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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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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은 진덕여왕을 분기점으로 역대 신라 국왕들을 크게 둘로 나누었다. <삼국사기> 권5 '진덕여왕 본기'에 따르면, 그들은 진덕여왕까지를 성골 국왕, 태종무열왕 김춘추부터를 진골 국왕으로 분류했다. 이것은 혈통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었다.

하지만 혈통이 아닌 '세계화'라는 기준으로 신라 국왕들을 구획할 경우, 그 분기점은 진덕여왕이 아니라 그 전임자인 선덕여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가 중국 주도의 세계화에 참여되는 데에 있어서 선덕여왕 시대가 일종의 과도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니, 현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19세기도 아닌 까마득한 옛날에 무슨 세계화가 있었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이나 19세기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글로벌 제국의 주도에 의한 세계화 시도는 분명히 존재했다.

19세기 이전에도 일종의 고전적 세계화가 존재했다는 점은 글로벌 제국인 몽골제국의 세계지배에서도 잘 표출된다. 몽골제국이 군사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금융 측면에서까지 세계화를 추진했다는 점은, 2008년 11월 중국 광주(광저우)의 중산대학(일명 손문대학)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동아시아 금융사 연구자인 동경대학 구로다 아키노부 교수가 발표한 글에서 잘 나타난다.

'유라시아 은의 세기(1276~1359): 화폐의 합류'라는 발표문에서 구로다는 몽골제국의 등장을 계기로 1276~1359년 기간에 은(銀)이 국제결제의 측면에서 유라시아대륙의 통용화폐가 되었다고 밝혔다. 군사 방면에서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이 영국에서 고려에 이르는 범위에 걸쳐 금융 방면의 세계화를 시도함에 따라, 은이 사상 최초로 오늘날의 달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발표문의 구체적 내용은, 필자가 금년 4월에 2명의 역사학자와 함께 중국학 학술지인 <명청사연구> 제31집을 통해 국내에 소개한 바 있다.

선덕여왕 시기에도 세계화가 존재했다

몽골제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과거에도 고전적 의미의 세계화가 시도되었고, 범위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드라마 <선덕여왕>의 시대적 배경인 기원 7세기에도 그런 시도가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원 7세기에 문제가 된 것은 중앙아·동북아·동남아에 걸친 팍스 시니카(Pax Sinica), 즉 중국 주도의 세계화였다. 오늘날의 세계화가 실상은 '미국화'를 의미하듯이, 당시의 세계화는 실제로 '중국화'를 의미했다. 유목민들이 중원에 대거 진입한 기원 4세기 이래의 오랜 혼란을 극복하고 중국을 재통일한 당나라가 국제사회를 도호부(都護府) 체제로 편제하려고 함에 따라, 당시의 세계화 시도는 오늘날의 그것에 못지않은 고강도를 보이게 되었다.  

오늘날의 미국은 그래도 "미국의 일개 주(州)로 들어오라"는 요구까지는 하지 않는 데에 비해, 당나라는 "중국의 일개 도호부로 들어오라"는 요구까지 서슴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나 멕시코의 사바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처럼 7세기의 연개소문과 의자왕이 세계화에 대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것이 자주성의 포기까지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류의 세계화가 7세기의 신라에 영향을 미치고 신라인들의 의식을 개조하는 기능까지 수행했다는 점은,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 제22세 풍월주 양도 편에도 잘 나타난다. 양도(미실의 증손이자 하종의 손자)는 선덕여왕 재위기인 637~640년에 풍월주를 지낸 적이 있는 인물이다

'의부여동생인 보량(미실의 손녀이자 보종의 딸)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는 어머니의 꾸지람에 대한 양도의 답변(관련기사) 속에서, 우리는 당나라의 한류(漢流)를 본격 수용하기 시작한 7세기 초반의 신라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근친혼을 후진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중국의 결혼문화를 선진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핵우산 밑으로 들어간 선덕여왕

