했지만, 우리 출판사엔 맞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우리는 이미 완성됐거나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원고만을 출판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우리는 모든 종류의 위업이나 쾌거, 특히 그것을 억지로 갖다 붙이는 일에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러자 이 미래의 저자는 사과를 했다. 자신의 설명이 잘못되었다고, 자신은 어떤 대단한 성공으로 여겨질 여행을 염두에 둔 것이 결코 아니라고. - 서문 중에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베르나르가 원한 것이 단지 '출판을 해주겠다는 약속'뿐이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돈도 원하지 않았고, 만약 완성된 여행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출판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베르나르는 왜 그 약속을 원했던 걸까? 그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출판을 약속받고자 했던 이유는 자신의 여행을 끝까지 지탱해 줄 또 하나의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록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된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 것은 외로운 사람 또한 용감해 보이는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며, 결국 누군가가 손짓하기를 숨어서 지켜보는, 그리고 거기에 의당 답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 서문 중에서 "

 

출판사는 결국 그의 요구를 받아 들였고, 그는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출판은 그렇다 쳐도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것은 그가 도대체 왜 이 여행을 하려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다. 편집자도 그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베르나르는 그 자신도 여전히 그 대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자연과 인간들이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길 위를 걸어서 뚫고 지나가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어떠한 대답도 만족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 이 물음은 '왜 사는가?' 와 같은 질문이 그렇듯 머릿속에 깊고도 검은 구멍을 만든다.

 

그런데 이 책의 미덕은 그 검은 구멍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연로한 여행자는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고독과 대면할 때마다,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나는 왜 이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고, 그 대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걷기에 담긴 철학적 의미, 여행 방식이 인식에 미치는 영향, 실크로드에 대한 방대한 지식, 위험한 여행길에서 겪는 일들에 대한 솔직한 감상,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 등등 다양한 프레임을 통해 답을 구한다.

 

"만약 여러분이 어디선가 그를 만나게 되더라도 이렇게 묻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하는가?' 아마도 그는 대답을 거의 찾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책 속의 행간에 숨겨놓은 다른 형태의 질문들을 통해서 말이다. 오디세우스처럼 행복하게, 그가 머릿속에서 자신의 모든 여정을 재구성할 어느 날, 스스로를 되찾기 위한 이야기라고. - J. P. S. "

 

서문의 마지막 구절이다. 과연 그 작가에 그 편집자다운 방점이다.

 

보행자의 열반

 

베르나르가 실크로드에 관심을 갖는 이유의 바탕에는 그 길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이어주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는 인식과 나아가 서양문화가 동양문화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그는 실크로드에 남아있는 동서 융합의 흔적에 열광하고, 대상들의 자취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그의 여행 방식은 대상들이 이동하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낙타를 끌고 사람이 하루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대략 30킬로미터 가량, 실크로드에는 그 정도의 간격을 두고 대상들을 상대로 편의를 제공하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도 하루에 대략 30킬로미터 가량을 걷는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점심까지 걷고, 잠시 뜨거운 태양을 피해 휴식을 취하고 나서 더위가 한풀 꺾인 후 저녁때까지 걸으면 대개 숙소가 있는 다음 마을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터키에서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에 이르는 이슬람 지역은 종교의 절대적 권위와 그와 결탁된 고압적인 관리들을 냉온탕처럼 오가야 한다. 이 여행기의 백미 중 하나는 처절한 걷기 끝에 만나는 이 천사와 악마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지인들은 베르나르가 이스탄불에서부터 걸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샬라(세상에, 이럴수가)!"를 연발하며, 손님을 환대해야 한다는 교리에 따라 지나칠 정도로 음식과 질문을 쏟아낸다 (이슬람 남성들의 가장 중요한 취미는 차 마시며 '수다떨기' 이다). 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권위적인 경찰들과 경찰을 사칭한 노상강도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캉갈'이라고 부르는 목양견들, 걷는 사람은 안중에 없이 적대적으로 사람을 몰아붙이는 트럭들은 혈혈단신 혼자 걸어가는 그에게는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

 

