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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성대한 장례 의식인 국장(國葬)

오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삼우제(三虞祭)라 한다. 이로써, 요즘은 거의 사라진 소상(小祥), 대상(大祥)을 제외하면 장례의 절차는 다 끝난다. 굳이 김 전 대통령의 장례여서는 아니지만 이 기회에 우리의 장례 문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싶다. 단지 김 전 대통령의 국장을 생각의 계기로 삼는 것뿐이므로, 그 분의 서거 자체는 전혀 초점이 아님을 독자들은 먼저 이해하시기 바란다.

늘 장례식이란 그렇지만 나는 관심 깊게 인간의 병과 죽음에 관련한 문제를 자세히 들어보고, 입관, 운구, 영결식, 안장식 등의 장례 절차도 상세히 지켜보곤 한다. 목숨이 끊어져 땅에 묻히고, 그 며칠 뒤에까지 이어지는 절차란 가만히 하나하나 짚어보면 참으로 복잡하고 번거롭다.

전직 대통령에다 노벨상수상자인 김 전 대통령의 경우, 그 명성과 위상이 더해져서 국장(國葬)이란 형식으로 치르니 더욱 그랬다. 국장은 수십 년만에 처음이다. 옛날 임금이 붕어(崩御)한 때에 치르는 국상(國喪)과 같으니 영결식에 참여하는 일반 국민의 인파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 조문 사절에다 각계 인사의 조문을 맞고 예를 갖추어야 하는 유족은 망자(亡者)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을 것 같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

장례 절차란 설사 평범한 사람이라 해도 거의 마찬가지다. 사람이 한 평생 사는 동안 누구나 똑같은 모습으로 살게 되는 건 아니지만 죽음에 있어서는 누구나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땅에 묻히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매장과 화장의 형식이 다르고 그 규모와 설비가 다 같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절차는 누구라도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 절차에 있어, 옛날부터 행해온 구식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임종(臨終)에서 시작하여, 고복(皐復, 또는 招魂), 발상(發喪), 치관(治棺), 부고(訃告), 염습(殮襲), 천구(遷柩)와 발인(發靷), 노제(路祭), 치장(治葬), 우제(虞祭), 1년 후부터의 소상(小祥), 대상(大祥)까지.

지금의 장례 절차도 역시, 옛날 그대로 다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다른 예법이 많은 변화를 보인 데 비하면 크게 변하지 않고 사람이 치르는 어떤 의식보다도 복잡하고 번거롭다.

장례 의식이 복잡한 까닭은?

장례가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고인(故人)이 그러기를 바라리라고 미루어 짐작해서일까? 아니면 유족이 그러기를 바라기 때문일까?

죽은 사람이 복잡하면 할수록 더 복잡한 절차를 바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짐작으로는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기왕 죽은 몸이니 어서 고요히 안식하고 싶을 수도 있다. 유족도, 오히려 너무나 힘겨운 그런 절차를 바라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형식이 바로 관습이요, 그 관습을 꿰뚫고 있는 사상은 예(禮)라는 철학이요 제도이다. 동서양이 내용은 다르지만 다 죽음에 임하는 예는 있다. 같은 생물인 식물은 물론이고, 인간 이외의 어떤 동물도 죽음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식을 복잡하게 하지는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이러한 예를 지키고 있다.

유교에서 말하는 상례의 의미 

예를 가장 강조한 사상은 유교(儒敎)이고, 그 집대성자는 공자(孔子)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예의 뜻은, "천리의 절차와 형식(天理之節文)"이다. 즉, 예란 하늘의 이치에서 비롯되어 그 이치를 의식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례(喪禮)에 있어서 하늘의 이치란 무엇일까? 유교의 대가 중에 누군가가 말한 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유교가 말하는 상례에서의 하늘의 이치란 아마도 이런 뜻일 것이다.

"사람은 단 한 번 밖에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으로써 이별하는 것은 가장 큰 슬픔이다."

바로 이 슬픔이 그 이치이고, 그 슬픔을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 예(禮)이다.

그런데 공자는 상례(喪禮)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례는 형식을 잘 치르기보다는 슬픔이 우선이다.(喪 與其易也 寧戚)"

죽음에 깃든 하늘의 이치를 참으로 명확히 얘기하였다. 즉,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다. 죽은 자는 이제 이 세상과, 이 땅의 가족, 친지, 친구들과 영원히 이별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니 평생의 무슨 사건보다도 가장 슬픈 일이고 그 슬픔 이별을 엄숙하게 의식을 갖추어 치러야 한다는 것일 게다. 그러나 너무 형식에 치우쳐서 슬픔이라는 본질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 2500년 전 철학자 공자의 주장이다.

요즘의 장례 의식은 잘못 되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부터 내려오는 장례 절차는 물론이고 요즘도 거의 그대로 행해지는 오늘날의 장례 의식은 너무나 번거롭다. 이런 절차, 저런 형식 갖추느라 가만히 고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할 여유조차 없다.

아무리 번거로워도 문상객이 구름같이 몰려오기를 바라고 값비싼 관(棺)과 수의(壽衣)에, 좋은 묘지에, 크고 화려한 비석을 세워주고 싶어 하며 망자(亡者)를 핑계로 지금의 내가 더 누리고 더 자랑하고 싶어 한다. 더러는 이를 계기로 많은 부의금(賻儀金)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나의 백부(伯父)는 병구(病軀)를 이끌고 모친상을 치른 뒤 병이 더 악화되어 결국 얼마 못 가 돌아가셨다. 비슷한 경우가 더러 있는지 "줄초상"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성현이 우려한 바가 250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대로 벌어지는 것이다. 참으로 관습이 무섭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다 같지 않다. 제대로 잘 산 사람도 있고, 패악(悖惡)스럽거나 고통스럽게 산 인생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죽으면 똑같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예를 거친다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생명은 더할 수 없는 최상의 가치이니까? 이상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참으로 공허한 주장이다. 지금 이 순간도 곳곳에서 굶어죽는 아이, 치료도 못 받아 죽는 사람, 가난과 장애로 죽음보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의 죽음에는 사실 거의 아무 절차와 형식을 갖출 겨를도 없다.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도 않고 생명은 누구나 고귀한 것도 아니다. 아니 이치로는 고귀한지 모르지만, 현실로는 파리 같은 생명도 있다.

장례 의식의 개선을 바란다

지금과 같은 장례의 관습은 본래의 이치를 벗어나 이제는 가장 미개하고 미련한 인간의 악습(惡習)일 뿐이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묻어버리거나 풍장(風葬)을 할 수도 없다. 예(禮)라는 것의 가치는, 인간인 한 영원히 존중될 필요가 있다.

가족, 지인(知人) 등 특별한 뜻이 있는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표목(標木) 하나 세우고 물 한 그릇 떠놓고도 망자(亡者)의 삶을 기리며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도리를 다 하는 장례 의식이 아닐까?

평생에 단 한 번인데 그만한 번거로움이 뭐 어때서라고 할 일이 아니다. 본래 습관이란 진정한 이치를 가리기 일쑤이다. 이 엄청나게 불합리하고 무의미한, 진정한 예에도 어긋난 장례의 관습이 하루빨리 개선되기를 바란다.


#장례 절차#장례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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