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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살기 힘들면 어린 것들 데리고 죽을 결심을 다 하겠냐 하지만, 나는 이런 부모에게 도무지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 아이들과의 동반자살이란 게 말이 자살이지 실상은 살인이다. 고아가 되어 불우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부모의 오만이자 착각이리라.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며, 그 생명은 더더욱 부모가 좌우할 만한 게 아니다. 남겨진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그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부모 잃은 고아로 자랐어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 주변만 해도 숱하게 많다. - 책속에서

지난 11월 19일, 부산진구의 41세 정모 여인이 자신의 두 아이를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부모와 함께 살아도 힘들게 사는 세상에 아이들만 남으면 더 힘들 것을 염려, 살인 혹은 동반자살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싸늘하게 식은 두 아이의 이마에는 '사랑 한다 엄마가'라는 쪽지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위안 받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몇 년 째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많이들 힘들어 한다. 때문인지 이처럼 아이들을 살해하고 목숨을 끊는 사고나 동반자살을 시도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삼성출판사 펴냄)는 지난 50년간 버려진 아이들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홀트아동병원 전 원장 조병국의 의료일기이다. 이 책에는 동반자살이란 비뚤어진 모정 때문에 두 다리를 잃은 두 살 배기 아이, 그 아이에게 일어난 기적 같은 희망이 소개되고 있다.

80년 중반 무렵의 일이라고 저자는 회상한다. 어느 대학 교수 부부가 결혼 몇 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여인은 두 살 배기 아이를 안고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철로로 뛰어 들었다. 결과, 여인은 처참한 몰골로 즉사했다. 그러나 엄마가 끌어안고 있던 아이는 처참한 지경이었지만 살아 있었다. 아이는 12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에 두 다리를 절단한 채 목숨만 건져 외가에 맡겨진다.

그러나 아이는 얼마 후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겨진다. 일흔이 넘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장애를 가진 두 살 배기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곡절로 두 다리를 절단한 두 살 배기 아이는 조병국 원장에게 오게 된다. 병원 사람들은 버려진 아이들이 들어올 때마다 아이의 상태 등을 미루어 얼마 만에 입양되는가를 짐작해보곤 하는데, 멀쩡한 아이도 아닌 두 다리를 잃은 이 아이가 입양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단다.

80년대 당시 국내에는 남아 선호사상이 팽배했다. 그리고 입양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때문에 해외 입양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이 아이는 두 다리가 없어 성장속도에 따라 비싼 의족을 바꿔주어야 하는 상태라 국내든 국외로든 아이가 입양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 오래지 않은 몇 달 후, 병원 사람들의 이런 안타까운 예상을 뒤엎고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부부가 나타난다.

나는 하늘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 모습으로 사느니 차라리 엄마와 함께 갔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교만한 생각이었다. 생모와 함께 데려가지 않고 신이 아이를 살려놓은 이유, 이토록 처참하고 가여운 모습으로 살려놓은 이유가 분명 있었다. 행복해질 기회,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기회가 아이의 앞날에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책속에서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삶이 아이를 선택하고, 다시 살아갈 이유를 내주는 것은 이렇게 환하게 웃을 내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삶이 아이를 선택하고, 다시 살아갈 이유를 내주는 것은 이렇게 환하게 웃을 내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조병국
아이의 장애 상태가 너무나 심해 의족 등 경비가 많이 드는 만큼 입양에 대한 말이 나왔어도 입양까지 3~4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 사람들은 짐작했단다. 그러나 이런 상식적인 예상과 달리 입양 이야기가 나온 얼마 후 아이는 미국 보스턴의 한 부부에게 입양된다. 뜻밖에도 아이의 양부모는 아이처럼 다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의족을 처방하고 제작하는 사람들, 아이에게는 그야말로 절실하게 필요한 부모였던 것이다.

아이의 양부모는 아이를 입양한 2년 후쯤 이 책의 저자인 조병국 원장에게 의족을 하고 밝게 웃고 서있는 아이의 사진을 보낸다. 이런 이야기 끝에 책속에서 만난 이 사진(왼쪽)은 눈시울이 붉어지게 했다.

