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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장미나무 식기장>
책 <장미나무 식기장> ⓒ 문학동네
유년의 첫 기억부터 출발하여 결혼 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할 때까지 나의 추억과 늘 함께 하던 가구가 있다. 갈색 테두리에 서랍마다 하얀 코팅이 입혀져 있었던 보르네오 서랍장은 그렇게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나와 함께 성장했다. 지금도 내 유년의 방안 풍경을 떠올리면 늘 그 서랍장이 생각난다.

누구나 이렇게 추억의 가구가 있다. 어떤 이는 흠집 나고 조율이 엉망인 피아노와 함께 성장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할머니 방에 놓인 커다란 궤짝을 추억으로 떠올리곤 한다. 책 <장미나무 식기장>은 이런 추억의 메시지로부터 출발한다.

"식기장을 열 때마다 텁텁하고 쌉싸래한 감나무 숲의 냄새가 난다. 이 식기장이 있는 한, 불에 타 없어진 책상과 함께 우리가 거쳐 온 여러 집들과 그 집에 얽힌 역사와 소소한 일들을 나는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번개가 치듯 찰나에 스러지고 마는 생의 한순간을 오롯이 기억하자면 그들도 대책 없이 큰 책상이나 수퉁스런 장미나무 식기장 하나쯤은 가져야 하는 것이다."

1991년 신춘문예, 1997년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 작가인 이현수는 화려한 상 이름에 걸맞게 독자의 마음을 이끄는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장미나무 식기장>은 책 제목이 된 대표작 이외에 <녹>, <태중의 기억>, <남의 정원에 함부로 발 들이지 마라> 등 몇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미나무 식기장>이 가구에 얽힌 유년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추풍령> 또한 과부 집안에서 태어나 숨죽이며 살아온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자가 없는 집이란 괴기스럽기도 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불행한 운명을 갖고 있다. <추풍령>은 그런 집안의 독특함을 어두운 방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그려낸다.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단편들 전반에 걸친 이현수의 문체는 어둡고 음습하다. 과부, 손의 감각만 발달한 박물관 직원, 새엄마 등 '비일상적인'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소재 또한 평범하지가 않다. 그들이 벌이는 인생사란 지극히 평범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 깊은 슬픔과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살다 보면 이처럼 평범함 속에 온갖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다 나온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동네 아줌마가 어느 날은 '우리 엄마가 새엄마이다 보니 나한테 물건 사주는 걸 많이 아끼셨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식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싶다' 라는 고백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 동생을 잃은 아픔을 담고 살며 또 누군가는 아버지 사업이 흥하다가 갑자기 망해 고생한 얘기를 털어 놓는다.

<태중의 기억>은 평범하게 살아온 한 남자의 기억 끝자락을 언제나 쥐고 있는 '석모'라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겉으로는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에게 아픈 과거가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언제나 2등만 하던 콤플렉스에서 출발한다.

늘 2등이었지만 1등인 석모를 동경하면서 한편으로는 엄청 친하게 지냈던 주인공. 그의 평범한 일상을 뒤집을 만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건 둘이 함께 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물에 빠지게 된 일이다.

주인공이 먼저 빠지고 석모가 그를 구하려 뛰어들어 둘은 서로 손을 잡고 허우적거리며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먼저 손을 놓아 버린 석모. 주인공은 살아나지만 석모는 물에 잠겨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석모가 죽음으로써 주인공에게는 무서운 비난이 떨어진다.

1등이고 똑똑한 석모가 살아야 했는데, 2등인 주인공이 살게 되었다는 비난의 시선은 그의 삶을 내내 얽매어 놓는다. 손을 먼저 놓고 삶을 포기한 건 석모인데 살아서 고통을 모두 감내하며 지내는 건 주인공이다. 억울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의 밧줄은 이렇게 주인공을 늘 묶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미서부의 사막에 간 주인공은 '텀블위즈'라는 식물을 본다. 회전초라고도 불리는 이 식물은 '가을이 되어 뿌리가 마르면 그래도 살겠다고 마른 뿌리에서 떨어져 나온 줄기가 바람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그렇게 사는 주제에 씨까지 퍼트리는 식물'이라고 한다. 주인공은 이 녀석이 꼭 자신과 같다고 생각한다.

삶을 포기한 자와 그렇지 않고 그럭저럭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의 삶을 선택하면서도 전자를 더 멋있게 쳐 준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 때문이리라. 우리 인생은 '텀블위즈'처럼 그럭저럭 굴러다니며 이 황무지에 씨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태중의 기억>의 주인공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은 또 있다.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의 여주인공이 그렇다. 한참 연하인 유정호라는 인물과 연애 중인 은영. 불교박물관의 학예직을 맡고 있는 그녀는 남자친구인 유정호의 가족을 소개 받으며 갈등에 휩싸인다.

남유당이라는 고택을 소유했지만 자신의 집에 대해 냉소적인 역사학도 유정호. 은영의 직업답게 이 둘에 이끌릴 법도 한데 그녀는 이 모두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종갓집 종부로 사는 건 남 보기엔 멋질지 모르나 막상 자신이 하기엔 벅차다는 것이다.

"유정호야, 세상을 살다보면 남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하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도 꽤 생기는 법이란다. 너도 아깝고 집도 아깝지만 어쩌겠냐. 주말마다 전주에 내려와 무수리를 연상시키는 저 괴상한 생활한복을 입고 남유당의 밤떡이나 전수받는 내 모습,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그게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면 보기 좋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보기 좋으라고 인생을 사는 건 아니잖냐."

이런 독백을 끝으로 빠르게 현실감을 회복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은영은 지극히 현실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다. 인간은 누구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상처가 있거나 미스터리한 과거가 있으며 예측불허의 미래를 앞두고 산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을 머릿속에 굴리며 일상을 영위한다.

소설가 이현수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 또한 이런 모습일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적 창작의 나래가 펼쳐져 있는 세상, 책 <장미나무 식기장>의 주인공들이 속한 세계처럼 말이다.


장미나무 식기장 - 제15회 한무숙문학상 수상작

이현수 지음, 문학동네(2009)


#현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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