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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성: (거만한 얼굴로) 갖고 싶은 거 골라봐.
가난한 여주인공: (주눅 들었지만 들키지 않겠다는 얼굴로) 난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조인성: (당황하며) 이 매장이 마음에 안 들어? 다른 매장으로 갈까?
가난한 여주인공: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조인성: (안심하며) 내가 골라줄게.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대충 뒤적이다가 귀찮다는 듯)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
가난한 여주인공: (경악하며) 인성씨! 지금 내 마음을 돈으로 사려는 건가요?

-책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중에서, 주인공의 상상 장면.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는 20대 여성작가가 쓴 '한국 20대 여성판 섹스앤더시티' 류의 장편소설이다. 반짝거리는 젊음과 미모를 지녔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과, 나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하는 친구에 대한 질투로 무장한 주인공 유민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산층 부모 밑에서 모든 것을 지원받고 자랐음에도 정작 하고 싶은 일, 대단한 꿈도 없는 유민이는 '칙릿 영화에 나올법한 멋진 여자' 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다. 그리하여, 소개팅에서 만난 부잣집 남자의 BMW 조수석에 앉은 자신을 뿌듯해하며 그가 사준 샤넬 신발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녀들의 꿈은? BMW와 샤넬 가방, 그리고 조건 좋은 남자!

 책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1권 표지.
 책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1권 표지.
ⓒ 휴먼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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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물질로 이어지는 관계는 유민을 점점 기운 빠지게 하고, 자신보다 훨씬 더 생각 없이 살던 친구 혜지가 연예인으로 데뷔해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지우고픈 그림처럼 다가온다. 유민이뿐 아니라 친구 수진이도, 민희도, 그 외의 여러 등장인물들 역시 화려함에 대한 동경과 마음 한 켠의 허영심으로 인해 스스로를 옥죄며 하루하루를 산다.

책의 주요 인물들은 '비호감' 혹은 '된장녀'로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현재 우리나라 20대 여성들과 교묘하게 닮아있다. 책 속의 공기는 여대생 52%가 미용성형의 경험이 있을 만큼 성형에 관대한 우리사회 분위기와 유사하며, 명품에 대한 관심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동 역시 실제 20대 여성들의 그것과 흡사하다.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속 세상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20대 여성들이라면 '그래 맞아' 속으로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일법한 현실세계의 축소판이다.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자조하면서도 드라마 속 신데렐라를 꿈꾸곤 하는 유민이와 친구들. 그러나 세상은 그녀들의 마음대로 쉽게 움직여주지 않는다.

제대로 된 꿈을 꾸지 못하는 그녀들은 공허하고 불안하다

나는 늘 울고 싶었다. 졸업 후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한 백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도, 수환과 헤어지며 가장 찬란한 시절에 작별을 고하는 기분을 느꼈을 때도, 누군가는 간절히 원하는 일자리를 낙하산으로 빼앗아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도, 내 베스트 프렌드가 연예인이라는 화려한 길을 걷게 됐을 때도, 친구들과의 우정이 너무도 얄팍하게 느껴졌을 때도, 애인인지 엔조이인지 모를 관계인 남자의 이기적인 행동에 침묵할 때도, 엄마에게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적인 훈계를 들을 때도, 그런데 난 그 수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매 순간마다 나는 울고 싶었다. - 책 중에서.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와의 관계가 틀어지며 임신의 불안에 휩싸이게 된 유민은, 화장실 욕조 안에 앉아 초라한 자신을 직시한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하는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조건만 보고 만나는 일이 스스로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 너무나도 또렷하게 알아버린 유민. 그리고 이어 그녀는 고등학교 동창 영미의 자살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평소 로션도 바르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월 80만 원밖에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도 꿈을 향해 나아가던 친구 영미가 허무하게 가버렸다는 사실에 유민은 절규한다. 책 속에서 영미는 유일하게 유민이와 친구들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있던 아이였다.

외모를 꾸미기보다는 자신의 꿈에 몰두하고, 요란한 친구관계보다는 진실된 우정을 소원했던 영미. 그러나 영미는 현실의 풍파에 부식된 한 조각의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소개팅에도, 장례식장에서도 블랙미니드레스를 입는 주인공

 책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2권 표지.
 책 <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2권 표지.
ⓒ 휴먼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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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이는 부잣집 남자와의 소개팅을 위해 구입했던 블랙 미니 드레스를 영미의 장례식장에 입고 간다. 영미를 무시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 죄책감과 안쓰러움 등의 감정이 샘물 솟듯 올라와 괴로워하던 유민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감정을 정리해나간다. 그리고 명품 브랜드와 조건 좋은 남자에 대한 집착을 내려둔 채 자신을 추슬러나가기 시작한다.

심리학 박사 크리스 라반과 쥬디 윌리암스의 공저 <심리학의 즐거움>에 따르면, 브랜드 상품을 갖는다는 것은,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거나 노력을 해서 외모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일이다. 새로운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체중을 줄이거나, 신체를 단련하여 아름다워지는 것은 그 상태 그대로 현실 속 자신의 수준을 '직접' 높이는 것이 된다.

이에 반해 브랜드 상품에 의한 수준 향상은, 자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브랜드의 위력을 빌리는 모양이 된다. 그렇기에 잃어버리거나 싫증이 나면 끝이고, 또 다시 자신의 가치 상승을 위해 새로운 브랜드 상품을 요구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설명이다.

명품을 드는 여자보다 스스로가 명품인 여자가 아름답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자기 자신의 향상을 위해 고민하기 시작한 유민의 모습은, 남자의 고급 차키와 명품 벨트 등을 곁눈질하며 더 화려해 보이고파 안달하던 과거 모습보다 훨씬 더 세련되어 보인다. 그녀 안에서 발아하기 시작한 씨앗은 조만간 아름다운 꽃으로 자라나리라.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껍데기에만 집착하느라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20대 여성들에게 효과적인 자극제가 될 법하다. 20대 작가의 상큼 발랄하고 톡톡 튀는 감각과, (비호감이라 여겨질 수도 있으나) 개성 만점인 인물들은 독자들에게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해 줄 것이다.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1 - 개정판

김민서 지음, 휴먼앤북스(Human&Books)(2011)


태그:#나의 블랙 미니드레스, #칙릿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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