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통치약 정치에 속지 마라
<더 플랜>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케네디 대통령이 국민에게 했던 선언에 담겨 있다.
"국가가 무엇을 해줄 것을 바라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라"
이 선언은 책 한 권을 다 담을 만큼 크고도 명확한 개념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내 영혼의 주인인 실존을 찾으라는 주문이다. 직접 품을 들여 찾은 보금자리나 수고를 무릅쓰고 일궈낸 작은 가치들의 주인은 누구인가? 당연히 수고를 무릅쓴 사람이다.
국가 경영이나 상품 소비도 마찬가지다. 동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관객으로 살다 그렇게 죽을 뿐이다. 이것을 정치에 적용해 보면, 동참하지 않는 정치는 '만병통치약 정치'를 낳을 뿐이다.
만병통치약이란 쓰기만 하면 감기도 낫고 배앓이도 낫고 심지어 불치병 환자도 씻은 듯이 낫는다고 한다. 아무런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병원에 갈 필요도 없다. 그냥 뚜껑을 열고 한 알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 말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거짓말에 자꾸 속는가. 그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가족이 현재 암 말기나 불치병에 걸려 희망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만병통치약에 혹하기 마련이다. 또는 매우 오랫동안 만병통치약에 속아 계속 복용해 와서 단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면 만병통치약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만병통치약은 그 말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모든 병은 사연이 있다. 심지어 마음의 병조차도 연원이 있고 오랫동안 관찰해 연구한 의사들에 의해 신중하게 치료된다. 어떤 치료법이나 치료약도 부작용 등 위험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처방시 반드시 의사, 약사가 개입하고, 혹시 모를 부작용에 대해 경고한다. 30년간 병원생활을 단골로 한 경험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만병통치약은 모든 병이 이 약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말과 같다. 이것은 약은 물론 병에 대해서까지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낼 뿐이다.
만병통치가 횡행하는 사회는 이미 병이 깊다는 말인데, 오늘날 우리 현실정치만큼 만병통치가 기승을 부린 적은 없었다. 표만 주면 땅값을 몇 배로 부풀려주고(뉴타운 공약) 표만 주면 주가를 5000 이상 끌어올린다거나 경제지표를 747 빛으로 도금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만병통치약 정치의 으뜸은 4대강 사업이다. 이것만 하면 치수로 인한 농지개간, 환경보호, 환경재해 대비, 일자리 창출, 경제성장 등등 못하는 게 없다. 4대강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국민이 참여할 여지는 없다. 그저 돈만 내고 구경만 하면 된다. 가끔 삽이나 몇 번 들어주면 이명박 대통령이 집도 주고 쌀도 주고 홍수도 막아준단다. 사실상 생명줄인 생계유지비 등 복지예산, 경제 인프라 구축을 위한 SOC 예산 등 수조원을 빼앗기는 수고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국민이 할애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빼앗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감시할 야당 역시 만병통치약 정치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공화당은 지난 30년간 다소 비슷한 정치적 틀에 갇혀 있어 왔다. 공화당은 사실 포지티브한 아젠다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 민주당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선거에서 이겼다. 하지만 근년에 민주당은 설득력 있고 이기는 전략을 너무 자주 무시했고, 대신에 공화당의 게임의 룰 하에서 그들을 이기려고 애썼다. (<더 플랜> 43쪽)
전국민복무제는 그리스 민주주의의 성공 비결이다
미국 민주당처럼 한국의 민주당도 국민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주겠다는 선심성 발언뿐이다. 한국의 공당들은 너나 할것 없이 이미 온전한 정치세력이 아니라 서비스회사로 전락했다. 민주주의가 그나마 숨쉬었다고 평가되던 김대중 정부를 떠올린다면 만병통치약 정치가 얼마나 극심해졌는지 알 수 있다.
올 한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취임사 일부)
그러나 만병통치약 정치의 한계는 분명하다. 짧은 유통기한을 연장시키기 위해 착시현상을 계속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미디어 장악으로 나타난다. 끊임없는 감시와 공포분위기 조성도 주된 특징이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과 검찰 공안부 강화, 공안사범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등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이 바로 이와 같다. 이렇게 이성을 마비시키고 극소수만이 특혜를 나눠갖는 정치행태는 미국과 한국 등 극우 국가의 공통된 현상이다. <더 플랜>의 저자들은 시민들이 방관자로 있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그러면 어떤 대안을 제시할까? 저자들은 시민 개개인이 소중한 것을 할애함으로써 책임을 공유하고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 구체적인 모델로 존 케네디의 평화봉사단과 유사한 형태의 <전국민 복무제>를 제안한다. 이는 국민 개병제보다는 넓은 개념이다. 이 제안은 국방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국민이 국가의 일을 전국민이 조금씩 부담함으로써 방관자를 줄이고 참여자를 늘리는 방법이다.
옛날 그리스 시대에 전국의 남성들이 전쟁에 참여했던 선례를 따르고 있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은 참여인데, 그 참여는 전장에서 피를 뿌린 가운데 달성될 수 있었다. 귀족과 원로에서 1명의 호민관, 노동자 계층에서 1명의 호민관이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라는 국가 대사를 만인이 함께 부담했기에 가능했다. 자기 의무에 대해 피를 바치고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발언권이 강화되고 권리와 책임이 존중받을 수 있었다. 저자들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하다.
촛불 집회 이후로 시민들은 소비자로서 머물지 않고 직접 현장에서 이슈에 참여함으로써 주인이 되고 있다. 자원봉사를 자청하고 언론, 시민운동을 주도하며 시민운동과 언론환경 자체를 바꿔가고 있다.<더 플랜>의 저자들이 내세운 제안과 요구조건이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단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지 않았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