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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지난 10일 봉하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봉화산 사찰 정토원에서 노짱 49재가 거행되는 동안 마을회관 앞마당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노짱 49재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가수 정태춘씨가 마련한 무대였고, 탤런트 권해효씨와 오지혜씨가 사회를 보았다.

 

 나는 강화도에서 온 함민복 시인과 함께 움직였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함민복 시인은 고교생 시절에 내 또 하나의 데뷔 작품인 '소설문학'지 신인상 당선작품 <정려문>을 읽었노라고 했다. 꽤나 인상이 깊었던지 근 30년 전에 읽은 소설의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이름자의 영문 이니셜이 'MB'여서 'MB'에 관한 말이 나올 때마다 한없이 쪽팔리는 기분이라는 말로 동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시인이다.

 

 나와 함 시인은 앉을 자리를 찾다가 너른 마당 가장자리 한 켠 천막이 쳐진 곳으로 갔다. 이미 그곳에는 많은 이들이 앉아 있었지만 천막이 만들어주는 그늘의 앞쪽 끄트머리 께에 공간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몸의 일부라도 그늘에다 놓기 위해 그곳으로 가 비집고 앉았다.

 

 우리 두 사람의 바로 등뒤에는 오래 전에 환갑을 넘긴 듯한 두 분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뒤로 조금 물러나 앉아 주었고, 다리를 오므려서 우리 두 사람을 좀더 그늘 속으로 들어오게 해주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표했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노짱 49재 추모문화제 10일 오전 봉하마을 마을회관 앞마당 풍경. 노짱의 손 쪽 텐트 아래에 나와 함민복 시인이 앉아 있었다.
노짱 49재 추모문화제10일 오전 봉하마을 마을회관 앞마당 풍경. 노짱의 손 쪽 텐트 아래에 나와 함민복 시인이 앉아 있었다. ⓒ 지요하

 그런데 인사를 나누다 보니, 충청도에서 온 분들이 아닌가. 충남 연기군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했다. 같은 충청도 사람인 나로서는 더럭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느냐"고 물으니, 노짱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버스를 두 대나 대절해서 새벽에 달려왔노라고 했다.

 

 "죄송한 말이지만, 어지간히 나이 드신 분들 같은데, 더구나 시골에서 사시는 여인 분들이 어떻게 그리 노짱을 좋아하시게 됐대요?"하고 물으니, "바보 노무현을, '노무현 정신'을 알만큼은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린 유시민씨의 <후불제 민주주의>도 읽었고, 강준만 교수의 '국민사기극' 같은 책도 읽었어요."

 

 순간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얼얼해진 정신으로 "그럼 학교는…"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부질없고 유치한 질문일 터였다. 긴 가방 끈을 가지고도 세상을 더럽고 치사하게 사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비록 가방 끈은 짧더라도 '깊은 생각, 너른 마음, 높은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또한 이 세상의 속내였다. 그것을 다시 한번 절절히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분들께 전날(9일) 봉하에 온 사실과 하루 전에 온 이유를 말해 드렸다. 자연 노짱 추모시집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함민복 시인이 가방 속에서 자기 몫인 시집을 꺼내어 한 분께 드렸다. 나는 버스 안에다 시집을 놓고 와서, 다른 한 분께는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시집을 받지 못한 분이 "난 서점에서 사서 볼 게요"라고 하더니, 시집을 받은 분께 "사인도 받아"라는 말을 했다.

 

 "개인 저서가 아닌 책에 사인을 하기는 좀 어색하다"고 했더니 "그래도 특별한 책이니 두 분 다 사인 좀 해주세요"라고 졸라서 나와 함민복 시인은 같은 책에 사인을 했다. 공동저작물에 두 사람이 함께 사인을 해보기는 나나 함 시인이나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두 분이 연락처도 적어달라고 해서 나와 함 시인은 그 책에 휴대폰 번호도 적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곧 몸을 일으켜 추모문화제가 벌어지는 무대 가까이로 가서 사진 찍는 일에 열중했다. 공연이 끝난 후 돌아와 보니 함 시인도, 그 두 분의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2>

 

 노짱의 유해 안장식이 끝나고, 오후 1시쯤 우리 일행 대부분이 버스에 올랐을 때였다. 아직 오지 않고 있는 몇 명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참인데, 내 휴대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오전에 만났던 두 여인 중의 한 분이었다. 시집을 받은 분인 것 같았다. "시집을 받은 답례를 하려고 노짱님 티셔츠를 샀는데요. 이걸 좀 전해 드릴 수 있을까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노짱 티셔츠를 받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서로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거리 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만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점을 말하니 "그럼, 그냥 가세요.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리고 선생님 댁 주소를 알아 가지고 택배로 부쳐드릴 게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욱 고맙고 미안해지는 마음이었다. 아직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노짱 티셔츠를 선물 받게 생겼다는 사실이 이상한 흥겨움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노짱 티셔츠를 받게 되면 애지중지하며 열심히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함민복 시인과 함께 강화도에서 사는 함민복 시인과 함께 움직인 시간이 많았다. 돌아올 때 한 휴게소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어주신 분이 좀 서툴렀는지 카메라가 약간 흔들렸다.
함민복 시인과 함께강화도에서 사는 함민복 시인과 함께 움직인 시간이 많았다. 돌아올 때 한 휴게소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어주신 분이 좀 서툴렀는지 카메라가 약간 흔들렸다. ⓒ 지요하

