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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연휴를 끝내고 시무식 등 첫 출근을 하는 날이기도 한 월요일,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 중무장을 하고 영어 학원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선 딸한테서 핸드폰 메시지가 왔다. 눈이 쌓인 길을 개척하듯 걸어서 지하철역에 도착하고 보니 사람이 무지하게 많다는 내용이다.

나도 나가야 하는데 하늘에서는 정신없이 먼지 같은 눈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다.

 딸을 배웅하면서 밖을 내다보니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에서 잿빛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딸을 배웅하면서 밖을 내다보니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에서 잿빛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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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에 있는 '마들여성학교'가 짧은 일주일 방학을 끝내고 개학을 하는 날이다. 학교까지 걸어서 30분 거리인 곳이라서 종종 걸어 다니는데 오늘은 반드시 걸어야 할 상황이다. 등산화를 챙겨 신고 우산을 썼으나 '훌훌' 내리는 눈은 옷 이곳저곳에 달라붙는다. 다행히 아직 내리는 눈 때문에 길은 덜 미끄럽다. 속으로 이런 정도 눈이라면 어머니들도 많이 오시지 않겠구나, 혹시 오시다가 넘어지시면 큰일일 텐데 싶은 생각으로 거리를 나섰는데 차도와 인도가 구분이 안된다. 서울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광경은 내 평생 처음인 듯 싶다.

 학교로 걸어가는 길에 보니 도로의 중앙선도 보이지 않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선도 눈으로 덮여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학교로 걸어가는 길에 보니 도로의 중앙선도 보이지 않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선도 눈으로 덮여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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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들어서니 먼저 온 교사들이 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다.

"선생님, 꼭 눈사람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 반 어머니들은 아직 한 명도 안 오셨어요. 혼자 수업하게 생겼어요. 호호호."

각 반마다 사정이 비슷하다.

조금 있으니 파카에 달려있는 모자 털에 눈 고드름을 졸졸이 달고 우리 반 어머니가 도착을 하셨다.

"엉, 인제 왔어, 어찌나 미끄럽던지."

잘 왔으니 걱정 말라는 전화를 가족에게 하신다.

교사나 학생이나 모두 조금은 풀어진 마음으로 사무실에서 새해 첫 인사들을 나누며 눈이 오는 거리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어머니들이 속속 들어오신다. 아침 10시, 수업시간이 되었다. 우리 반은 공부하시는 어머니들이 20명 가까운데 4명만 오셨다. 모두 참석해 교실이 꽉 찬 것도 아닌데 썰렁해 보이는 교실은 오히려 더 어수선해 보인다.

한글 책을 펼치고 한 문장씩 읽고 어머니들도 열심히 따라 읽으신다. 교실 문이 열리며 얼어서 발그레한 얼굴들을 한 어머니들이 계속 들어오신다. 평소에 약간 늦는 경우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 그냥 눈인사만 서로 하고 제 자리를 찾아 앉으면 되었지만 오늘 아침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분들 모두 숨이 턱에 닿아 헉헉거리면서 어떻게 왔는지, 왜 늦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토해 놓으신다. 수업을 하던 우리들도 맞장구를 치며 반갑게 맞이하느라 수업의 맥이 끊어진다. 그렇게 해서 모두 9명이 오셨다.

 책읽기에 열중이신 마들여성학교 어머니들. 눈 폭탄도 배우고 싶은 열정을 꺾지 못했다.
 책읽기에 열중이신 마들여성학교 어머니들. 눈 폭탄도 배우고 싶은 열정을 꺾지 못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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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맞는 것이 좋다는 한 어머니는 우산도 쓰지 않고 오셔서 머리가 젖어 솔솔 김이 오를 판이다. 또 한 어머니는 버스를 두 번 타고 오시는데 버스는 오지 않고 밖에서 너무 떨어서 손이 바짝 얼었단다. 만져보니 차갑다.

"어머니 우선 난로에 손부터 쪼이세요."

