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백두산 천지 2009년 8월 24일, 드디어 백두산을 북파(북쪽으로 등정하는 산길)로 올라 눈부시게 환한 천지를 보았다. 도유(서양말로 가이드)는 이렇게 맑은 날씨에 투명한 천지를 보는 것은 "천운"이라고 하였다.
백두산 천지2009년 8월 24일, 드디어 백두산을 북파(북쪽으로 등정하는 산길)로 올라 눈부시게 환한 천지를 보았다. 도유(서양말로 가이드)는 이렇게 맑은 날씨에 투명한 천지를 보는 것은 "천운"이라고 하였다. ⓒ 정만진

아직 백두산에 가보지 못했다. 압록강도, 두만강도 물론 가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윤동주 생가에도 가보지 못했고, 광개토대왕비도 장수왕릉도 보지 못했다. 국내성, 환도산성, 호산장성 그 어느 곳에도 들른 적이 없다.

줄곧 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대학에서 소설창작론 등을 가르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만나는 사람의 대부분이 교수나 교사들이고, 시인 아니면 소설가가 주종이다. 그러면서도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윤동주 생가, 고구려 유적 등을 한번도 찾지 않았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다. 금강산, 김일성 별장에서부터 판문점에 이르는 휴전선 일대, 백령도와 연평도에 가보았으니 그만하면 '국토'에 대한 예의는 갖춘 게 아니냐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소설가이자 교육자로서 2%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장면에 부닥쳤을 때, 뭐라고 할 것인가. 돈이 없어서 가보지 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사실일 수는 있으나 설득력 있는 진실은 되지 못한다. '서시'를 가르치면서 윤동주 생가와 동명학교를 생생하게 언급하지 못하면 반쪽 강의가 될 것이고, '황조가' 수업을 하면서 환도산성을 말하지 못하면 그 또한 살아있는 문학시간은 못될 것이다. '여수장우중문시'가 현존 가장 오래된 우리 한시라고 말만 하면 뭣하나. 비록 대첩의 현장을 사진으로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광개토대왕비나 장수왕릉의 위용 정도는 제시할 수 있어야 '의도의 오류'나 '감상의 오류'가 최소화되는 교수-학습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이어지는 '국경'을 한번 답사하기로 했다. 9월이 되면 백두산 입산이 금지된다니 부랴부랴 떠나지 않다가는 내년으로 미루어야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지금 떠나지 않으면 뒷날을 기약할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금강산과 개성 방문이 어느 날 갑자기 끊긴 것처럼 '국경' 일대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 불가능해질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의 풍광과 내년의 그것은 반드시 다른 법이니, 내년에 다시 가서 색다른 모습을 또 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더 더욱 경사가 아니랴 여기면서 무조건 오늘 여장을 꾸려 먼 길을 출발해야 하리.

마음 같아서는 압록강과 서해가 마주치는 곳에서부터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지점까지 걸어서 횡단을 했으면 싶지만, 그것은 어차피 가능한 꿈이 아니니 접어야 한다. 계획을 세워본다. 여행사들 상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들은 으레 백두산을 중간에 놓고 고구려 유적 아니면 윤동주 생가 쪽 중 한 방향을 붙인 여정을 진열한다. 좀 더 뜻깊은 길을 잡아야 한다. 길이 있어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법일 터.

윤동주 생가 전경 2009년 8월 25일, 윤동주 생가를 방문했다. 그는 없고, 그가 어릴때 뛰어놀던 마당과 숨쉬던 맑은 공기만은 남아서 여전한 향기로 손님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윤동주 생가 전경2009년 8월 25일, 윤동주 생가를 방문했다. 그는 없고, 그가 어릴때 뛰어놀던 마당과 숨쉬던 맑은 공기만은 남아서 여전한 향기로 손님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 정만진

비사성을 빼놓을 수 없다. 고구려와 수·당이 그토록 치열하게 맞붙어 싸웠던 곳이 바로 비사성인데 그 유적을 눈에 담지 않고서 어찌 민족교육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 그러려면 먼저 대련을 방문해야 한다. 백두산은 가볼 수 없는 길, 북한에서 등정하는 등산로를 빼고는 모두 다 밟아보아야 한다. 웬만한 고구려 유적은 다 들러야 하고, 윤동주 생가며 대성중학교, 연변에 세워진 최초의 조선족 교회인 명동교회, 압록강과 두만강도 꼭 가보아야 한다.

