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완전 자유인이 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말은 제법 그럴싸해보이만 마음은 결코 자유롭지가 못하다. 시간은 유수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해놓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자유는 또 다른 마음의 구속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청년백수가 늘어나고 고용안정의 불안으로 장기실업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사람속에 오가는 나눔의 시대가 퇴색해지고 사람곁에 가기가 무서운 신종 플루의 전염병으로 점점 더 무한개인의 사회로 분열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나는 결코 나 혼자의 고립과 소외가 아닌 동병상련의 억지 아픔으로써 스스로를 애써 자위하려고 노력한다.
여느 때 같으면 아침 8시에 눈꼽을 떼고 괴기스럽고 섬뜩한 꿈 속에서 광기어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던 냄새나는 입안을 소독하느라 화장실로 먼저 달려가 이를 닦고 충혈된 눈을 말끔히 세척했을 터인데, 요즘 나는 아침까지 꿈의 연속선상에 있느라 좀처럼 눈을 뜨질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일찍 일어나 아무데도 갈 곳 없는 내 처량한 신세를 잠으로나마 위로해주려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올리고 침침해진 눈으로 티비를 먼저 켠다. 정오가 다 된 시간이라 뉴스 소식이 먼저 귀를 울린다. '신종 플루 사망자가 2명 더 늘어나...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직장 마저 문을 닫는 사례가 속출하고...매서운 한파가 갑자기 몰아닥쳐 바깥 출입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이...' 온통 신종 플루에 관한 어두운 소식만 들려 온다.
배가 고파온다. 허기진 배를 달래보고자 라면을 찾다가 술로 아린 속을 달래보고자 밥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여 속을 든든히 채워본다. 주섬주섬 가방을 메고 갈 곳을 찾는다. 오늘은 어디에 가서 또 하루의 시간을 달래보려나.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려고 머리를 굴려보지만 결국 생각해 낸 곳이 구립 도서관이다. 허기진 배를 채웠으니 텅 비어있는 머리라도 채울 생각에..
늦깎이 공부를 다시 하고 있는 탓에 시험준비도 할 겸 전공서적을 꺼내 기출문제를 훏어본다. 2시간이 지났을까. 이것 또한 따분하다는 마음에 도서관 2층에 있는 학습열람실로 향한다. 이것저것 다양한 종류의 책을 들추다가 유독 내 눈에 들어오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 "위대한 패배자...2006년 문화관광부 교양도서로 선정된..."
요즘 나의 심경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현실속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만 죽이고 있는 나를 가끔 패배자(loser or failure)로 여기며 심한 자괴감에 허우적대고 있는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기라도 하는 듯 안성맞춤의 책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패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책 표지가 정말 특이하다. 마치 19세기 독일 서적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고서적 냄새가 눈을 뒤덮었다. 'WOLF SCHNEIDER...GROSSE VERLIERER'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표지를 보고나서 독일어 원서인줄 알았었는데 바로 한 장을 넘겨보니 깨알같은 글씨로 서문과 함께 목차가 눈에 들어왔다.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최근에 읽어보았던 책중에서 가장 독특한 스타일에 내용 또한 만만치 않아 보였던, 역사속 영웅들과 영웅을 떠받쳤던 낭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수집하여 흥미진진하게 엮어놓은 이 책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책을 번역한 박종대 작가는 "거머쥘 월계관은 하나인데, 그것을 향한 사람들의 수와 욕망은 점점 늘어가고 경쟁의 효율성만이 사회발전의 논리로 부각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승리자가 야비한 술수를 써서 승리를 따냈더라도 그에 대한 비난은 일시적이거나 결국 '마지막에 이긴 놈이 최고'라는 식의 결과론적 논리에 묻혀 버린다"며 과정보다 결과가 중시되고 좋은 승자와 나쁜 패자의 틀의 전형적인 논리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또한 박 작가는 "과연 승리자는 항상 우리가 본받을 만한 '좋은'사람들일까? 걸출한 능력과 뚜렷한 업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 승리자들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패자에 비해 좀더 야비하고 비정한 사람들이 승자들이다"며 2000년 대선에서 패한 앨 고어와 부시의 경우를 비교하며 득표에서 이기고도 승부의 집착에서 벗어나 양보를 택한 앨 고어와 선거 방식의 비합리성과 부정 의혹이 있었음에도 도덕적 정당성을 위해 재선거를 주장하지 않았던 부시의 비양심적 행동을 질타하면서 승패의 진정성을 가늠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꿈꾸고 남보다 높은 곳에 오르기를 희망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모두 남보다 위에 있으며 성공할 확률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다수의 패배속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몇 사람의 성공아래서 패배를 인정하며 그들의 비호아래 삶을 연명하고 있을 것이다.
박 작가는 '승자만이 존재하고 독식하며 살아가는 사회보다 더욱 추악한 사회는 없다'며 패배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분수를 알고 제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 즉 허풍을 떨고 미련을 남기며 큰 소리치는 위정자보다는 참고 견디며 작은 희망을 쏘아 올리는 진정 위대한 패배자인 우리가 있기에 세상은 정녕 아름다울 수 있지 않냐고 되묻고 있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패배자다.
어렸을 적 읽었던 '꼴찌에게 희망을'이라는 시집을 떠올리면서 이 책은 그저 그런 패배자와 낙오자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옮긴이의 서평과 작가의 서문을 읽으면서 어느 한 계층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아포리즘(aphorism)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패배자들을 좋아한다.
