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시집을 왔지만 일찌감치 청상이 된 키우친씨가 사는 동네 사람들은 오늘도 금송이가 된 송이버섯을 따기 위해 산엘 오르겠지만, 가을에 떠올리는 키우친씨 부부의 삶은 금송이와는 비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이며 아픔이었을 겁니다.
송이의 계절이 되면 떠오르는 베트남인 새댁 사람이 평생을 살다보면 한두 가지 딱한 사정이나 가슴 아픈 사연쯤은 남몰래 가슴에 묻게 될지도 모릅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스럽지 않은 일도 당사자에겐 하늘이 무너질 듯한 고통이며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 보기엔 멀쩡한 삶에도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사자에게는 구구절절하게 딱한 사정이나 가슴 아픈 사연들이라고 하지만 정작 듣고 보면 모든 사연들이 듣는 이를 훌쩍거리게 하거나 가슴을 절절히 아프게 하는 일들만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됐거나 엄살을 부린 그런 사연도 있고, 상대방 처지에서 보면 호강에 겨운 신세타령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2살에 두 아이의 엄마로 청상과부가 된 베트남 새댁두 아이를 둔 아녀자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청상과부가 되어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딱한 사정이나 가슴 아픈 사연쯤으로 묘사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표현이 될지도 모릅니다. 19살에 한국으로 시집을 와 4년전인 22살 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베트남 처녀 키우친씨는 그해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졸지에 청상이 되었습니다.
베트남 처녀 키우친씨는 팔자 한 번 고쳐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19살이란 어린 나이에 고향으로부터 수억만 리 떨어진 충청도 산골마을로 시집을 왔을 겁니다. 낯설고 물선 타국, 말도 통하지 않고 사는 방식도 다른 이국이지만 자신만 열심히 하면 아내로 사랑받고, 며느리로 귀여움 받으며 잘 살 수 있을 거란 야무진 꿈을 가지고 한국인 남편을 따라 입국을 하였습니다.
키우친씨에게 있어 한국인과의 결혼은 남녀 간의 사랑 이전에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빈곤의 탈출구며 멋지게 살 수 있는 희망의 등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꿈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제결혼 알선단체에 한국인과의 결혼을 신청하므로 남편을 만나 산골마을에 신혼살림을 차리게 된 것입니다.
키우친씨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시골이라는 어감을 훌쩍 넘어서는 산골마을입니다. 각박한 인심이 살아가는 방편이 될 수도 있는 도회지보다는 동네사람 모두가 한 가족 같은 산골동네이기에 통하지 않는 말도, 조금은 다른 듯한 외모도 정착하고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키우친씨가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갈 한국인남편은 42살로 그녀보다 곱절이나 나이가 많았지만 도리어 많이 나는 나이 차이는 이해심이 되고 아량이 되어 서툴기만 한 한국판 신혼살림에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키우친씨가 시집온 동네는 첩첩산골 궁촌마을키우친씨가 살고 있는 마을은 지금은 세인의 관심에서 많이 멀어졌거나 희미해진 '산골소녀 영자'의 삶을 떠올리게 할 만큼 첩첩산골인 두메산골 산동네마을입니다. 해발 948m나 되는 가파른 산벼랑 밑에 자리해 있는 동네, 고개를 치켜들어야만 끝이 보이는 산이 마을을 흐르는 계곡 건너에 있는 산동네입니다. 산이 높으니 계곡 또한 그만큼 깊고, 그 깊은 계곡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 보니 한 겨울이면 하루 중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고작 서너 시간 밖에 안 되는 그런 마을입니다.
마을사람들의 주된 수입은 농산물이 아니라 나물이나 버섯과 같은 임산물입니다. 농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곡에 있는 다랑이 논 몇 뙈기와 돌덩이 성글성글 한 비탈 밭이 전부니 동네 사람들은 근거리 산에서 얻을 수 있는 임산물을 채취해 내다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의지하게 됩니다.
봄이 되면 산으로 들어가 돌 서들을 헤집고 야들야들하게 돋아 오르는 봄나물들을 채취합니다. 홑잎 나물이나 다래나무 순, 두릅 순과 같이 맛나고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을 아침저녁으로 뜯어 나릅니다. 그렇게 뜯어온 봄나물들을 손질해 3일과 8일에 서는 읍내 5일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산바람에 잘 말려 묵나물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산나물만을 뜯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적으로 약초를 캐러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나물을 뜯다보면 약초도 캐고, 지네를 잡기도 합니다. 산속에 사는 그들만이 맛볼 수 있는 별미는 정말 싱싱한 새순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새순의 맛은 정말 일품이라고 합니다. 봄 향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물 싹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보면 거기서 배어나오는 달착지근하고도 상큼한 맛에 산골생활의 고단함을 깡그리 잊을 수 있다고 합니다.