 그로부터 며칠 후 또 한번 전화를 받았다. "10일날 봉하에서 만난 시골 아지매예요"라고 해서 금방 감을 잡았지만 두 분 중 어느 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분의 이름을 알아놓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그날 시집을 받은 답례로 제가 노짱님 티셔츠를 샀는데 그걸 보내드리려구요"라는 말로 보아 시집을 받은 분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쩌면 두 분이 함께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감사를 표하며 내 주소를 알려드렸다. 농사를 짓느냐는 물음에 농사는 짓지 않는다는 답변도 드렸다.

 

 그리고 21일 큼지막한 종이상자를 하나 택배로 받았다. 종이상자 안에는 자두, 고구마 순, 마늘쫑, 부추, 고추와 뭔지 모를 감자같이 생긴 농산물이 들어 있었다. 또 비닐봉지 안에 두 벌의 노짱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편지도 한 장 들어 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가 계시다기에 볼품 없지만 무공해라 보내 드립니다. 노짱님 티는 책 고맙다고 성기호께서 드렸습니다. 노짱님 뜻을 함께 이어나갈 시인님을 만나뵙게 돼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그날 시집을 받지 않으신 분이 며칠 전 내게 전화를 걸어 주소를 물은 것이었고, 시집을 받은 분으로부터 노짱 티셔츠를 넘겨받아 자신이 가꾼 갖가지 농산물을 챙겨서 택배로 부치는 수고까지 한 것이었다.

 

 나는 즉시 연기군 서면 와촌리에서 사시는 그분께 전화를 드렸다. 유봉춘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다. 1942년 생인데, 네이버에 자신의 블로그도 있다고 했다. "내게 노친이 계신 것을 어찌 아셨느냐"고 하니, "인터넷 글을 읽고 알았다"고 했다. "감자같이 생긴 처음 보는 농산물은 뭐냐"고 하니 '미트'라는 것으로 날로 먹을 수도 있고 간에 좋다고 했다.

 

 나는 유봉춘씨의 편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성기호씨께도 감사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내게 노짱 티셔츠를 보낸) 이는 이영례라는 분이었고, 성기호씨는 이영례씨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자신이 노짱 티셔츠를 보낸 것은 아들의 뜻이라고도 했다. 나는 뭔가를 곱배기로 받은 기분이었다.      

 

 그분들이 내게 노짱 티셔츠를 두 벌 보낸 것은 부부가 함께 입으라는 뜻일 터였다. 그것을 헤아린 아내는 나보다 더 고마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즉시로 노짱 티셔츠를 입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노짱님 티셔츠를 봉하마을에서만 입어서는 안 돼. 또 노짱님 관련 행사 같은 데만 입고 가서도 안 돼. 언제 어디에서나, 노상 입어야 돼. 나도 이날까지 어지간히 '바보'로 한 세상을 살아왔는데, 자존심을 갖고 계속 '바보'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나도 어느 정도 바보이기 때문이고, 노무현의 '바보 정신'을 추구하기 때문이야. 이 노짱 티셔츠을 입는 것은 노짱의 '바보 정신'을 표방하고 추구한다는 뜻이야. 노짱의 바보 정신을 끊임없이 표방하고 추구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가치들이 어이없이 훼손되고 파괴되고 퇴보하는 이 시절에는 더욱 열심히 이 노짱 티셔츠를 입어야 해.

 

 <3>

 

출판기념회 인사말 22일 저녁 6시 서울 인사동 거리 인사8길 골목에 있는 카페 '시인'에서 노짱 추모시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과분하게도 두 번째로 인사말을 했다. 옆에 앉은 이는 과거 월간 '샘터'에서 오래 일했던 박몽구 시인.
출판기념회 인사말22일 저녁 6시 서울 인사동 거리 인사8길 골목에 있는 카페 '시인'에서 노짱 추모시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과분하게도 두 번째로 인사말을 했다. 옆에 앉은 이는 과거 월간 '샘터'에서 오래 일했던 박몽구 시인. ⓒ 김이하

 나는 22일 노짱 추모시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을 가면서 노짱 티셔츠를 입었다. 노짱 티셔츠를 입고 출타를 하기는 처음이었다. 여름이 한창인 시절이니 티셔츠만 입어도 좋겠지만, 나는 겉옷을 하나 더 입어야 했다. 지난해 병상생활을 겪은 후로는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 됐다. 각별히 감기조심을 하며 살아야 하는 신세이기도 하다.