평소에는 버스를 타고 오시다가 눈 때문에 지하철을 타셨는데 밖으로 나와 방향감각을 잃어서 학교 반대방향으로 한없이 걷다가 다시 돌아 왔다는 분도 계신다.

"우리 집 영감이 가지 말라는 것을 기어코 왔다니까, 방학 때문에 책을 던져 놓고 들어다 보지를 못했는데 수업까지 빠지면 더 잊어버리거든."
"잘 오셨어요. 그래도 가실 때는 정말 천천히 넘어지지 않게 가셔야 되요."
"그럼 우리들은 넘어 졌다가는 끝장이야."

평균 나이 60이 넘으신 분들이니 잘못해서 넘어지시면 정말 고생할 일이다.

"자, 처음부터 다시 읽을게요."

늦으신 분들 때문에 책읽기가 자꾸 끊어져서 다시 처음부터 읽기가 시작된다. 평소 같으면 늦게 온 사람을 향해 작은 불만들을 토해 낼 텐데.

"괜찮아요. 우리는 자꾸 읽으면 좋지 뭐" 하며 눈길을 뚫고 오신 동료학우들에 대한 신뢰로 분위기가 부드럽다. 늦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어머니들은 자신들 공부시간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방해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하신다. 그래서 수업 중에 누군가가 수업과 관련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못 견뎌하신다. 그러나 오늘은 수업하는 중간 중간 이런  눈길을 헤치고 오신 자신들에 대한 대견함으로 마음이 붕붕 떠서 서로 칭찬하며 농담하며 무용담이 넘나든다. 아무도 탓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자신의 것도 얹는다.

"선생님, 이번에 우리 손자가 방학이라고 놀러왔어요. 그래서 내가 배운 것을 써먹으려고 손자한테 편지를 썼지요. '자녀'를 모르고 '자여'라고 썼더니 고쳐 주드라고.....도대체 언제쯤이면 글을 척척 쓸거나...."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에 보니 아파트 앞에서 셀카로 사진을 찍느라 젊은 부부가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고 있다.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에 보니 아파트 앞에서 셀카로 사진을 찍느라 젊은 부부가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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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어머니가 거든다.

"그러니까 이렇게 눈길에도 오는 거 아니야. 잊지 않으려면 매일 배우는 수밖에 없다니까." "나이 때문에 자꾸 까먹어, 이러다가 영영 다 깨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야."
"무슨 소리, 우리 옆집에 80이 넘으신 분이 계신데 이분이 자식들 하고 떨어져 살고 있어요. 핸드폰이 있으면 뭘 해. 걸 줄을 모르는데, 자꾸 나한테 와서 자식들 전화번호를 주면서 걸어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날마다 일 년을 가르쳐 드렸지, 나한테 걸어달라고 하지 말고 할머니가 직접 걸라고 하면서....그랬더니 되더라구, 그 할머니 이제는 척척 잘하고 계시거든."
"그럼 그럼, 꾸준히 빠지지 말고 열심히 연습하는 수밖에 없어."
"저번에 국정회의인가 하는 뉴스를 보는데..."

보셨느냐고 내게 묻는다.

"아니요."
"그 때 어떤 국회의원이 상대방 국회의원이 써 놓은 글을 보고 맞춤법 좀 제대로 알고 쓰라고 호통을 치더구만, 그런 배운 사람들도 틀려. 그러니까 너무 주눅 들지 말라고..."

아, 누가 이분들에게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흉볼 수 있겠는가. 누가 이분들에게 배움의 열정이 강렬하지 않아 여태 그러고 있었던 거 아니냐고 탓할 수 있겠는가. 생활전선에서 갖은 고생을 하시느라고 배움이 늦어버린 그 한을 이렇게라도 풀고 계신 분들이 내 일처럼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순간이다.

새벽부터 길을 나선 딸의 젊은 열정이나 연세 높으신 어머니들의 배우겠다는 간절함은 같은 무게다.

창밖에는 여전히 굵은 눈발이 어머니들의 마음을 감싸는 축복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마들여성학교#서울 폭설#눈 폭탄#배움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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