해가 질 무렵 땀과 먼지에 절은 모습으로 마침내 마을에 들어서면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다. 애써 찾아 간 마을에서는 천사가 기다리고 있을지, 악마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마을사람과 처음 마주치는 순간 그의 인상과 말투를 유심히 관찰해서 최대한 많은 것을 파악하려 노력한다. 그에게 기댈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딘가에 있을 천사를 찾아 돌아서야 할지, 이 마을의 분위기는 어떤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 판단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어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눕기까지는 기나긴 밤의 여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절한 이동의 끝에서 만난 선한 사람은 천사보다도 아름답고, 힘든 길을 더욱 고단하게 만드는 장애물들은 이 성깔 있는 노인을 절망에 빠뜨린다. 여행이 계속되면서 그는 악마에 대처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터득해 간다. 때로는 귀엽고, 때로는 통쾌한 그 순간, 지혜롭고 근성 있는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매력덩어리'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에서는 이 순간들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 감동은 그와 함께 하루치의 긴 걷기를 함께하고 난 후에야 제대로 느낄 수 있을뿐더러, 이 순간이야말로 힘들게 책을 읽어 내려간 독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가 여행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걷기에 적응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대목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일체감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 13일 전부터 계속된 강행군에 몸의 근육들이 적응한 것 같았다. 짐도 덜 무겁게 느껴졌다. 분당 맥박수도 쉴 때는 60까지 내려갔고 걸을 때도 85까지만 올라갔다... 육체의 젊음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내 신체기관을 내가 뛰어든 모험에 적응시키는 것, 이 첫 싸움에서 나는 승리한 모양이다. 나는 세포 하나하나마다 취기 같은 것을 느꼈다. 이 환상적인 풍경에서 몸이 공중에 뜨는 듯했다. 마침내 보행자의 열반에 들어선 것이다. "   

 

내가 노인이 되면 떠나고 싶은 여행

 

<나는 걷는다>에서 베르나르가 노인이라는 사실은 강력한 감동이 원천이다. 그는 자신을 '괴팍한 고집쟁이 노인네'라고 말하지만, 여행기를 통해 본 그는 '여행하는 고목나무'이며, 아무리 길어 올려도 맑은 물이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그는 노인이야말로 생존하는 인간 중에서 가장 넓고 깊은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노인이기에 가장 성숙한 여행을 할 수 있고, 가장 진솔한 여행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음을 증명한다.

 

여행기중독자는 더 많은 노인이 여행을 떠나 더 많은 그들의 이야기를 남기길 바래본다. 그리고 한편으로 여행기중독자가 노인이 되면 떠나야 할 여행을 생각한다. 이 여행기를 보면서 떠나고 싶어진 여행은 (만일 죽기 전에 남북 간의 왕래가 허용된다면) <열하일기>의 그 길을 걸어가는 여행이다. 북한과 만주를 지나 박지원이 걸어갔던 그 길. 남한, 북한, 만주의 동포들을 차례로 만나다보면 조선시대, 독립운동, 냉전시대, 그리고 통일시대의 모습이 교차되며 내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한국과 중국으로 오갔던 사람들과 문화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고, 다시 국경을 맞대게 된 한국과 중국의 미래를 점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커피견문록>을 읽고 생각하게 된, 담배의 역사와 담배가 가진 자기 파괴적 미학을 찾아 떠나는 <담배 견문록>은 허파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떠야할 것이다.)

 

하지만 도보여행은 길이 터져야 갈 수 있는 여행, 지금으로서는 길이 트이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아마도 이것이 <열하일기>의 그 길을 걷고 싶은 더욱 간절한 이유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전국 열바퀴 도보여행을 목표로 여덟바퀴째 여행을 하고 계신 남상범 선생님(77세)이 건강하게 완주하시길 기원합니다.(2009년 4월 23일 오마이뉴스 기사 <77살 할아버지 "전국을 열바퀴 돌거야">)


나는 걷는다 1 - 아나톨리아 횡단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효형출판(2003)


태그:#나는 걷는다, #효형출판사, #베르나르 올리비에, #실크로드,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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