드라마 <선덕여왕>의 주요 등장인물들. 상단 좌측으로부터 선덕여왕, 미실, 천명공주, 김유신, 비담, 김춘추, 알천, 진평왕, 문노.
 드라마 <선덕여왕>의 주요 등장인물들. 상단 좌측으로부터 선덕여왕, 미실, 천명공주, 김유신, 비담, 김춘추, 알천, 진평왕, 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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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개최를 앞둔 1980년대의 한국인들이 "서양인들은 한국인들의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며 미드(미국 드라마) 속 샤워문화를 적극 수용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7세기의 신라인들 역시 당나라에서 불어오는 세계화의 열풍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제3자적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세계화 아니 중국화가 선덕여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신라가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당나라와의 협조체제를 강화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신라가 선덕여왕 사망 직후인 진덕여왕 3년(649)과 4년(650)에 중국식 연호 및 예복을 사용한 것 등은 선덕여왕 시대에 이미 세계화를 위한 준비가 상당 부분 갖추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덕여왕이 죽은 직후의 짧은 시간 동안에 중국화가 집약적으로 신속히 진행된 사실은, 이미 선덕여왕 말년부터 중국화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제도적 준비가 상당부분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혈통이 아닌 세계화를 기준으로 신라 국왕들을 분류할 경우에 선덕여왕이 그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앞에서 언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선덕여왕이 세계화를 추진한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적 세계화' 즉 '팍스 시니카' 건설에 목숨을 건 당태종이 서기 641년부터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개시함에 따라 동북아시아 정치지형이 급변하고 이 와중에 고구려·백제가 대당투쟁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신라를 강도 높게 압박하는 상황 속에서 그 같은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자칫 나라를 잃을 수도 있는 정세 속에서 여왕은 당나라의 '핵우산' 밑에 들어가 보호를 받고자 한 것이다. 당나라의 보호를 받자면 중국 주도의 세계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세계화로 대동강 이남까지 영역 확장한 신라

그럼, 그 같은 선덕여왕 시대의 세계화가 한국사에서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사에 독이 되었을까, 아니면 약이 되었을까?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은 한국사회에서 매우 미묘한 일이다. 또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정답을 말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선덕여왕 시대의 세계화가 신라에 미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나열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첫째, 선덕여왕 시대의 세계화가 신라에 미친 플러스 2가지.

하나는, 신라가 세계화를 발판으로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국권을 지키고 나아가 대동강 이남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이다. 의자왕과 연개소문의 압박에 시달리던 신라가 양국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도리어 대동강 이남으로까지 북진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당나라 주도의 세계화에 동조해서 그 힘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한국사의 불행"이라고들 말한다. 물론 고구려가 잘되었더라면 한민족은 훨씬 더 강성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7세기의 신라로 돌아가 "당신들이 멸망해줬어야 한다"며 현대 한국인들의 연판장을 신라인들에게 전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의 신라인들 역시 자기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망해야 할 대상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고구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호한 합작문화, 나당동맹 통해 유입되다

신라 수도인 경주의 남쪽에 있는 남산. 위의 사진은 1932년에 조선총독부 주관 하에 촬영된 것이고, 아래 사진은 오늘날에 촬영된 것이다. 2007년 9월에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개최한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 유리 원판전에서 위의 사진들이 전시되었다.
 신라 수도인 경주의 남쪽에 있는 남산. 위의 사진은 1932년에 조선총독부 주관 하에 촬영된 것이고, 아래 사진은 오늘날에 촬영된 것이다. 2007년 9월에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개최한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 유리 원판전에서 위의 사진들이 전시되었다.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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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신라가 세계화를 발판으로 호한(胡漢) 합작의 첨단문명을 수용했다는 점이었다. 호한이란 말은 유목민과 한족을 통칭하는 말이다. 위진남북조(4~6세기) 이래 유목민과 농경민의 공존 속에 중국 대륙에서 생성된 최첨단 선진문명인 호한 합작문화가 나당동맹을 통해 신라에 유입된 것이다. 

한나라(BC 202~AD 220) 이래로 순수한 농경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한 시기가 한나라·송나라·명나라 세 왕조에 불과했을 정도로, 이제까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농경민들이 아니라 유목민들이었다. '불과' 98년 전인 1912년까지도 중국대륙이 반농반목(半農半牧)의 만주족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편견과 달리, 유목문화가 농경문화에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유목문화가 중국대륙을 무대로 농경문화와 융합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한나라 시대에 뒤이은 위진남북조 시대였다. 대만의 기상학자인 유소민이 <기후의 반역>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BC 29년 이후 동아시아의 기후가 종래의 온난다습에서 한랭건조로 바뀜에 따라 목초지를 상실한 유목민들이 농경지대로 대거 남하하여 한족 일부를 양자강 이남으로 밀어내면서, 중국대륙이라는 용광로에서 유목민과 농경민의 문화가 한데 뒤섞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화학적 융합의 결과로서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첨단문명이 탄생했으니, 그것을 호한 합작문화라 한다. 위진남북조와 수나라에 뒤이은 당나라 시대에 중국문명이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 것, 훗날 중국대륙을 정복한 몽골제국이 그것을 바탕으로 금세 세계를 제패한 것은 기원 4세기 이래로 중국대륙에서 세계적인 첨단문명이 새롭게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선진문명이 신라에 보다 더 빨리 흡수된 것은 신라가 나당동맹을 통해 중국화에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가야의 철기문명을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신라가 한강을 지나 대동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적 세계화를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자신의 입지 약화시킨 우 범한 신라