장애인, 외국인, 뚱뚱해서 놀림을 받는 친구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누구도 춤을 추려고 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 페터 회...
이 책의 저자인 볼프 슈나이더는 "예나 지금이나 100미터 올림픽 육상경기에는 세 개의 메달만 걸려 있다. 하지만 지금은 1896년 당시보다 무려 50배나 많은 선수들이 이 메달을 차지하기 위해 달린다. 각 나라의 인구도 19세기보다 평균 5배가 늘고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는 고학력층도 100배나 불었지만 어디서도 대통령을 다섯이나 백 명을 뽑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며 승패의 논리로 인해 고통스러워할 필요 없는 인간 세상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리로 패배를 당당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며 "이 책은 마지막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선 인상적인 패배자도 있고, 끝까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자신의 비운을 인정하지 않은 나쁜 패배자도 있으며, 권력에 빌붙거나 경쟁자의 뒤통수를 칠 정도로 비열하지 않았기에 패배했고, 그래서 절망하지 않은 훌륭한 패배자들도 있다"며 좋은 패배자로 남으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좋은 패배자란 느긋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즐겁게 웃지만 승리자들은 음흉하게 웃는다."
비참한 패배자들과 영광스러운 패배자들
책은 권력과 명성을 거머쥔 황제에 오른 사람들마저도 패배자로 분류하며 오로지 성공과 부귀는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못했던 그들을 비판하였고, 비록 죽임을 당하고 결과에는 졌지만 원칙과 소신으로 자기의 역할을 다한 패배자들을 영광스럽다고까지 표현하며 역사속 영웅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어나간다.
'실패야말로 신인 인간에게 허용한 진정한 자유이고,
죽임이야말로 인강의 가장 훌륭한 행위이다.
나는 삶을 떨쳐버릴 수 없는 습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체 게바라.
쿠바의 의학자이자, 문학자이자,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를 영광스러운 패배자로 분류하였다. 그는 살아있을 때보다 죽음으로써 그 이름의 값어치는 오히려 진정성이 더해졌고 역사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는 것은 헌신적으로 민중을 위해 싸웠던 용감한 전사였기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앨 고어 부통령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위선자 부시에게 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로 언급하고 있다.
부시는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537표라는 전대미문의 득표차이로 당선의 승리를 낚아챘지만 미연방대법원에서 부시의 손을 들어 준 한 판사의 표에 의해 커다란 음모가 씌어져 결정되어진 것이다. 이는 미국 선거제도의 이상한 메커니즘을 반영시켜준 것이다.
유권자가 아닌 주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방식에서 재검표로 결정되는 순간을 법원 판사의 음모에 의해 중단되어져 역사상 유례없는 대선 사기극이 펼쳐졌던 것이다.
부시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하며 표결에서 졌던 한 판사는 이렇게 언급하였다고 전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선거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패배자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당파를 초월해서 법을 지켜야 할 법관들에 대해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이 바로 그 패배자다."
책은 이외에도 '왕좌에서 쫓겨난 패배자들,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몰린 패배자들, 끝없이 추락한 패배자들, 더 큰 영광의 시간을 박탈당한 패배자들, 살아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 위대한 패배자들,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인생들...'의 인생역정을 보여주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패배자들에게 촌철살인 같은 메시지를 전해준다.
안티히어로를 위한 예찬-그나마 삶을 참은 만하게 만드는 것은 패배자들이다.
이 책의 저자인 볼프 슈나이더는 후기 글 '안티히어로를 위한 예찬'을 통해 착한 패배자의 성품의 고귀함과 지나친 순수함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착한 패배자는 대개 지루하다! 테니스 경기를 해도 상대를 완전히 눌러 버리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한가하게 바람이나 쐬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경쟁심없이 오로지 자기만족에 위안을 삼으며 세상과 괴리된 채 살고자 하는 착한 패배자들의 삶도 혼자만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당한 패배를 위해 당당하게 행동하라는 말이다.
"모든 패배 속에 승리가 숨어 있다.
패배가 승리의 밑거름이라는 뜻이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CEO라고 칭송을 받은 포드 자동차의 헨리 포드 회장의 철학적 신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는 39살에 두 번의 도산으로 완전히 망한 다음에도 "실패는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준다. 그것도 좀더 영리하게 출발할 기회를"이라는 말로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아는 반전의 계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공과 패배를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험하며 두 번 다시 패배의 덫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승승장구하며 권력과 명예를 뒤쫓으며 정신없이 보내는 성공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 뒤에서 인생의 쓴 맛만을 골라 느끼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패배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성공과 패배의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세상 사람들을 모두 패배자로 통일시키며 최후의 순간까지 의연함과 품위를 잃지 않은 위대한 패배자인 당신을 응원하며 쓰러져도 포기하지 않는 아름다운 패배를 도전의 기회로 삼으라고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패배자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좋은 패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온갖 위선과 아첨으로 권력을 잡으며 기만과 술수로 성공이라는 키워드를 잡은 위정자들의 음흉한 웃음을 보며 영원한 패배를 할 것인가, 아님 많이 더디가더라도 원칙과 소신을 갖고 강직하고 의연한 성품으로 담대한 희망을 바라보며 사랑스러운 웃음을 활짝 피우는 아름다운 패배자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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