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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동이>.
 MBC 드라마 <동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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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모친인 최숙빈(숙빈 최씨)의 아버지가 반체제 무장조직인 검계의 리더였을 것이라는 파격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MBC 월화드라마 <동이>. 반체제의 중심에 섰던 아버지로부터, 체제의 중심에 서게 될 딸이 성장했다니!

지난 22일 시작한 이 드라마 1부와 2부에서는, 낮에는 오작인(시체검시 보조원)이요 밤에는 천민결사 검계의 수장인 최효원(천호진 분)의 고뇌와 그런 고뇌가 장차 최숙빈(한효주 분)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될 숙명 같은 것임을 보여주었다.

애초부터 후궁이니 왕의 모친이니 하는 것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운명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최숙빈. DNA에 꽉 박힌 천민의 고뇌를 훗날 자기 아들에게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최숙빈. 그런 최숙빈에게 MBC 드라마가 붙여준 이름은 '동이'(同伊).

제작진이 별 뜻 없이 지은 이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무슨 생각이 있어서 지은 이름일 수도 있다. 어쨌든 간에, 한자 '이'(伊)가 위진남북조 시대(3~6세기) 이래 3인칭 대명사로 쓰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근대 중국인들 같았으면 '동이'란 말을 듣고 '그와 함께(同)' 혹은 '그녀와 함께'라는 뜻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숙빈 최씨의 이름

숙빈최씨묘표. 숙종 44년(1718) 최숙빈의 장례식 때에 세워진 비석이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소재한 소령원(최숙빈의 무덤) 안에 있다.
 숙빈최씨묘표. 숙종 44년(1718) 최숙빈의 장례식 때에 세워진 비석이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소재한 소령원(최숙빈의 무덤) 안에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 <숙빈최씨자료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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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거창하게' 전근대 중국어까지 들먹이며 동이란 이름의 뜻을 풀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왜냐? '동이'는 어차피 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숙종실록>이나 <영조실록>은 물론이고 조선 후기의 문집·정치비평서 등에서도 그의 실명을 확인할 길은 없다.

이 점은 최숙빈의 비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숙종 44년(1718) 최숙빈의 장례식 때 세워진 '숙빈최씨묘표'가 최숙빈의 이름과 관련하여 알려주는 정보는 다음과 같이 아주 단출하다.

"빈(嬪, 정1품 후궁)의 성은 최씨이고, 그 조상은 해주 사람이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소재한 소령원(최숙빈의 무덤)에 있는 이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위와 같이 최숙빈이 해주 최씨라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해주 최씨와 관련된 홈페이지들에 따르면, 그의 본관이 해주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마저 이견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현재로써는, 최숙빈의 실명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료상으로 확인할 게 거의 없는 '0'에 가까운 영역인지라, 사극 작가의 상상력이 '100'으로까지 극대화된다 한들 아무도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공식적'이란 표현에 작은따옴표를 붙인 이유가 있다. 공식적이지 않은 루트를 통해서는, 혹시 그의 실명일지도 모르는 어떤 이름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서를 갖고 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에 소재하는 용흥사란 사찰이다. 이 절에는 지난 2008년 3월 12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보물 제1555호로 지정된 '담양 용흥사 순치원년명 동종'이라는 범종이 있다. 이는 청나라 순치 원년(1644)에 제작된 종으로써, 17세기 범종 제작의 대가인 김용암 작가가 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보통 범종과 다른 데가 있다. 범종 꼭대기에 있는 용뉴(龍鈕)가 아주 특징적이다. 전라남도 순천시청 학예사인 장여동의 논문 '조선후기 전남지방의 범종 연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중국에서 범종의 꼭대기 부분은 보통 한두 마리의 용이나 고리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와 달리, 용흥사 범종의 꼭대기는 '무려' 네 마리의 용으로 장식되어 있다. 상당히 이례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용흥사 범종의 용뉴가 매우 특이하다는 점은, 400여 개의 중국 고대 범종들을 전시하고 있는 북경의 대종사(다종스, 불교사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북경 지하철 13호선을 타고 대종사역(다종스짠)에서 내리면 이 사원을 관람할 수 있다. 절 안에는 '대종사 고종(古鐘) 박물관'이라는 전시관도 있다. 이곳에 전시된 어떤 대형 동종(銅鐘)에는 당태종 재위기인 서기 629년에 제작되었다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그만큼 중국 고대의 범종에 관한 한, 이곳은 백화점 같은 곳이다.