둘째, 선덕여왕 시대의 세계화가 신라에 미친 마이너스 2가지.

하나는, 신라가 이민족인 당나라와 제휴하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 가담함으로써 자기 동류(同類)들의 활동무대를 축소시키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 분단된 오늘날의 남북한과 달리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하나의 정치적 울타리 속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현대적인 민족 관념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민족은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an imagined political community)"라며 "그것은 본래 제한적이고 주권적인 것으로 상상된다"고 규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이란 것은 본시 하나의 정치적 테두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민족 개념은 혈통적인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개념을 갖고 한국 고대왕국들을 하나로 묶으려 하는 것은 지극히 억지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민족 관념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일종의 동류의식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 사이에 혈통의 유사성에 근거한 동류의식이 있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이 점은 가야 멸망 이후에 그들 사이에서 삼한일통에 대한 의지가 표출된 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신라는 동류인 고구려·백제와 손잡고 당나라 주도의 팍스 시니카에 대항하기보다는 당나라와 손잡고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 일조함으로써 동류들의 숫자를 줄였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입지까지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신라 이후의 한민족이 한반도에 갇힌 채 중국에 눌려 활력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는 자기 혈육을 모조리 파멸시키고 출세한 사람이 결국에는 자신을 도와줄 우군이 없어 위축된 말년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내부에 있었던, 신라를 지킬 수 있는 원동력

<선덕여왕>에서 '김유신'으로 분한 엄태웅.
 <선덕여왕>에서 '김유신'으로 분한 엄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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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신라가 당나라의 힘에 의존함에 따라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는 자기 몸 안의 자연적 치유능력을 간과하고 약에만 의존하며 살다가 결국 약 없이는 간단한 몸살 하나도 이겨낼 수 없을 정도의 약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덕여왕 말기에 전쟁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김유신이 백제를 상대로 일련의 승전을 거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신라는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킬 정도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양국의 공격을 막아낼 만큼의 힘은 갖고 있었다.

고구려·백제에게 두들겨 맞기만 하던 신라 군대가 김유신의 등장 이후 갑자기 승리를 거두고 때로는 백제로부터 한꺼번에 일곱 개의 성을 빼앗기도 한 사실은, 신라를 지킬 수 있는 궁극적인 원동력이 다름 아닌 신라 내부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똑같은 군대를 갖고 싸우는데도 사령관에 따라 성적이 달라졌다는 것은, 기존의 인적·물적 자원을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신라 군대가 강해질 수도 있었고 약해질 수도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는 그 같은 내부의 힘을 살리기보다는 주로 외부의 힘을 끌어다 쓰는 데에 더 치중함으로써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전제 위에서 나당동맹과 세계화에 참여했다면, 신라는 그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저자세로 나당동맹과 세계화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랬기 때문에 신라가 거둘 수 있는 수확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남긴 숙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덕여왕 시대부터 본격 추진된 세계화 속에는 서로 상반되는 측면들이 담겨 있었다. 대동강 이남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호한 합작의 첨단문화를 수입할 수 있게 된 데에 기여한 측면이 있는가 하면, 자기 동류들의 활동무대를 축소시켜 결국에는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한 측면도 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선덕여왕 시대의 세계화를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우리는 그것의 잘잘못을 끊임없이 재조명하는 한편, 거기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현재 한국이 참여하고 있는 세계화 노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그로부터 진정한 이익을 향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세기와 더불어 한국사에서 가장 민감한 시대 중 하나인 7세기를 다룬 드라마 <선덕여왕>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태그:#선덕여왕, #신라, #세계화, #팍스 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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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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