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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깊은 밤에 헤이리 인근 카페 '오로라'에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 몇 분이 모였습니다. 2년 전 은퇴하신 김주정 선생님의 색소폰연주를 감상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카페에서 알코올을 넣지 않은 칵테일을 한 잔씩 앞에 두고 연주에 몰두했습니다. 아다모Salvatore Adamo의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를 김 선생님의 색소폰 버전으로 듣는 맛은 화이트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니라도 충분히 감상적이었습니다. 오래된 사람들의 오래된 노래, 오래된 추억들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낙용 선생님이 불쑥 아버지와의 추억을 얘기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참 미웠어요. 제가 어릴 적에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운동을 하기 위해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일부터 대학의 진학까지 모든 것을 제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제 처지는 도무지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와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63세에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10년 전의 일이지요. 그런데 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해가 거듭될수록 아버지가 점점 더 그리워지는 거예요. 요즘은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제가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말을 마친 김 선생님이 말을 다시 잇도록 재촉했습니다.

 

"그 미웠던 아버지가 왜 지금에 와서 그리움의 덩어리가 되어서 또 다시 김 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걸까요?"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는 무관심으로 저를 단련했던 것 같아요. 제가 힘든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의 제 회사를 꾸리면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침묵했던 아버지 때문인 것 같아요."

 

김낙용 선생님은 연대 농구부의 농구선수였고 지금은 차가 400대나 되는 중견 물류회사인 정화로직스의 대표입니다.

 

막 무대에서 내려오신 김주정 선생님이 말을 받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엄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숙제를 하기 위해 마루에서 책을 펴고 있으면 들로 나가지 않는다고 매를 들었습니다. 가을 추수 후 벼를 말리기 위해 마당에 펴놓고 제게 닭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라 했습니다. 저는 멍석 옆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말았지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닭들이 멍석 위의 우케를 온통 헤집어 버렸습니다. 들에서 들어오시다가 그 광경을 본 아버지는 지게 작대기로 저를 인정사정없이 매질했습니다. 옛날의 아버지는 엄한 존재였지요."

 

신정균 선생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두 분은 모두 행복한 경우입니다. 제게는 무관심할 아버지도, 엄한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6.25때 납북되었고 생사도 모른 채 살았지요."

 

다시 김 선생님께서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젊은 시절 색소폰에 관심이 많았던 김 선생님은 쌀 한 가마니를 주고 중고 색소폰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렇지만 경기도 일원의 경찰서 지구대장과 정보과장, 경비교통과장 등 재직 시에는 밤낮이 없는 직장의 업무 성격상 색소폰을 배울 틈을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퇴직과 동시에 평소에 소원이었던 그 색소폰과 2년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웬만한 팝송과 가요는 소화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감상적인 밤 탓인지, 김 선생님의 애절한 색소폰 연주 탓인지는 모르지만 지난 수년간 가장 측근이었던 박희주 촬영감독님에게도 입을 연 적이 없었던 가족의 비밀을 말했습니다.

 

"박 감독님이 아시다시피 저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우리집의 큰 기둥인 첫째아들은 저와 함께 운동을 하던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었습니다. 사고무친이 된 이 아들을 즉시 저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아들로 삼았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운동에 출중한 소질을 보였고 지금은 한 축구구단의 프로축구선수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다섯살 때였으므로 이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잘 적응했고 저의 처도 이 큰 아들에게 제일 깊은 애정을 보여서 이 아들이 러시아나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갈 때도 따라가서 밥을 해주곤 했습니다. 지금 집안의 대들보로서의 역할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부 모두가 서로 집안을 오가는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전혀 몰랐던 김낙용 선생님의 고백에 박희주 감독님이 제일 놀랐습니다.

 

 

아버지이야기에 이어 할아버지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종조부께서는 충북 진천에서 평생 농사를 하면서 사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못자리에 발을 담가보신 적은 없습니다. 양반으로서 뒷짐을 지고 농사를 하셨지요. 이 할아버지는 고려 사문박사四門博士 섬한暹漢을 시조로 하는 연안김씨의 25대손이셨습니다. 윗대할아버지께서는 조선의 개국에 참여해 조선시대에만 정승 6명, 대제학 1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163명을 낸 명문가의 기개를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집안사람들에게는 절대 단산斷産을 못하게 했습니다. 인구가 많아야 나라가 힘이 있다는 생각이셨지요. 그래서 그 아들들은 모두 자녀들은 아홉이나 열 명을 두곤 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서울에 오시곤 했는데 꼭 걸어서 오셨습니다. 그때가 경복궁에서 조상님의 제사를 모실 때입니다. 진천에서 서울까지가 300리인데 하루만에 걸어오시고 다시 만 하루를 걸어서 돌아가셨습니다. 부부가 모두 화목하고 건강하셨습니다. 할머니는 102세에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잔병을 앓지 않았습니다. 간혹 방문 드리면 얼굴이 얼마나 건강하신지 제가 '할머니, 다시 시집가도 되시겠어요!'라고 인사를 건네곤 하셨습니다. 두 살이 많은 할아버지가 직접 두더지를 잡아서 할머니를 고아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돌아오신 날 할아버지가 집안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나도 이제 살만큼 살았구나. 오늘 부터 내게 밥상을 들이지마라. 단지 물 한 대접씩만 두고 가도록 해라.' 곡기를 끊고 할머니를 뒤따르겠다는 말씀이었지요. 온 집안이 난리가 났고 할아버지의 뜻을 되돌리려고 모두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상을 들일 때마다 혼만 났습니다. '귀한 음식 버리지 말고 나를 욕되게 하려고 하지 마라'고……. 할아버지는 7일째부터 물도 드시지 않으셨고 곡기를 끊은 지 열흘만에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104세였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정신이 맑았고 두 가지 말을 유언처럼 후손들에게 남겼습니다. '단산을 하지 말고, 어디에서 살던 그곳을 고향으로 여겨라.'"

 

100세의 생일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지상에서의 자신의 삶을 마감한 스콧 니어링의 죽음과 동일했습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겨 크리스마스 날이 되었습니다.

김주정 선생님이 일행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큰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가장 큰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인간의 가청 주파수는 20hz에서 20,000hz입니다. 그 음역을 벗어나는 소리는 우리의 청각으로는 결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침묵'입니다. 침묵함으로서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가장 큰 그림인 우주를 우리가 어떻게 한눈에 볼 수 있을까요?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사람의 눈에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묵시默示뿐입니다. 눈을 감으므로서 가장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은퇴 후 대원인력개발 대표와 파주 ubipark 보안팀장으로 인생2막을 살아가고 계신 김주정 선생님은 명일의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대에 다시 올라 색소폰을 챙겼습니다. 두개나 되는 그 색소폰박스를 박희주 감독이 건네받았습니다. 올 46회 대종상시상식에서 미인도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으며, 영화촬영현장에서는 수백 명을 호령하는 야전사령관으로 살고 계신 박 감독님이 오늘밤, 포터를 자처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에 걸친 밤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어쩌면 '아버지의 무관심'은 아들에게 '침묵'으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이며 '아버지의 엄격함'은 '묵시'로만 볼 수 있는 '가장 큰 그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1.co.kr 과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크리스마스#아버지#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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