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전 10시 30분 순천효산고 효산관, 흥겨운 풍물놀이 가락을 신호로 불이 꺼지자 행사장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깜깜해졌다. 그 후 몇 분이 흘렀을까? 촛불과 꽃다발이 탁자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고즈넉한 작은 풍경 하나가 카메라 앵글에 잡혔다. 촛불과 꽃다발, 이 두 가지 소품으로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난 잠시 숨을 멈추었다. 촛불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카메라의 라이트를 터뜨린다면 저 어둠도 사라지리라. 어둠이 사라진 촛불은 어떤 모습일까? 밝은 대낮에 촛불을 켜놓은 꼴이 되고 말겠지. 촛불의 효용은 어둠을 밝히는 데 있지만 때로는 잠시 어두워지기 위해서 촛불이 필요하기도 하다. 어둠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치유받기도 하는 것이다.
숙연해야할 졸업식장이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떠드는 아이들로 인해 소음의 바다가 되어버린 것은 이미 한 두 해의 일이 아니다. 이를 우리 교육의 현주소, 혹은 교육 실패의 한 증거로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중고등학교의 졸업식이 3년의 교육과정을 갈무리하는 학교(혹은 학창)의 마지막 행사라는 점에서 보자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도 아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진단과 탄식만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실사구시적인 실천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3년의 교육과정을 통째로 바꿀 수 없다면 우선 졸업식장의 그림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사려 깊은 인문학적인 사고가 힘든 세대라면 그들이 좋아하는 영상과 이미지로 승부를 보는 것은 어떨까? 지난해 이런 고민의 과정 속에서 떠올린 것이 촛불과 영상 졸업식이었던 것이다.
올해는 공식적인 졸업식 행사를 하기 전에 식전 행사를 먼저 진행하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종 독감 때문에 취소되었던 학교축제를 대신하는 흥겨운 마당이기도 했다. 졸업식 행사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던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내 가슴과 이마 어디쯤에 사뿐히 날아와 앉을 무렵, 장내 마이크를 통해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되듯 졸업은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3년의 과정을 다 마치고 정든 교정을 떠나는 날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슬프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가슴 설레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졸업식 행사가 졸업생 여러분들의 앞날에 밝은 빛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지금부터 점등식을 거행 하겠습니다." 점등식은 교장선생님이 3학년 담임선생님들에게, 담임선생님이 반 학생들에게 촛불을 이어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 촛불을 좇아가며 아이들의 영혼도 촛불처럼 활활 타오르기를 소망해보았다. 아이들의 영혼을 불태울 수 없는 교육은 이미 죽은 교육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물론 이벤트 성격이 다분한 이 한 편의 졸업식 드라마로 아이들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학교와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애쓰는 학교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 그것은 '희망'의 차이랄까?
점등식이 끝나자 사회자의 졸업식 개회 멘트와 함께 졸업장과 상장 수여, 학교장 회고사, 이사장 격려사 등의 순서가 차례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가 한 순간 아차 싶었다. 다음 순서가 축시낭송이었던 것이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1학년 때 잠깐 임시 담임을 맡은 적이 있던 남학생반으로 가서 한 아이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조금 있다가 선생님이 축시 낭송을 할거거든. 무대에 올라가서 하는 건 아니고 바로 여기서 할 거야. 촛불로 날 좀 비춰줄래?" 축시낭송을 무대에 올라가서 하지 않고 아이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하게 된 것은 그날의 주인공인 학생들을 배려한 까닭이었다. 졸업식 리허설을 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그런 제안을 하였고, 나는 그 사려 깊은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한 아이가 비춰주는 불빛의 도움을 받아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촛불을 켜면 촛불을 켜면 작은 동그란 원이 생깁니다. 그 동그란 원은 아직 어둠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의 면적이 아무리 넓어도 작은 동그란 원을 침범하지는 못합니다. 마음의 촛불을 켜면 작은 동그란 원이 생깁니다. 그 동그란 원은 아직 슬픔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슬픔의 부피가 아무리 커도 작은 동그란 원을 슬픔으로 물들이지는 못합니다. 꿈을 꾸면 작은 동그란 성이 생깁니다. 그 동그란 성은 아직 현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작은 동그란 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촛불을 켜면 내 마음의 촛불을 켜면 꿈을 꾸기만 하면 아무도 희망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축시 낭송이 끝나자 재학생들의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와 졸업하는 선배들을 위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연습한 결과물들이었다. 그 다음 순서로 교복 물려주기, 타임캡슐 봉인식 등이 이어졌다. 졸업생들은 재학생들에게 교복을 물려주고 교복을 물려받은 재학생들은 그 답례로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했다. 보기에도 흐뭇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타임캡슐 봉인식은 올해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순서였다. 이런 행사들이 형식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쓴 흔적이 엿보였다. 사회자의 멘트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꿈이 있는 사람과 꿈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꿈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할 힘이 생깁니다. 타임캡슐 속에는 여러분의 꿈이 들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마음', 배움의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긍정할 만한 것을 긍정하고 사랑할만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은 하나뿐이다. 긍정할만하지 않아도 교사가 먼저 아이들을 긍정하는 것이다. 사랑할만한 하지 않아도 아이들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졸업식 행사는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제 졸업식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송사와 답사 순서가 되었다. 과거 같았으면 눈물바다를 이루었을 재학생대표의 송사와 졸업생 대표의 답사는 비교적 의젓하고 담담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축가와 교가를 끝으로 한 시간 남짓한 졸업식의 막이 내려졌다.
졸업식 행사가 끝나자 서둘러 아이들 곁으로 달려갔다. 이제 학교를 떠나면 언제 볼지 모르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아이들에게 당도하기 전에 내 눈을 끄는 것이 있었다. 처음 내 카메라 앵글에 잡혔던 촛불과 꽃다발이었다. 촛불을 아직 켜져 있었고, 누구의 꽃다발인지 주인 없는 꽃다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지금 내 마음 한 켠에도 아직 꺼지지 않는 촛불과 꽃다발이 있다. 하지만 이제 정들었던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새롭게 아이들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만 한다. 또한, 그들이 긍정할만하지 않아도 긍정해야하고 사랑할만하지 않아도 사랑해야한다. 그것이 교사의 길일진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되듯 또다시 사랑의 길을 떠나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