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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청하지 않은 손님이 왔다. 어디 무슨 요양원 관계자라고 한다. 요양원 관계자가 왜 나를 찾아왔는가? 의아해서 눈만 끔벅거리고 있는데 그는 나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아주 익숙하게 친절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하고 나선다.

내가 내 어머니의 치매와 관련해서 몇몇 사람에게 사실 그대로를 얘기한 적은 있어도 그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소연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요양원 관계자라는 사람은 사뭇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생이 참 많으시다"고 위로 겸 치하를 한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 혼자서 여자 환자를 돌보는 것은 아마 지옥 같은 삶일 것이라고, 그렇게 내 마음을 나보다도 훨씬 잘 알고 있다는 체를 하기도 한다.

그랬다. 그는 내 어머니를 단도직입적으로 '환자'라고 말했다. 내가 내 어머니를 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가 환자라고 규정을 해주니 문득 그런가, 하는 의문이 잠깐 들기도 했다. 또한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삶이 가끔 심난하고 짜증스럽기는 했어도 지옥 같다는 생각은커녕 그 비슷한 단어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지옥 운운하고 보니 문득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내 기분은 대체로 난감하고 약간은 불쾌하기도 하다. 각종 종교단체에서 시골 노인들을 대상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거나 이미 착수했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어온 터다. 도시의 경쟁에서 밀렸거나 혹은 수상쩍은 방식으로 축재를 한 종교인들이 시골로 눈을 돌렸다는 얘기도 간간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를 내가 확인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시골에 혼자 사는 노인들이 도시적 감성에 길들여진 사업가들의 표적이 돼 온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머니가 연로하시고, 치매라는 진단까지 받고 있는 형편이다 보니 내 관심도 주로 노인이나 노인을 부양하는 가족들에게 쏠린다. 그 중에는 오랜 기간 교류를 해온 사람도 있고,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도 있다. 사람이란 처음 만난 사이라 해도 공동관심사 앞에서는 이내 친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만나다 보니 별별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건강한 노인이 젊은 사기꾼에게 걸려 지극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일상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들릴 정도가 되었다. 건강이 안 좋은 노인들은 더러 어느 날 홀연 가산을 정리해서 종교시설로 입소를 하기도 하는데 나중에야 사실을 알게 된 자식들이 달려와서 시설 관계자들과 대판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도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노인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몇몇 발 빠른 사업가들이 요양 시설을 급조해놓고 정부 지원금을 노린다는 이야기는 다소 새롭기는 하지만 역시 기분 좋은 새로움은 아니다.

복지라는 단어가 너무도 부끄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나 할까. 나를 찾아온 요양원 관계자 역시 같은 맥락의 말을 하고 있었다. 정부 보조금 80퍼센트를 보장한다고, 자부담은 20퍼센트 밖에 안 되니까 아무 부담 없이 어머니를 자기네 시설에 맡기라는 거였다.  

이 나라의 오늘을 있게 한 일등 공신인 노인들의 생활을 나라에서 책임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노인들을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떠안고 갈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나는 말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떠드는 일에 못지않게 어떻게 나서 어떻게 병들고 어떻게 눈을 감는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거 아주 위험한 생각이라는 듯 혀를 차는 것이었다.

"요양원에 편견을 갖고 계시는군요. 물론 과거에는 불미스런 일도 많이 있었던 게 사실이긴 해요. 그러나 요즘은 아니에요. 수익이 없거나 적자가 누적되다 보니 인간적으로 어쩔 수 없이 노인을 학대하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국가에서 비용을 거의 부담하다시피 하는데 학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요양원에 편견을 갖지 말라고 하시는데, 제가 생각하기는 그 말씀이야말로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군요. 이를테면 씩씩한 사람은 씩씩한 사람끼리, 병약한 사람은 병약한 사람끼리, 이렇게 구획을 정해놓고 사는 것이 행복에 가깝다는 그런 편견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이해를 잘 못하겠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있겠습니까?"
"인간은 세대와 세대가 섞여 있을 때 인생이라는 것의 깊은 의미를 길어올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청년은 청년대로, 노년은 노년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경제적 측면만을 놓고 보자면 생산성은 향상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인간의 삶인 것일까요. 하나보다는 두 개를, 두 개보다 열 개를, 그렇게 계속 수치를 높이는 것만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일까요. 그렇게 본다면 인간의 로봇화가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겠네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문제를 너무 어렵게 보시는 것 같은데요. 노인을 모시느라 집에만 있어야 했던 사람이 노인을 요양원으로 보내고 나면 밖에 나가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마음껏 여행도 다닐 수 있고 얼마나 좋겠어요."

