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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연극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엄마와 아들이었다. 지난 번에 본 연극 <친정엄마와 2박 3일>은 엄마와 딸 이야기였다. 거기다가 지난 번에는 암에 걸린 쪽이 딸이었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엄마와 자식 둘 중에 어느 쪽이 병에 걸렸든, 엄마와 짝을 이룬 주인공이 아들이든 딸이든, 중요한 것은 세상에 하나 뿐인 관계이며 그 안에 깃든 사랑일 테니까.

 

# 엄마 이야기.

엄마 권순희 여사는 정말 우리 주위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엄마다. 아들, 딸 기르느라 평생을 보냈고, 남편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딸은 결혼해 아이 낳고 기르느라 정신이 없어 만나기도 어렵고, 아직 데리고 있는 서른다섯 살 먹은 아들은 그저 퉁퉁거리기만 한다.

 

빠듯한 살림에 박사 공부까지 시켰는데, 그놈의 유학을 갔다 오지 못해 대학 전임강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래도 나한테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대학 교수 아들이다.

 

그런데 안 그러려고 해도 아들만 보면 잔소리가 나온다. 술 좀 그만 먹었으면, 양말 좀 빨래통에 넣었으면, 오래 사귄 여자 친구랑 이제 그만 결혼했으면, 제발 베란다 전구 좀 갈아 끼워줬으면... 아들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잔소리가 줄줄 나온다.   

 

# 아들 이야기.

아들 현수 역시 평범한 30대 남자. 친구와 술 마시며 욕설 섞어 허튼 소리 할 줄도 알고, 술 안주하다 남은 닭발을 엄마가 좋아한다며 챙겨서 싸들고 들어갈 줄도 아는 남자다.

 

집에 와 양말을 벗어 아무 데나 휙 집어 던지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엄마한테 퉁명스럽게 굴고, 짜증 내고 돌아서면 곧바로 후회하는 아들이기도 하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긴 하지만 아직 결혼은 자신이 없다. 연봉 천 만 원의 '보따리 장수' 시간강사 처지가 답답하고,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더더군다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늘 소화가 안되고 어지럼증이 있던 엄마, 약국에서 적당히 소화제나 사먹고 가끔 한의원이나 다니던 엄마가 어느 날 병원에서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고 이 사실을 아직 모르는 아들은 여자 친구와 떠나기로 했던 제주도 여행이 무산되자 즉흥적으로 엄마에게 제안한다. "엄마, 여행 갈래요?"

 

여행지에서도 두 사람은 큰 소리 내며 다퉜다, 웃었다,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들에게 말할 기회를 찾고 있는 엄마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을 보며 속으로 몰래 울음을 삼키는 엄마.

 

암 보험금을 받아 이미 아들에게 준 엄마. 그 돈의 출처를 알지 못하는 아들은 전임강사가 되기 위한 뇌물로 그 돈을 썼다. 엄마 마음 모르는 아들은 여전히 엄마를 구박하기도 하고, 재롱을 떨기도 한다. 엄마는 아들 덕에 웃고, 홀로 남을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 짓는다.

 

그러다가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남자 대학생을 두 사람의 차에 동승시키게 되고, 셋이 여행을 함께 하면서 엄마가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온 아픈 기억들을 꺼내보게 된다.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여행을 계속하던 중에 결국 아들은 엄마의 병을 알게 된다. 충격과 미안함과 슬픔과 막막함에 울음을 터뜨리는 아들. 엄마도 아들과 함께 소리 내어 운다.

 

# 다시 엄마 이야기

이제 좀 다리 펴고 살만하니 병에 걸렸다. 그것도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암이라니.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들 걱정도 되고, 정말 속이 속이 아니다. 몇 번이나 아들한테 말 하려고 했는데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직접 말하려고 했는데, 이제 어쩔 수 없게 됐다. 아들은 불 같이 화를 내지만 저건 화를 내는 게 아니다. 놀라고 슬프고 당황하고 미안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그러는 거다. 가여운 것. 덩치만 크고 나이만 들었지 아직 내 앞에서는 아이다. 저 녀석, 나 없이 어떻게 살까.

 

# 다시 아들 이야기

엄마는 언제나,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라 믿었다. 천 년 만 년 살 거라 믿었다. "엄마가 귀찮아?" "엄마가 니 종이니? 노예야?" 소리 지르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지금처럼 앞으로도 죽 내 짜증 다 받아줄 줄 알았다. 

 

엄마의 보험금인 줄도 모르고 나는 전임강사되려고 그 돈을 은사한테 뇌물로 주다니, 이렇게 한심하고 부끄러울 수가 없다. 끝까지 엄마는 이렇게 나를 위해 다 내놓은 거다. 우리 엄마 정말 못말린다. 그런데, 나 이제 어떻게 하지? 엄마 없이 어떻게 살지? 엄마... 엄마...

 

 

  

여행지 호텔방에 누워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아들을 보며 엄마가 묻는다.

 

"왜? 집이 아니어서 잠이 잘 안 와?"

"아니야. 엄마 있는 데가 집이지, 뭐."    

 

맞다. 엄마 있는 데가 다 우리 집이다. 비록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났다 해도 우리를 영원히 지켜봐 주고 있을 테니 엄마가 있는 것이고, 그러니 결국은 우리 사는 이 세상이 모두 우리 집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엄마 없는 슬픔을 지니고도 살아갈 수 있나 보다.

 

나이 오십. 부모님과 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덕에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엄마 자리에도, 아들 자리에도 설 수 있었다. 엄마의 마음은 엄마의 마음으로, 아들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여전히 부모님께 짜증내고 까칠하게 구는 나. 아이들 걱정에 잠 못 이루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잔소리를 쏟아내는 나.  이렇게 세대는 위 아래로 이어지며 삶의 이야기를 적어내려간다.

 

연극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너무도 빤히 들여다 보여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와 그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내가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만들어준다. 동시에 그  안에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게 해준다.  

 

공연장을 나서서 같은 방향을 향해 내 옆에서 걷고 있던 머리 희끗하신 분들이 조용 조용 말씀하신다. 부부로 보였다.

 

"어때요? 연극 좋았지요? 나는 자꾸 눈물이 나더라..."

"응. 좋았어. 그런데 이거 우리가 볼 게 아니라 아이들이 봐야 될 거 같은데..."

덧붙이는 글 | 연극 <엄마, 여행 갈래요?> - '감독, 무대로 오다' 시리즈 1탄 (연출 류장하 / 출연 오미연, 예수정, 김상경, 김성수 등) 2010. 1. 17까지, 서울 삼성동 백암아트홀 02-764-7858


#엄마, 여행 갈래요?#연극 속 노년#어머니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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