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의 범죄 현장에 있는 것이라고는 침묵뿐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러나 사체는 이야기한다. 유능한 수사관이라면 사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냉동이 채 풀리지 않은 어린이의 사체는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조수경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아직 부검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조수경은 일단 법의학자들이 제출한 소견서를 기초로 하여 사체의 특징을 정리해 보았다.
1. 사체 발견 지점은 실종 지점과 아주 가깝다(약 450미터).2. 사체는 검은 비닐봉지 4개에 나뉘어 배낭에 넣어졌다.3. 사체는 최소 12등분 이상 되었으며 배낭에는 8등분만 담겨 있었다(나머지 4등분 이상은 둔부와 발가락 등인데 아직 범인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4. 발견 당시 사체의 온도는 -0.7도로서 냉동이 다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5. 사체의 코와 입에는 솜이 가득 차 있었다.6. 사체는 비교적 말끔히 잘린 상태지만 일부는 끝 단면이 다소 거칠다.7. 사체의 등에는 1.45센티 간격으로 눌린 자국이 12줄 규칙적으로 나 있다.8. 사체의 성기에 상처가 나 있다.9. 사체의 손바닥에 쓰여 있는 글씨는 판교여인살인사건을 흉내 낸 것으로 추정된다.10. 사체와 사체 주변에서 범인의 지문이나 혈흔, 족적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조수경은 되도록 심리적 추정을 배제하면서 사체의 특성을 근거로 범죄 상황을 추리해 보았다. 먼저 사체가 토막 난 상태, 입 안의 솜, 비닐봉지 등으로 보아 살해는 실내에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등의 눌린 자국은 간격과 규칙성으로 보아 가정용 냉장고의 냉동실 바닥임이 확실시되었다.
사체 절단에 사용된 연장은 딱 짚어서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기계톱일 수도 있고 가정용 톱이거나 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괴 혹은 납치의 이유, 목격자 부재 이유, 살해와 토막 낸 이유, 실종 현장 주변에 사체를 유기한 이유 등을 추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사체의 등에 눌린 자국은 추정대로 1998년에 생산된 S사의 저가형 B냉장고임이 밝혀졌다(경찰청 과학수사부는 최근 국내 유통 가전제품의 제원과 특징을 데이터베이스화 해 놓고 있으며 언제든지 컴퓨터 조회가 가능하다).
이윽고 조수경은 범인 프로파일링에 착수했다.
첫째, 살해의 대상, 수법이나 사체에 쓰인 필체로 보아 판교여인살인사건과는 무관하다.둘째, 범인이 돈을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피살자 가족과 원한 관계이거나 변태성욕자 또는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다.셋째, 피살자의 집, 실종 장소, 사체 유기 장소가 모두 지근거리임을 감안할 때 범인은 현장 주변 거주자일 가능성이 높다.넷째. 사체를 토막 내는 작업을 장시간 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범인은 혼자 사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얼마 후 나온 부검 결과 사체에서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다. 또 피살자가 수면제를 복용한 흔적이 나타났다. 조수경은 이 두 가지 사항을 기초로 한 프로파일링을 첨부하여 수사본부에 넘겼다.
다섯째, 범인은 직업이 없거나 있더라도 야간 근무자거나 교대 근무자일 것이다. 여섯째, 범행 동기는 성욕이며 범인은 소아기호증이 있을 것이다(18세 이상 성인이 적어도 자기보다 5세 연하인 사춘기 이전의 어린이에게 성적 매력과 욕구를 느껴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증세. '소아애'라고도 불리는 이 이상 증세는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차단되었을 경우 나타난다).조수경의 프로파일링을 받아들였는지 수사는 아연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경찰청은 사건 현장 인근의 성범죄 전과자 39명의 명단을 확보했다. 그들의 거주지를 탐색하여 S사(社)의 B형 냉장고가 있는지 여부를 밝히는 일이 수사의 핵심 관건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1차 수사 대상자 39명 모두가 알리바이가 있거나, 교도소에 가 있거나, 사망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요컨대 1차 대상자 39명 중에는 용의점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전국적인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매일 관련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은 각다귀 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은 쓸거리가 없어지면 경찰 수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 놓았다. 아니면 자기들 구미에 맞는 전문가를 내세워 자의적인 범죄 추정을 해대곤 했다. 그들은 아무 근거 없이 경찰의 초동 수사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거나, 과학성과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하거나, 유력한 목격자를 무시하고 놓쳤다는 등의 기사들을 남발하는 수법을 썼다.
특히 <조센일보>의 선준혁은 기자라기보다는 소설가에 가까웠다. 그는 이번 사건을 판교 사건과 연결시켜 연쇄살인사건으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그의 기사에 의하면 판교 사건의 피살 여인 유방에 쓰인 'GREED'는 부동산을 정점으로 물신화, 배금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린 것이며, 송파 탄천 사건의 'CHARMING'은 용모지상주의의 세태를 지적했거나 아니면 용모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범인이 사회에 앙갚음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던 차에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한 모텔에서 피살자의 나머지 사체가 발견되었다. 현장에 출동한 양평경찰서 형사들은 이미 전달된 공문을 통해 그것이 서울 송파의 어린이 토막 사체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즉시 서울 경찰청 과학수사본부로 연락했다.
조수경은 모텔의 출입문부터 증거 채취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계단, 복도, 방문, 객실 입구까지 확대 렌즈로 살피며 들어갔다. 감식 팀은 신발장과 방바닥, 침대, 탁자, 화장실 등에 시약을 뿌리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누구의 것인지 모를 희미한 지문 10여 점과 꽤 오래 된 것처럼 보이는 모발 몇 가락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사체 조각은 객실 화장실의 변기에 무참히 처박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보고와 달리 사체의 일부가 변기 옆 바닥에 나뒹굴어 있었고 주위에는 알 수 없는 이물질이 뿌려져 있었다. 감식 팀의 시선이 모텔 주인 여자에게 일제히 쏠렸다. 그러나 주인 여자는 야속스러워 하는 감식팀원들의 시선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청소 아줌마가 소릴 지르고 옹것 난리를 쳐부리기에 와 봤더니, 글씌, 저게...."
주인 여자는 바닥에 있는 사체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말을 이었다.
"저게 있어서 재수 옴 붙을꺼봐 얼릉 소금 뿌리고 닦았지유."
허탈해진 감식반은 준비해 간 이동식 냉장고에 사체를 담아 국과수로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서는 자칭, 타칭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입을 빌려 온갖 추정 기사들을 내보냈다.
범인은 경찰을 농락하는 지능범이다. 사체를 두 번에 걸쳐 나눠 버린 것은 고의적으로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이다. 송파나 양평 두 곳 모두 범인의 거주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경찰은 수사 방향을 바꾸어 제3의 장소, 고학력 전문직, 그리고 염세, 비관주의자에게도 시선을 돌려야 한다.
범인은 과시욕이 강하다. 그는 글씨와 사체 토막, 사체 분리를 통해 뭔가 심상치 않은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다.
물론 수사에 관한 언론 보도는 실력이나 소신 없는 수사관에게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국에서 언론 보도의 정확성과 진실성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는 급감하고 있었다. 과학수사본부는 처음 판단을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화요일과 토요일 기준으로 주 2회씩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