그런 마음을 쓸어담으니 대련(비사성)- 단동(압록강 단교와 위화도)-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국내성과 환도산성)- 백두산(남파, 서파)- 백두산(북파)- 용정(윤동주 생가)- 도문(두만강), 이렇게 여정이 계획되었다. 날마다 5시간, 혹은 7시간씩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난코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학교나 신문사에 들러 책에서 읽는 것과는 다른 생생한 이야기들을 날것으로 들으리라. 이만하면 민족교육을 위한 답사여행이라 해도 손색이 없으렷다.

여행안을 제시하니 일행들이 한결같이 난색을 드러낸다. 백두산을 세 번씩이나 올라갔다는 여행객은 본 적은커녕 들은 적도 없다, 이렇게 다니다가는 집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등등. 하지만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찔러야 하는 법, 여행 기간을 하루 줄이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백 번 올라가야 두 번 볼 수 있다는 게 백두산 천지인데 어렵게 먼 길을 가면서 어찌 한번 등정으로 요행을 바라겠느냐", "백두산을 몇 번 올라가는 걸로 천지(天池)를 보려는 자는 정말 천치(天癡)라고 하더라", "남들이 잘 가보지 않는 비사성도 반드시 봐야 교육적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등등. 심지어는 '만주의 호랑이' 김동삼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까지 언급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 지켜보리라.

북간도 용정에 있는 '일송정'의 이름도 김동삼의 호를 따서 붙여졌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 만큼 그는 신출귀몰한 독립군 장군이었다.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가했고, 1927년 김좌진, 이청천 등이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를 합하여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주최했을 때에는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그의 며느리였던 이해동 여사가 수기 <만주 생활 77년>을 통해 평생에 걸쳐 시아버지를 세 번밖에 못 보았다고 실토할 만큼 그는 오직 생애 모두를 독립운동에 집어던진 사람이었다.

그는 향년 60세이던 1937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 지켜보리라." 행을 구분하면 그대로 절명시(絶命詩)처럼 보이는 이 비장한 유언은 그가 죽으면서 남긴 피맺힌 외침인 것이다. "이런 땅을 어찌 편하게 다닐 수 있겠습니까.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그 많은 선배들이 한을 품은 채 눈도 감지 못한 채 묻혔지만 이제는 시신도 찾지 못해 아직껏 죽어서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는데,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가 잠깐의 어려움도 참지 못해서야 예의가 아니지요."

그러면서 박진관의 명저 <신간도 견문록>을 꺼내어 펼쳤다. <신간도 견문록>은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가 2006년 한국기자협회 추천으로 1년 이상을 신간도에 머물면서 연변과학기술대 사회교육원에서 수학도 하고 마을마을 골짜기골짜기 아니 다닌 곳 없이 답사도 하고, 그 이후 여러 차례 재방문하여 보강 취재를 한 끝에 한국언론재단의 연구저술 지원을 받아 발간한 책이다. 이미 2008년 2월 15일 출판기념회에 참가하여 구입한 이래 여러 번 독파한 바 있지만, 이번 여행을 앞두고 다시 공들여 읽고 있는 좋은 책이다. 그 책 중 한 부분을 모두에게 읽어주면서 말했다. "선조들을 기리는 안동 분들의 마음을 배웁시다."

삼원포에서 (수많은 독립군 요원과 지도자를 배출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까지는 남동쪽으로 약 35km 거리이다. 그러나 100리가 채 안 되지만 길이 험하다. (버스로) 1시간 반쯤 지나 도착한 곳은 광화진 패루. 여기서 약 4km쯤 가면 합니하가 나타난다. 선조들이 힘들게 다녔던 길을 버스로 편안하게 가는 것이 도리가 아닌 듯하여 (경북 안동에서 선조들의 독립 유적지를 찾아 여기까지 온) 일행들은 버스에서 내려 신흥무관학교 옛터까지 다시 4km를 걸어가기로 했다. 

이윽고 비행기는 떴다. 연평도와 백령도에 갈 때 아래로 지나가면서 그 웅자에 감탄을 거듭했던 인천대교가 까마득하게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하늘에서 본 인천대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인천대교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백령도와 연평도로 가면서 각각 올려다보던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작아보인다고나 할까. 바다보다도 하늘보다도 그것은 너무나 왜소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하늘에서 본 인천대교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인천대교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백령도와 연평도로 가면서 각각 올려다보던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작아보인다고나 할까. 바다보다도 하늘보다도 그것은 너무나 왜소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 정만진

쳐다본 인천대교 2009년 8월 5일, 아래로 지나가면서 인천대교를 올려다보았다. 그 위용은 사람을 압도했다.
쳐다본 인천대교2009년 8월 5일, 아래로 지나가면서 인천대교를 올려다보았다. 그 위용은 사람을 압도했다. ⓒ 정만진


#백두산#천지#윤동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