 

 겉옷을 하나 더 입었지만, 나는 겉옷의 단추를 모두 풀어서 노짱 티셔츠가 쉽게 보이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옷차림을 보게 되기를 원했다. 노짱을 긍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망각'을 경계토록 하는 것이 되고, 노짱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도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왕 그런 뜻을 표하며 살 바에는 좀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노짱 추모시집 출판기념회 자리에서는 노짱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나 하나여서 좀 외로움 같은 것을 느꼈지만, 나 한 사람만이라도 노짱 티셔츠를 입고 와서 뭔가 확실하게 몫을 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다.

 

 추모시집은 발간 2주만에 초판 3천부가 매진되어 재판 작업에 들어갔다고 했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겨레'와 '경향'까지 모든 일간지들이 단 한 줄의 소개 기사도 내주지 않고 있지만,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매체들의 보도에 힘입어 베스트셀러 진입이 낙관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책이 많이 팔리면 참여 시인들에게 지급하지 못한 원고료를 올 가을 봉하마을에서 '오리농법'으로 생산한 쌀로 지급할 계획이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초판에는 262명의 문인이 참여했지만, 원고 전송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미처 넣지 못했던 3명의 시가 재판에는 추가되어 도합 265명이 참여한 셈이라고 했다.

 

 나는 또 하나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노짱의 추모시집에 참여한 것만도 기쁜 일인데, 책이 많이 팔려서 원고료를 올 가을 봉하마을에서 오리농법으로 생산한 쌀로 받는다면 정말 멋진 일일 터였다. 그런 일이 생기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잠시 겉옷을 벗고 노짱의 티셔츠만을 입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나는 앞으로 어떤 자리에 가든 노짱 티셔츠를 입을 작정이다. 물론 집에서도 노상 노짱 티셔츠를 입고 생활한다. 병환을 겪으시는 노모를 보러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께도 보여드리려는 뜻이다.

 

이승철 시인과 함께 노짱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다음 좀 일찍 자리를 뜨면서 겉옷을 벗고 티셔츠 바람으로 '한국문학 평화포럼' 사무국장 이승철 시인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승철 시인과 함께노짱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다음 좀 일찍 자리를 뜨면서 겉옷을 벗고 티셔츠 바람으로 '한국문학 평화포럼' 사무국장 이승철 시인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김이하

 노모께 감사한다. 병환을 겪으시게 되면서 이상한 불안과 걱정 때문인지 심경에 변화가 생겨 내 승합차 뒷문 유리에 부착되어 있는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딱지를 떼라고 성화를 부리신 어머니다. 처음에는 "이명박은 사죄하라는 말도 아니고, 살인정권 물러가라는 말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로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했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노짱의 49재 때까지만 그 딱지를 붙이기로 타협을 하고, 노짱 49재가 지난 후 어머니와의 그 약속을 지켰다. 그 후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시는 눈치였다. 아들도 환갑이 넘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머니와의 약속을 군소리 없이 지키니 어머니는 아들이 고맙기도 한 모양이었다. 아들이 노짱의 티셔츠를 입을 때는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다. 노짱 티셔츠를 입고 22일 서울을 가는 것도 쉽게 허락을 하셨다. 오늘 어머니를 모시고 점심 때 외식을 하고 성당에도 가고 했는데, 어머니는 내 노짱 티셔츠 차림에 아무 부담이 없으신 것 같다.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노짱의 '바보 정신'은 진정한 자존심이다. 그것을 표방하는 일에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어리석고도 분별 없는, 음험하고도 치졸한 시절에는 '노무현 정신'을 표방하는 일에 더욱 적극성을 발휘해야 한다.

 

 나는 과거에는 '노사모'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노사모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한 표를 던졌지만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오랫동안 비판의 눈을 견지했다. 하지만 그가 퇴임한 다음부터는 웬만한 노사모 이상으로 철저한 '노빠'가 되었다. 상당 부분은 이명박 때문이다. 이명박이 그렇게 만들었다. 과거 건설회사 사장 노릇하던 식으로 국민을 대하고 시민정신을 얕잡아보는 그의 습성이 쉽게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국민을 속여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임이 드러났다. 나는 그의 당선과 동시에 수많은 부작용의 속출을 우려했다.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 무엇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임을 잘 안다. 그것을 잘 알기에 계란의 소중함도 인식한다. 저 바위를 향해 투신하는 계란은 더 가치 있고 위대하다. 그것을 굳게 믿기에 오늘 다시 새롭게 저항정신을 가다듬는다. 

 


#바보 노무현#노무현 정신#봉하마을#추모시집 #노짱 티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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