지난 1월에 필자가 이 절에서 확인한 중국 고대의 범종 중에는 네 마리의 용으로 장식된 종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의 논문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개 다 한두 마리의 용이나 고리로 범종 꼭대기가 장식되었을 뿐이었다.

용흥사 전설에 나오는 '소녀'가 혹시 숙빈 최씨?

중국 북경 대종사 안에 있는 범종. 화살표 부분은 범종의 용뉴. 사진 속 범종의 용뉴는 한 마리의 용으로 장식되어 있다.
 중국 북경 대종사 안에 있는 범종. 화살표 부분은 범종의 용뉴. 사진 속 범종의 용뉴는 한 마리의 용으로 장식되어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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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용흥사 범종만이 유독 네 마리의 용으로 장식된 까닭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어떤 사연이 있나 규명하기 위해 용흥사 전설을 탐구하다 보면, 최숙빈의 실명일 가능성이 있는 어떤 이름 하나에 접하게 된다. 2008년 3월 20일자 <담양주간신문>에 정리된 용흥사 전설의 관련 부분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용흥사 스님 한 분이 먼 미래의 일을 예견했다. 효성 어린 한 소녀가 절에 딸린 암자에 들어올 것이고 이 소녀가 산신령의 인도로 고관대작을 만나 입궐한 후에 왕을 낳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그 스님은 후세에 길이 남을 성군을 기리기 위해 용 네 마리로 장식된 범종을 제작해서 부처님께 바쳤다.

스님의 예견대로, 32년 후에 최복순이란 소녀가 전염병(장티푸스)에 걸린 가족과 함께 절에 피신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예견대로, 이 소녀는 산신령의 인도를 받아 나주목사를 우연히 만났고, 나주목사 부인의 소개로 인현왕후의 시녀가 되었다."

'산신령'이 자꾸 나오는 바람에 이야기의 사실성이 상당히 추락하지만, 전설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의 껍데기를 벗겨내면 때로는 유익한 알맹이를 얻을 때도 있다. 전설이라는 선입견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내는 게 필요하리라 본다.

전설에 따르면, 1644년에 용흥사 스님이 네 마리의 용이 새겨진 범종을 제작한 것은, 훗날 그 절에 들어올 소녀의 몸에서 성군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견 때문이었다. 물론 그 스님이 직접 종을 만든 게 아니라 김용암이 위촉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그 스님의 예견에 따라 32년 뒤인 숙종 2년(1676)에 최복순이라는 소녀가 전염병에 걸린 가족과 함께 용흥사에 들어왔다가 나주목사 부인의 소개를 받아 인현왕후의 시녀가 되었다는 것이 용흥사 전설의 줄거리다.

'영조를 낳은 여인은 최복순'이라 전하는 민간전설

산신령님이 자꾸 등장하는 용흥사 전설을 100% 신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용흥사 범종이 영조라는 성군의 출현을 계시하는 것이고, 이 계시에 따라 용흥사를 거쳐 왕궁에 들어가 영조를 낳은 여인이 최복순이었다'는 전설이 전남 담양 지방에서 오래도록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을 무조건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참고사항 정도로는 알아둘 만한 내용이 아닐까.

앞에 소개한 문헌·비문 등과 함께 용흥사 전설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에, 우리는 최숙빈의 실명과 관련하여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공식적인 자료에서는 최숙빈의 실명을 확인할 수 없지만, 전남 지방에서 전승되는 민간 전설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복순이였다고 한다고 말이다. 

드라마 속에서 부여된 '동이'라는 이름과 전설 속에서 전해지는 '복순이'라는 이름. 둘 중 어느 게 더 괜찮을까?

물론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 다르겠지만, 당돌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사료 속 최숙빈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데에는 '최동이'라는 이름이 더 괜찮다고 생각되는 데에 비해, 천민에서 후궁으로 벼락출세한 그의 인생스토리를 전개하는 데에는 '최복순'이란 이름도 그런 대로 제법 어울리지 않을까.


태그:#동이, #최숙빈, #숙빈 최씨, #용흥사, #최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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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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