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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들이 지금 뭘 하는 걸까, 의아한...
이 사람들이 지금 뭘 하는 걸까, 의아한... ⓒ 김수복

 

촛불 점화도 불가능, 두 시간 승차도 불가능... 어머니 결혼 참석 어떡하지

 

어머니가 막내아들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면 이런 참신한 아이디어는 아마 발동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전화위복이라고, 이렇게 애써 위안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결혼식이 일주일여 앞으로 다가왔을 때부터 몇 가지 실험을 해 보았었다. 어머니 키보다 살짝 높은 가지에 매달린 감을 따보게도 하고, 무슨 크게 볼 일도 없이 광주와 영광을 다녀오게도 했다. 그 결과 어머니의 고유 임무이자 권리인 촛불 점화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고, 두 시간 이상 차를 타거나 운동을 해서는 저녁에 경기를 일으키는 등 잠자리가 괴로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예식장이 있는 목포까지는 시내를 통과하는 시간까지 적어도 왕복 세 시간은 잡아야 했다. 공기도 썩 좋지 못한 건물 내에서 또 두 시간여를 머물러야 한다. 젊고 팔팔한 사람도 예식장을 풀코스로 돌고 나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판에 어머니에게 그런 중노동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누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조차 올곧게 알지 못하는 어머니였다.

 

친척들은 다른 사람도 아닌 막내 결혼식인데 살아 계신 어머니가 불참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야단들이었지만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나 살래살래 흔드는 방식으로 내 생각을 밀고 나갔다. 내심으로는 결혼식을 마치고 막내 부부가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렸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어서 이틀 전날 예비 제수씨에게 전화로 어머니는 참석하실 수 없다는 얘기나 전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이심전심인지. 식장에서 만난 막내아우에게 일정을 물어보니 예식 끝나고 잠깐 어디에 들렀다가 바로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이란다. 그럼 신혼여행은? 색시가 좋다고 하겠어?

 

"신혼여행은 뭐, 하여튼 그렇게 하기로 합의 다 됐어요."

"그럴 필요 없어. 오지 마."

"일정을 이미 그렇게 짰는데 그것을 풀 수는 없어요. 그리고 저는 군인인데 군인이 오늘로 벌써 나흘째 밖에 나와 있는 것이니까, 신혼여행은 어차피 하루 이상은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럼 더욱더 안 되지. 오지 마. 그냥 너희들끼리 놀다가 가."

"아니에요. 갈 거예요."

 

일단 결정을 내리면 여간해서 번복하지 않는 것이 우리 형제들의 공통점이었다. 좋게 말하면 소신주의에 속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융통성이 절벽인, 한 시간이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굶어죽기 똑 십상인 옹고집쟁이들이었다.

 

 막내아들과 그 색시가 어머니를 부축하는데, 손자는 신기해서 웃어댄다.
막내아들과 그 색시가 어머니를 부축하는데, 손자는 신기해서 웃어댄다. ⓒ 김수복

 

 누구시오? 저 막내며느리예요. 응?
누구시오? 저 막내며느리예요. 응? ⓒ 김수복

아무튼 이렇게 해서 어머니는 막내아들 부부의 절을 받는 것으로 예약이 되었고, 우리는 갑자기 정신 못 차리게 바빠졌다. 식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한숨 돌릴 새도 없이 한쪽에서는 어머니에게 한복을 챙겨 입혀드리느라 부산을 피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상을 보면서 상 위에 백지를 깔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는 등 요란스러운데 당숙을 비롯 마을 어른들이 들어오시면서 분위기는 점입가경, 예정에 없던 잔치집이 되어갔다.

 

"아이고, 엄마가 시집 가도 되겠네."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 그러자 어머니는 그 소란스런 와중에도 그 소리는 어떻게 정확히 알아듣고 "보내주믄 못 갈까" 하신다. 그리고는 이어서 마치 당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주입이라도 시키듯이 "소개시켜 줘봐" 하신다. 막내아들이 왜 와 있는지, 당신이 왜 한복을 입어야 하는지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저 순한 아이처럼 하라는 대로만 하고 있던 어머니가 어떻게 그 소리는 그렇게도 정확하게 해석하고 반응할 수 있는지, 우리는 신기해서 웃고 어이없어서 웃고, 세상에는 온통 웃을 일만 있다는 듯 마음껏 웃어대고 있는데 당숙께서 한 말씀 하신다.

 

"아따 느그덜도 참, 웃을 일만은 아니다, 야."

