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낮 12시30분 서울 신문로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옥 뒷편. 점심시간에 맞춰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기자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전날(28일) 박삼구 회장의 전격 퇴진이라는 폭탄(?) 발언에 대한 분위기와 생각 등을 듣고 싶어서였다.
금융계열사에 다닌다는 김아무개 과장은 "사무실내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은 사실"이라며 "형제간 우애가 좋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옆에 있던 동료직원인 이아무개씨도 "우리도 인터넷 등에 오른 기사를 보고 뒤늦게 '그런일이 있었나 보다'라고 알았을 뿐"이라며 "이러다가 그룹 전체가 이상해지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도 들기도 한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체로 박 회장의 결단에 대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앞으로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가시지 않는 듯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직원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된다"면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는 이어 "그룹에서 구조조정이다 뭐다 하면서, 계열사를 조이고, 직원들은 힘겹게 일하고 있는데 윗분들 생각은 다른 것 같다"면서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형제간 우애 좋다고 들었는데..." 불안한 금호아시아나 직원들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형제들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무엇이 25년 동안 '금호의 형제경영 전통'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을까.
금호그룹의 한 고위인사는 30일 "형제간 불신이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이유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현재는 형(박삼구 회장)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결국 동생(박찬구 회장)이 그동안 이어져 온 공동경영의 틀을 깬 것은 사실이지만, 누가 먼저 신뢰를 깨뜨렸는지는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누가 먼저 신뢰를 깨뜨렸는지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 좀더 말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곤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금호아시아나 그룹은 이미 알려진대로,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 이후 형제들끼리 경영을 이어받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고 박 회장은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다. 큰 아들인 고 박성용 회장을 비롯해 둘째 박경애(여, 삼화고속 회장 부인)씨, 셋째 고 박정구 회장, 넷째 박강자(여, 금호미술관장), 다섯째 박삼구 그룹회장, 여섯째 박찬구 화학부문회장, 일곱째 박현주(여, 대상홀딩스 부회장), 여덟째는 박종구(아주대 부총장) 등이다.
이들 박씨 일가는 창업주의 유언과 형제들간의 합의를 통해 '형제공동경영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은 박종구 부총장을 뺀 나머지 4형제들이 동등하게 지분을 갖고, 그룹 회장직은 나이가 많은 순으로 맡지만 65세까지로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65세 룰'이다.
형의 일방적인 경영과 인사에 대한 불신이 금호사태의 원인?
실제로 박성용-박정구-박삼구-박찬구 등 4형제 가문은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금호석유화학과 금호산업 지분을 똑같이 갖고 있었다. 또 그동안 관행대로라면, 올해 나이 64세인 박삼구 회장은 오는 2010년엔 박찬구(61) 회장에게 그룹 수장 자리를 넘겨줘야할 판이다.
하지만 작년 말부터 금호그룹 안팎에선 두 형제간의 신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올 상반기부터 금호그룹을 둘러싼 유동성 위기가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고, 그룹 차원의 자산매각 등 자구노력을 두고 박씨 형제간 갈등 양상을 보였다는 설까지 제기됐다.
실제 <중앙일보>는 30일치 신문에서 금융권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지난 4월 금호아시아나가 채권단과의 재무구조개선 약정서 체결 약정서 체결 과정에서 박찬구 회장쪽이 보관한 인감도장을 내주지 않아 박삼구 회장이 난처했다"고 보도했다.
결국 박삼구 회장쪽이 법원 등기소에 인감 분실신고를 하고, 새로운 인감으로 채권단과 재무구조 약정을 최종 체결할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박찬구 회장 쪽에선 공식적으로 어떠한 언급도 없는 상태다. 채권단 인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삼구-찬구 형제간 신뢰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동생인 찬구 회장이 공동경영원칙을 깨고 나선 것은 무엇보다 형인 삼구 회장의 일방적인 경영과 인사스타일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는 해석도 여전하다.
익명을 요구한 금호그룹의 한 임원은 "지난 2006년 창립6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룹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 뛰어들긴 했지만, 내부에서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면서 "특히 상당 부분을 '빚'을 내가며 대우건설을 인수하고, 대한통운 인수전까지 들어갔을때는 걱정이 컸지만 그대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인수에 성공하면서 일부 인사를 중심으로 승진 잔치가 이어졌다"면서 "최근 그룹이 어려워지자, 인수를 추진했던 인사들 중심으로 구조조정안이 만들어지고 추진되고 있지만, 그동안 상대적으로 우량한 계열사 중심으로 불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예견된 형제의 난, 무리한 기업인수 놓고 형제간 이견 노출
이번에 형제공동경영원칙을 깨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사들인 박찬구 회장쪽도 그동안 삼구회장의 무리한 인수합병 등을 반대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향후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과연 박삼구 회장이 65세가 되는 오는 2010년께 회장직을 찬구 회장에게 과연 넘겨줄 것이냐의 여부도 걸려있다.
이같은 배경엔 박삼구 회장의 아들인 박세창 그룹 전략경영본부 상무가 있다. 박 상무는 2005년 금호타이어 입사 이후, 1년 만에 상무보로 승진한 이후 대한통운 인수전을 비롯해 신문로 신사옥 건립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는 등 그룹내 활동의 폭을 넓혀왔다.
최근 들어 사장단 회의까지 참여하면서, 그룹의 각종 보고도 받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룹 안팎에선 박삼구 회장의 뒤를 잇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나왔다.
'65세 룰'에 따라 2010년 회장직을 넘겨받을 박찬구 회장 입장에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또 찬구 회장의 아들인 박준경 금호타이어 부장은 아직도 임원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재계 한 인사는 "만약 박삼구 회장이 내년까지도 계속 회장직을 수행할 경우, 찬구 회장 입장에선 형제간 경영권 승계는 물건너 가는 것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며 "또 자신의 아들보다 조카(삼구회장의 아들인 박세창 상무)가 그룹에서 2인자로 각인되는 것에 대한 반발심도 충분히 예상할수 있는 일"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박찬구 회장 입장에선 대우건설 재매각 등으로 형인 박삼구 회장의 경영실패를 근거로 본격적으로 반기를 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임'이었다. 물론 형도 퇴진했다고 선언했지만, '완전 퇴진'으로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부에선 박삼구 회장의 '완승'으로 보기도 하지만, 금호그룹의 박씨 형제간 갈등과 그룹 분할을 둘러싼 내홍은 지금부터라는 시각도 나온다. 박찬구 회장이 지주회사격인 금호석유화학 이사직에선 해임됐지만, 대주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장기전 양상으로 진행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이번 금호사태는 거대 그룹의 경영권을 단순히 총수 일가의 결속력만으로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재벌의 경우 창업주를 이어 2세, 3세로 넘어갈수록 가문의 결속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소수 지분만으로 그룹의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추는 것은 물론 경영의 정당성을 갖기 어려우며, 총수형제간 분규로 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