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나무들이 어느새 울긋불긋 곱게 단풍이 들었네요. 가을 하면 떠올리는 게 하나 있지요. 어릴 적 운동회가 생각납니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운동장 한가득 아이들이 모여서 맘껏 뛰놀며 달리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공차기, 오자미던지기, 발묶어달리기 따위가 생각납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얼굴엔 즐거운 웃음이 가득하지요. 나이 들어서는 좀처럼 이런 운동회 구경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지난주(18일)에는 아주 남다른 운동회 구경을 했답니다. 그것도 어린아이가 아닌 다 큰(?) 어른들이 모여서 뛰노는 운동회 말이지요.
우리 부부가 활동하고 있는 '77밴드'에 단원들 덕분에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지요. 바로 '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가 열렸답니다. 벌써 15회째 되는 행사인데, 우리 77밴드 단원들은 모두 20기 동기생들이랍니다. 구미전자공고는 나라에서 세운 국립고등학교라는 것도 이날 처음 알았네요.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벌써 많은 이들이 한데 어울려 한쪽에서는 축구를 하고 또 한쪽에서는 배구도 하면서 예선경기를 펼치고 있었어요. 기수마다 천막이 쳐있고 곳곳마다 넘치는 사람과 먹을거리들이 가득 차려있어 운동회라기보다는 잔치 분위기가 더욱 나더군요. 전국 곳곳에서 학창시절 동무들을 만나러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그 열정도 매우 남달랐습니다.
교단 앞에는 행사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저마다 바쁘고 운동장 곳곳에 걸어놓은 펼침막이 잔치 분위기를 훨씬 더 돋우었답니다. 품바 각설이패가 나와서 북과 장구를 치면서 흥을 돋우고, 이 학교 후배들인 밴드부 학생들도 선배들의 운동회를 음악으로 봉사하려고 연습이 한창입니다.
선후배들이 한데 어울려 지난날, 학창시절로 돌아가 운동장을 누비며 맘껏 뛰노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신이 납니다. 어느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중년나이가 든 어른들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어릴 적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있는 듯했어요.
곧 개회식이 시작되고 여러 기수 동창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저마다 자기 삶터에서 부지런히 일구고 살아온 열매가 매우 알차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더군요. 선배들이 그 자리에서 모금을 하여 재학생들한테 장학금으로 내어주는 모습도 보았어요.
여러 가지 경기를 할 때에도 몸을 사리는 이 하나 없이 무척 힘차게 뛰어다닙니다. 중년 아저씨들 배도 나오고 몸이 굳었다지만, 어쩜 그리도 잘 뛰어다니는지 보는 이도 놀라울 만큼 젊음이 느껴집니다. 예선을 거쳐 결승까지 오른 이들은 벌써 몇 번씩이나 치룬 경기였지만 누구 하나도 지친 표정은 읽을 수 없습니다. 또 응원하는 재미도 남달랐는데,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한껏 흥을 돋울 때에는 어찌나 신이 나는지 응원에 힘입어 틀림없이 이길 것 같더라고요.
갖가지 경기가 끝난 뒤에는 마지막으로 총동창회 노래자랑을 했는데, 우리 77밴드가 선생님으로 모시는 '김충수 악단'이 행사를 이끌었답니다. 가장 재미난 시간이었는데, 저마다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춤과 곁들여 한판 멋들어지게 노래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우스꽝스런 차림을 하고 무대로 뛰어 나와 마구 춤을 추며 흔드는 이들이 있었어요. 바로 우리 단원들 기수인 20기였는데, 모형으로 만든 가슴과 엉덩이를 드러낸 재미난 옷을 덧입고 어찌나 춤을 잘 추던지 금세 웃음바다로 바뀌었답니다. 노래 솜씨도 좋았지만 덕분에 인기상을 받기도 했지요.
함께 배우고 학창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이 한데 어울려 즐겁게 뛰며 노는 걸 보니, 이런 자리에 처음 와본 우리들도 덩달아 신이 납니다. 우리 부부 만큼은 이날 이 자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손님일 뿐이었지만,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흥에 겨워 즐겁네요. 우리도 이다음에 나이가 더 든 뒤에도 이런 모습으로 옛 동무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부럽기까지 했답니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날, 학창시절 동무들과 선후배들이 한데 어울려 신나게 뛰놀고 맘껏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