 

 내려가시게요. 이제 절 받으셔야지요.
내려가시게요. 이제 절 받으셔야지요. ⓒ 김수복

 

 시집가도 되겠다는 말에 웃음이 터지는데...
시집가도 되겠다는 말에 웃음이 터지는데... ⓒ 김수복

열세살에 결혼한 어머니, 인생은 외로움과의 투쟁

 

당숙이 옆에서 그렇게 한 말씀 거들지만 않았다면 그 문제는 그야말로 우스갯소리 정도로 묻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는 느낌이었다. 당숙모 돌아가시고 오 년, 한동안은 풀이 죽어 금방 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지만, 어디 무슨 모임을 나갔다가 알게 된 여인과 연애를 시작하신 뒤로 당숙은 얼굴에 살이 붙고 목소리도 쩡쩡해졌으며, 맥고모자에 양복을 챙겨 입는 등 갈수록 근사한 노신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행동거지는 또 어떤가. 연세 여든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꼿꼿하고 민첩해서 걸을 때는 젊은이들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어머니도? 그래,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가만히 돌아보면 열세 살에 결혼한 어머니의 삶은 외로움과의 투쟁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는 군대를 기피할 목적으로 낳지도 않은 아이를 낳았다고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출생신고를 하는 등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은 잡혀가다시피 입대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토록 기피하고자 했던 군대를 아버지는 남들처럼 삼 년 복무로 끝내지 않고 부사관으로 나아갔다. 해보니 군대가 썩 체질에 맞더라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가 재정이 형편없었던 까닭에 부사관이라 해도 월급이란 것이 지금의 사병 수준이었고, 부부가 얼굴 마주하고 살아갈 만한 공간을 따로 갖는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꿈에서나 가능한 그 일을 위해 어머니는 마침내 투쟁을 선언하게 되는데, 내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머니가 선택한 무기는 인간의 모든 지혜와 감성이 집약된 눈물, 바로 그것이었다. 물은 바위를 뚫지만 바위는 물을 어쩌지 못한다고 했던가. 일 년에 한두 차례 휴가를 나올 때마다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하소연하는 어머니의 눈물 앞에 바위처럼 단단한 아버지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는 얘기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눈물로써 국가에 볼모처럼 잡혀 있는 당신의 남편을 탈환해 왔다. 그러면 그때부터 줄곧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을까. 아니었다. 가까스로 남편을 돌려받은 어머니에게는 그때부터가 시련의 시작이었다.

 

 예정에 없었던 자리. 색시가 지금 4개월 된 아이와 함께 다니는 중이라는데, 식장에서 사회자의 재치문답을 통해 밝혀졌다.
예정에 없었던 자리. 색시가 지금 4개월 된 아이와 함께 다니는 중이라는데, 식장에서 사회자의 재치문답을 통해 밝혀졌다. ⓒ 김수복

농촌생활이 체질에 안맞던 아버지, 온 몸으로 집을 지킨 어머니

 

제대를 해서도 군대가 당신의 체질에 맞는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어머니를 원망하고 나섰다. 세월이 흘러 당신의 군대 동기들이 파출소 소장이라든가 면장 등으로 발령받는 것을 보게 되면서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폭력성을 띠기 시작했다. 밥상을 걷어차며 "여편네가 멍청해서 서방 앞길을 막았다"는 둥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의 어이없는 폭력을 우리 형제들은 사나흘에 한 번씩은 겪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정치의 정자에조차 관심이 없으면서도 군출신들이 득세하는 우리 현대정치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었던 셈이다.

 

농촌에 살면서도 땅도 별로 없는 농사꾼 노릇은 도대체가 당신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마을 이장을 십오 년 동안이나 장기집권했을 정도로 아버지는 집에서 조근조근 일을 하기보다 밖에서 공무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집안일은 자연스럽게 온통 어머니의 차지가 되었고, 어머니는 눈물로 남편을 빼내올 때 이미 결심이라도 했었던 듯 이웃집 누구네 엄마처럼 밤보따리를 싸서 나가버리지 않고 온 몸으로 치러냈다.

 

신기하리만치 아버지는 노름 같은 것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또한 신기하게도 노름꾼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떼이거나 보증을 섰다가 논밭을 빼앗기는 일은 선수처럼 잘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이제 벌써 십일 년, 그동안 자식들은 어찌 그리 한 번도, 단 한 번도 어머니 옆에 다른 남자가 있는 그림을 그려보지 못했던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신기한 일도 없지 싶다.

 

이런 생각을 좀 더 일찍 했었더라면, 치매 따위가 감히 어머니를 넘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스럽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하는 위로도 생기고 하는데 아무튼 이제 좀 바빠질 것 같다. 어머니의 애인 될 만한 남자를 찾아본다, 음, 이 사업은 누가 뭐래든 신나게 바쁜 일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머니#결혼식#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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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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