토종음식을 맛 볼 수 있는 산골 작은 식당 키우친씨 부부는 산골마을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손님이라고 해야 여름 한철 피서객들이 대부분이지만 가까운 동네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는 단골들입니다.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요리솜씨가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요즘엔 시골에서도 먹기 힘든, 정말 토종음식을 먹기 위해 몇 십 리쯤 떨어진 동구 밖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키우친씨네 식당에서는 산에서 뜯거나 캐낸 산나물, 집 뒤 산에서 키운 닭이나 염소로만 음식을 만든다는 걸 이웃동네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니 농사를 짓는 시골사람들도 정작 토종, 토속음식을 먹으려면 키우친씨네 집을 찾아옵니다.
여름이면 키우친씨 부부는 계곡을 찾아오는 피서객들을 상대로 토속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산비탈에 놔길러 반쯤은 산닭이 되어버린 토종닭에 엄나무와 이런저런 산나물들을 듬뿍 넣어 푹 고아 만든 백숙을 내다 팝니다. 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은 맛이 깔끔하고 담백하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습니다.
산골마을에는 가을바람도 일찍 불어옵니다. 더위의 끝자락이 남아있지만 조석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이 되면 산골마을의 하루는 한층 일찍 시작됩니다.
키우친씨네 동네사람들의 생계수단인 송이버섯 일 년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버섯을 따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니 사람들 또한 부지런해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새벽같이 집을 나섭니다. 바랑에 점심 끼니를 때울 밥 한 덩어리와 된장이나 고추장쯤을 집어넣고 불어오는 산바람을 거슬러 산으로 산으로 버섯을 찾아 발길들을 옮깁니다. 산에서 나는 버섯이란 게 먼저 보고 먼저 따는 사람이 임자니 좀 더 일찍, 좀 더 빠르게 찾아나서야 한 겨울을 먹고 살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버섯을 찾아다니다 보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카락이 삐죽 서도록 간담이 서늘해지는 그런 일들을 겪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합니다.
인기척에 놀란 산짐승이 후다닥거리며 도망가는 소리에도 놀라고, 발을 헛디뎌 비탈길에 미끄러질 때는 산세의 험준함을 알기에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한답니다.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나 잡아봐라 하며 약이라도 올리는 듯 삐죽하게 얼굴 내밀고 있는 송이를 발견하면 많이 갈등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냥 지나치자니 너무 아깝고, 다가가 따자니 너무 위험하고..... 그럴 때는 거의 동물적 본능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힘들지 않게 휘적휘적 산길을 오르는 듯싶겠지만 매일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도 남들만큼이나 힘이 든다고 합니다. 다만 나름대로 터득한 지혜가 있다면 절대 서두르거나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채워지는 바랑은 점점 어깨를 짓누르고,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가슴을 옥죄어와 통증으로 다가온다고 합니다. 팽팽하게 당기던 뒷다리에는 알이 배거나 쥐가 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전기보다 간첩신고용 전화가 먼저 들어온 동네이른 새벽부터 바짓가랑이에 이슬을 묻혀가며 반나절쯤 돌아다니다 보면 허기가 찾아옵니다. 바랑 속에 있던 밥덩이와 된장을 꺼내 갓 따낸 버섯이나 약초뿌리를 반찬삼아 허기진 배를 채워줍니다. 된장을 꾹꾹 찍어 먹는 싱싱한 버섯에서는 돈으론 살 수 없는 향과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우러납니다. 이따금은 식사를 마치고 노랫말에 나오듯 머루나 다래를 따서 먹는 경우도 있으니 이보다 더한 후식은 없을 거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산모퉁이를 따라 차 한대 들락거릴 만큼의 포장도로라도 생겼지만 그 옛날 필자가 초등학생 시절 소풍을 다닐 때는 물을 건너고 고개를 넘어야 하는 오솔길 같은 소로로 한 시간 반쯤은 걸어야 하는 오지였습니다. 반공과 승공이란 말이 학교교문을 장식하고 있었던 그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밝히며 살았지만 전화기만은 먼저 설치되었던 곳이 그곳입니다. 워낙 산골이다 보니 혹시라도 나타날지 모를 간첩을 신고하라고 다른 동네에 우선하여 딱 한 대, 동네 이장네 집에 전화기가 설치되었던 그런 곳입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았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났지만 키우친씨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 신혼, 한국물정에 서툴기만 한 아내를 위해 손짓몸짓 아끼지 않으며 새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과 도리를 설명하고 일러주었습니다. 부부들만의 세계적 공통어인 사랑으로 통하지 않는 언어와 낯설기만 한 한국생활을 이심전심으로 하나하나 익혀나가니 얼마의 시간이 흘러 키우친씨의 한국 생활은 가족은 물론 동네사람들과도 어울릴 만큼 익숙해졌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대외적으로 어엿한 부부임을 밝혀주는 아이들이 태어나며 그들의 삶도 여느 가정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는 있었지만 식구가 단촐 해 적막하기만 했던 산골마을, 마흔의 나이에도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어야 했던 완수씨에게 간간이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는 살아있는 흔적이며 살아가는 활기였습니다.
