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 수많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올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어느 해보다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슬퍼했습니다. '용산철거민' 죽음은 시민들을 지켜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시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분노를 일으켰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은 전두환 군사독재 기간 동안 민주주의와 약자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추기경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미안함, 분노, 애통함으로 온 나라를 눈물 바다가 되게 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는 민주화와 남북화해, 가난한 자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를 떠올리면서 흐느끼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죽음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가족, 동무, 이웃들처럼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 죽음도 있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 없던 사람이 내 앞에서 생명을 놓는 것을 눈으로 직접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내 나이 마흔네 살, 수십 번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죽음 3가지가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자살 · 교통사고 · 암 이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한 달여 앞둔 5월 3일 군에 갔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을 향한 민주시민들의 저항이 얼마나 강렬한지도 모르고 이등병 생활을 했습니다. 이등병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폭력이었습니다. 그 중 나보다 여섯 달을 먼저 온 한 선임병이 있었는데 참 힘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선임병은 밉지가 않았습니다. 다른 선임병과는 조금 다르게 군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군 생활을 하였고, 나 같은 후임병을 때릴 때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때린 후에는 위로했습니다. 물론 선임병의 폭력이 정당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선임병들과는 달랐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폭력이었지만 그 선임병의 구타에는 반감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선임병에게 군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후에는 잘 따랐습니다. 폭력도 한 두 달이 지나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대를 배치 받은 것이 6월 10일 경이었는데 그 선임병과는 여섯 달밖에 같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1987년이면 여섯 달 선임 병은 군 생활을 20개월 정도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달밖에 하지 못한 이유는 12월 어느 토요일 외박을 나간 후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4일 후 그 선임병이 싸늘한 몸으로 우리 앞에 누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선명한 '이ㅇㅇ' 이름과 날카로운 눈매와 처음에는 폭력을 행사했지만 죽음을 얼마 앞두고는 자신이 살아왔던 팍팍하고 어려웠던 삶의 이야기를 하던 그 얼굴이 2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명합니다.
왜 '이ㅇㅇ'은 스스로 생명을 끊었을까? 군 생활을 어느 누구보다 잘했던 그가 왜 스스로 생명을 놓았는지 벽제 화장장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보내면서 수없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나보다 훨씬 더 군 생활을 잘했고, 죽음을 앞두고 나에게 와서 그토록 녹록하지 않았던 삶을 이야기했던 그가 왜 그렇게 갔는지 아직도 그 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여섯 달을 한 내무반에서 함께 살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알았습니다.
내 눈 앞에서 일어난 또 다른 죽음은 1994년 1월 어느 날 찾아왔습니다. 신학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헬라어(그리스어)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학교 앞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섰습니다.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었습니다. 건너려는 순간 느낌이 이상해서 왼쪽을 보니 택시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아저씨 한 명이 택시를 보지 못하고 건넜습니다. '퍽' 소리와 함께 "야, 왜 신호를 안 지켜!"라는 말이 내 귓속을 파고들었고, 그대로 끝이었습니다.
불과 한 발짝 앞에서 벌어진 그 장면은 1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그 날 이후 건널목을 건널 때는 가장 먼저 건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집 막둥이가 건널목을 건너면서 옆을 보지 않고 건너가는 것을 한 두 번 본 후 회초리를 든 일도 있습니다. 말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본 15년 전 그 교통사고 때문이었습니다.
군대 선임병 자살과 내 옆에서 교통사고로 생명을 놓아버리는 광경을 보면서 사람 생명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수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교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감사합니다. 내가 가진 지식, 권력, 돈은 한 순간에 다 없어질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마냥 슬퍼하거나, 좌절, 허망하지 않음을 아버지를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1997년 3월 10일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논에 나가셨던 아버지가 아침 드실 시간이 되어 집에 오셨는데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갑자기 쓰러졌는데 겨우 몸을 일으켜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고, 설사를 했다면서 도저히 밥을 먹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병원에 가니 위암 4기였습니다. 음식을 누구보다 잘 드신 분이었는데 위암 말기라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습니다. 가족들을 다 불렀습니다. 아버지께 위암임을 알려드렸습니다. 일흔여섯을 사셨고, 죽음이 와도 하늘나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기에 죽음이 육신을 덮쳐도 아무 걱정이 없을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수술과 약물 치료를 권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하셨습니다. 조용히 죽음을 맞게다는 이유였습니다. 위암 진단을 받고 1년 한 달 후 1998년 4월 25일 아버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년 1개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998년 1월에는 아버지와 함께 경남 사천에서 경기 수원까지 온 가족이 신학대학원 졸업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생명이 꺼져가는 아버지와 온 가족이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이었습니다. 그 때 찍은 사진 한 장이 아버지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되었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 마지막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아 본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였으니, 거의 20년 만이었습니다.
"아버지!""응?"
"아버지 뜻대로 목사 공부 마쳤는데 선물 안 주세요.""선물! 선물 준비 못했다. 우짜노?""선물 준비 못하셨으면, 용돈 좀 주세요.""용돈! 용돈은 네가 주는 것이다.""아버지께 용돈 받아 본 적이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20년 만에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아직도 그 때를 기억 하나?""그럼요, 아버지가 학교까지 찾아와서 주셨는데 그것을 기억 못 하겠어요?"
"돈도 많이 없는데 우짜노. 3만 원밖에 못주겠다."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마지막으로 용돈 좀 주세요" 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통증을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2주일 정도만 진통제를 복용했을 뿐입니다. 수술과 항암치료 한 번 받지 않으면서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아름답고, 기쁜 일임을 아버지는 보여주셨습니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