입양 부모가 보내온 사진 속에서 아이들은 늘 밝게 웃고 있다. 아, 이 아이들도 이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구나.…그동안 이 예쁜 표정들, 어디에 숨겨두고 있었니. 아이들은 웃고 있는데 보는 사람 눈에선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 책속에서

사진 옆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다. 이처럼 이야기 끝마다 관련사진이 실려있고 옆페이지에는 사진과 관계된 말이 적혀있다. 사진과 이 글들만 읽어도 감동은 깊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초등학교로 보이는 운동장의 놀이터 정글짐을 기어오르는 개구쟁이 모습의 사진을 보내온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어느 날 롤러스케이트를 능수능란하게 타고 있는, 장애를 가진 소년이라고 볼 수 없는, 15세 가량의 활달한 청소년 사진을 보내온다.

"생모가 멀쩡한 자기 아들을 안고 철로로 뛰어들어 두 다리를 잃게 하는 비정한 세상이지만, 또 누군가는 그 아이를 거둬들여 튼튼한 새 다리를 주고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하는 건가 보다. 실오라기만큼의 희망도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눈 크게 뜨고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철도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던 그 아이의 경우처럼 희망이란 삶의 어느 모퉁이에선가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다. 우리 삶이 준비하고 있는 이 깜짝 선물을 보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니 부디 살지어다. 힘들고 고된 삶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살아서 내 인생이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 책속에서

엄마라는 이름이 만든 기적, 의사라는 소명이 만든 희망과 감동

저자는 아이에게 일어난 불운과 기적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절실하게 들려준다. 그저 그저 뭉클뭉클하게 소용돌이치는 아픔과 감동으로 읽은 이야기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들 22꼭지를 묶은 것이다. 버려지는 어린 생명들과 그 생명들이 전하는 희망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눈물이 가득 배었다. 어떤 날은 책을 읽다가 펑펑 울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수액으로 생명을 겨우 이어가던 영희에게 일어난 기적, 해외로 입양된 뇌성마비 소년 영수가 의사가 되고 아이를 입양하기까지, 입양한 아이가 장애아임에도 가슴으로 키우는 아름이 부모의 입양 이야기, 네 번째 사산한 아내 몰래 입양하고자 신생아실에서 매일 서성거리는 어떤 남편, 탯줄과 함께 버려지는 수많은 태아들, 미스매칭골수이식을 성공시킨 도숙씨의 모정…. 한 꼭지 한 꼭지 감동과 희망의 드라마 그 자체이다.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겉그림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겉그림 ⓒ 삼성출판사
저자 조병국은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전 원장이었다. 1993년 정년을 맞아 홀트부속의원을 퇴임했으나 의사치고는 박봉의 자리인지라 후임자가 나서지 않아 '전 원장'이란 직함으로 15년간 계속 진료를 보다가 2008년 10월, 75세 나이에 건강상의 이유로 완전 퇴임했다고 한다. 이 책은 퇴임 이후 쓰여진 책이다.

조병국 원장은 '의술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잃어야만 했던 두 동생, 한국전쟁 동안 처참하게 버려진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의과대학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58년에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 1963년 소아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 서울시립아동병원,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근무하며 50년 동안 버려진 아이들, 입양아들과 함께했다.

조병국 원장에게는 '국제거지'란 별명이 붙어있다. 어렵던 시절, 열악한 국내환경으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을 살리고자 독일, 미국, 노르웨이 등 선진국들에 아이들의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의료 기부를 요청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원장의 이런 노력으로 버려진 수많은 아이들이 다시 생명을 얻고, 따뜻한 가정의 품에 안겨져 자랐지만, 군사정권 시절에는 '나라의 위상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압력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수많은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가엾은 아이들, 그들을 보듬어 키운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해내다 보니 때로는 눈앞에 닥친 일인 양 눈물이 쏟아져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슬픈 사연뿐 아니라 뿌듯한 추억도 많다는 걸 기억하며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음을, 준 것보다 받은 게 많았음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각박하고 힘든 세상이라지만, 내 인생을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여기가 세상의 끝인가 싶을 때 누군가 내미는 따뜻한 손, 그 작은 온기가 큰 힘이 된다는 걸 안다면, 그리고 내 손에도 누군가를 데워줄 온기가 있다는 걸 안다면 세상살이도 조금은 녹록할 거라고 생각해본다."  -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저자의 말 중에서

덧붙이는 글 |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조병국|삼성출판사|2009-11-01|12,000원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 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홀트아동병원 조병국 원장의 50년 의료일기

조병국 지음, 삼성출판사(2009)


#입양#조병국#홀트아동병원#의료일기#국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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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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