"물론 요양원 관계자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겠지요. 그런데 밖에 나가서 다른 일을 한다면, 기존에 그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두거나 임금이 낮아지거나 최소한 경쟁률이 높아질 것입니다 "

"그런 문제는 국가적 차원에서나 생각할 일이지요. 정책 담당자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우리의 당면과제는 그런 큰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거죠. 사람이란 현실을 사는 것인데,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만 하시는 것도 좀, 예,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노인을 그렇게 모두 요양원이라는 이름의 시설로 집합을 시키고 나면 아이들은 아마 이 세상에 노인 같은 존재는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삶은 뭐가 될까요?"

"그 또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일은 아니지요. 노인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해서 왜 아이들이 노인을 모른단 말입니까. 하다못해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게 되면 일자리가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니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이지요."

"가만, 노인체험학습이라고 하셨습니까?"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이죠. 사실 뭐 안 될 이유도 없는 것이겠고요."

"그러니까 말씀인즉 유치원에서, 유아원에서,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혹은 중학교에서 일 주일에 한 번 혹은 이 주일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해서 양로원으로, 요양원으로 혹은 노인회관 같은 데로 체험학습을 나간다? 동물원으로 동물체험 학습을 나가고, 개구리 사육장으로 개구리 체험학습을 나가듯이 그렇게?"

"그렇지요. 안 될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노인 인구와 아이들의 숫자가 아마 대략 비슷할 겁니다. 노인체험 학습 프로그램이 현실화되기만 한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일자리는 아마 엄청날 거예요. 물론 아직 시기상조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좋습니다. 대단히 놀랍고 신기한 발상이신데,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요. 모든 가정에서 자기 부모든 남의 부모든 노인을 모시는 것을 의무화하고 이 의무에 충실한 가정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혜택을 주는 정책 말입니다. 아이들을 기르는 가정에는 '반드시'라는 단서를 붙일 정도의 강제규정을 둔다면 더욱 좋겠지요. 인간의 삶을 보다 깊게 풍요롭게 한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요양원 제도를 강화하기보다는 이게 훨씬 인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복지제도지 않겠습니까?"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말씀을, 우리나라는 독재 국가가 아니고 민주적 국가인데 어찌 그런 불온한 상상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요양원 관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건데 좋다고 말할 까닭이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다 해도, 선생이나 나나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살면서 한 번쯤은 내 이익만이 아닌 전체의, 모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미래를 생각도 해보고 그래야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생각해보세요. 청년이, 소년이, 아이가 노년을 모르는데 어떻게 인간의 미래를 섬세하게 디자인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청년의 숨소리를 느낄 수 없고 아이를 만져볼 수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며 경험에서 얻어진 지혜를 전수할 수 있겠습니까. 지혜란 언어와 문자만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시드는 꽃 한 송이, 이런 것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표정, 이 표정을 언어와 몸짓으로 보완해줄 때 지혜는 자연스럽게 전수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아, 예, 됐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지요. 선생께서는 지금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압니다. 그렇지만 한 번쯤은, 기계적인 일만이 아닌 가슴 속의 핏물 같은 일도 좀 해보고 그러시면 참 좋겠습니다."

요양원 관계자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단순하게 그냥 산술적으로만 계산하자면 이 가벼운 설전에서 내가 승리한 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가 떠난 뒤의 내 마음이 너무나 얄궂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요양원#노인체험학습#복지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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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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