청천벽력처럼 찾아온 남편의 사형선고힘들게 산비탈을 올라도, 어렵게 벼랑길을 타며 버섯 하나를 딸 때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떠올리면 조금도 피곤하지 않던 완수씨가 어느 날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메스껍기조차 하더니 심지어 통증까지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원체 건강했던 그였기에 모처럼 면소재지에라도 나갔다 증상이 도져 사람들에게 통증을 호소하면 주변 사람들은 '버섯을 너무 많이 먹어 그럴지도 모른다'는 농담으로 가볍게 받아넘기곤 하였습니다. 횟수가 잦아지고 참을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을 때야 완수씨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보호자 없이 혼자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남은 생이 2, 3개월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사형언도라도 내리듯 당사자에게 진단결과로 설명해 주었답니다.
의사로부터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고작 100일도 안 될 거라는 사실을 통보받은 완수씨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나물을 뜯고, 버섯 따서 티끌처럼 모아온 산골짜기 집 한 채 만큼은 가족들에게 지켜주고 떠나겠다고 작정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쉬 건질 수 없는 자기 목숨에 미련을 가졌다가는 혈육으로 남긴 자식과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는 베트남인 아내를 빈털터리로 만들거나 빚더미에 올려놓게 될 거라는 생각에 절대로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모양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병세가 알려지면서 주변사람들은 체면치레라도 하듯 한결 같이 입원할 것을 권했지만 이미 한 결심, 비록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이지만 자식과 아내가 살아갈 최소한의 울타리가 되고 밑천이 될 집 한 채 만큼은 어떻게라도 지켜주고 싶은 완수씨의 마음은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그라지는 촛불처럼 정말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아서야 완수씨는 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루하루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버티려 했던 육체적 고통,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겠지만 살아남은 사람들, 사랑하는 아내와 홀어머니에게 '병원 한 번 못가보고 죽게 하였다'는 통한의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아 입원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홀아비의 마음으로 도와주면 좋겠습니다키우친에게 있어 인생의 동반자, 유일하게 그녀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었던 남편은 아내의 곁을 떠나며 두 아이가 딸린 청상이라는 멍에만을 남겼을 뿐입니다. 키우친씨가 보낸 지난 4년의 세월은 눈물의 세월이었을 겁니다. 사랑했던 남편이기에 보고 싶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 떠나보내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불쌍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사랑의 결과물로 남겨진 두 딸, 피를 토하듯 잘 키워달라며 두 딸을 부탁하던 그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고, 유언으로 남긴 두 딸을 잘 키워 가는 게 쉽지 않을 듯하니 더럭 겁부터 났을지도 모릅니다. 암담한 현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22살의 청상이라는 아픔보다 더 큰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청상으로 산다는 게 어려울 것 같아 시댁식구들도 베트남으로 돌아가 팔자를 고치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키우친씨는 가을이면 송이버섯을 따 나르던 남편을 추억하며 '과부'로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형사취수(兄死娶嫂)를 들먹이며 마흔이 다된 시동생, 아직 미혼이었던 시동생과의 살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키우친씨는 그러지 않고 지난 4월에는 베트남에 있는 동생을 불러들여 시동생과 결혼시켰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태생이야 어쩔 수 없으니 이방인의 흔적이지만 한국인의 아내가 되었던 키우친씨는 아이들의 어머니, 한국 할머니의 며느리가 되어 하루 한 날을 옴팡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트남 처녀가 한국으로 시집 와 22살이라는 어린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나 졸지에 청상이 되니 살아갈 일이 암담하고 캄캄해지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과부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홀아비가 된 마음으로 청상과부로 살아가고 있는 26살 베트남새댁의 사정을 이해하고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이 많이 길지만 홀아비의 마음으로 읽어 주면 지루하지는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