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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가에서 날아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으로 한국과 세계 경제가 크게 흔들린 한 주였다. 이른바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끌어올렸다는 소식과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사기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라고 쓰긴 했지만 실은 두 사건 모두 아직 채 아물지 않은 금융 위기의 상처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믿을 수 없는 신용평가 기관이랄 때는 언제고

우선 '나쁜 소식'부터 살펴보자. 어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골드만삭스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125.91포인트나 떨어졌다. 그런 점에서 나쁜 소식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30여 년 간 확장돼 온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 패러다임이 철저하게 인간보다 돈을 좇아왔다는, 조금씩 잊혀져가던 진실을 떠올리게 했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금융 개혁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민주당의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도 "이것이 우리가 올해 강력한 월가 개혁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이유"라며 이번 소식을 반겼다.

반면, 한국 경제에 날아든 무디스 발 '좋은 소식'은 사실 별로 반길 만한 소식이 아니다. 현실을 가림으로써 성찰의 기회를 앗아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 14일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외환 위기 이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소식에 한국의 금융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24.74포인트가 오른 1735.33으로 올해 최고치를 갈아치웠고(15일 1743.91), 원화 가치도 2008년 9월 이후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 조치에 대해 무디스는 "한국이 세계 위기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를 잘 억제하면서도 다른 나라와 차별적인 경제 회복력을 보여준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떠오른 한 가지 의문. 무디스를 비롯해 S&P, 피치 등 이른바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계 금융 위기의 '공범'으로 몰리던 곳이 아니었던가. 더 이상 이들의 신용 평가를 믿을 수 없다며 엄격한 감독과 규제, 나아가 처벌까지도 이야기되지 않았던가. 한국의 신용등급이 외환위기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좋은 소식' 앞에서 '결국 다시 무디스인가'라는 씁쓸한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묻지마 신용등급이 낳은 세계 경제 위기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2008년 정점에 달한 세계 금융 위기의 중심에는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JP모건, 골드만삭스 등 몇몇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거대 투자은행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더 높은 수익을 좇아 앞다퉈 특수목적회사를 세우고 MBS(주택담보증권), CDO(부채담보증권)라는 이름의 금융 파생상품들을 만들어 발행했다.

복잡한 수학과 물리학 수식 안에 가려지긴 했지만 '유동화 증권'이라 불린 이들 파생상품 안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숨어 있었다. 결국 이들 유동화 증권은 훗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엄청난 금융 빅뱅을 일으킨 뇌관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러한 파생상품을 낳은 것은 한때 '금융 연금술'로 불릴 정도로 경이로운 금융 기법으로 평가 받던 '증권화(securitization)'였다. 하지만 나중에야 밝혀진 일이지만 이렇듯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금융 상품이 시장에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전 세계로 팔려나간 것은 무디스를 비롯한 신용평가사들이 부여한 높은 신용등급 덕이었다. 높은 수익률에 눈이 먼 헤지펀드들이 거짓 신용등급을 믿고 전 세계에서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여 투자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지난 몇 년 간 보아온 그대로다.

한때 무디스 이사를 지냈던 제롬 폰스는 지난해 3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들 신용평가사들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신용평가사들은 금융위기가 이미 정점을 넘어선 시점에서도 서브프라임 관련 증권에 대해 최고 등급인 AA등급을 유지했고, 2008년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을 맞기 한 달 전까지도 A등급을 그대로 유지했다. 대규모 손실로 공적자금을 지원받아야 했던 AIG는 이보다 높은 AA등급이 주어지기도 했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무디스는 2001년 회계 부정으로 파산을 맞은 세계 최대 에너지 기업 엔론사에 대해 나흘 전까지도 '투자적격' 등급을 부여해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손실을 끼친 일이 있었다. 당시 무디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들은 바로 이듬해에 역시 회계 부정으로 파산을 맞은 월드컴사를 상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했다.

신용평가사 책임, 영향력과 권위 못 따라

지난해 9월 미국 의회에 이들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규제 법안이 제출되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신용평가사들의 평가 방법과 절차에 대한 규약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과 더불어 평가 대상 기업으로부터는 어떠한 서비스 비용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비슷한 시기 G20 정상회의에서도 추상적이나마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규제와 관리 감독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 신용평사들은 여전히 평가 대상 기업들에게 컨설팅 서비스 등을 제공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평가의 방법과 근거도 불투명할 뿐이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 무디스의 이번 조치로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추락한 한국의 신용등급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33개월 전 신용등급을 무려 10계단까지 낮춘 이들의 조치는 과연 정당했을까.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직전 한국의 신용등급은 무디스 A1, S&P AA-, 피치 AA-로 선진국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가 일어난 지 두 달 사이에 무디스는 신용등급을 6등급 아래로, S&P는 10등급 아래로 끌어내렸다. 한국의 국채가 두 달 만에 '정크 본드(jung bond, 투자 가치가 없는 쓰레기 채권)'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외국 자본은 순식간에 빠져나갔고,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우리 앞에는 엄청난 빚 독촉장들이 쌓여있었다. 결국 그해 12월 3일 한국은 IMF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 경제와 우리의 삶으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이렇듯 짧은 시간에 내려앉는 일은 적어도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가 없었을 뿐 아니라,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은 태국과 인도네시아와 비교해도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 신용평가사들이 내리는 신용평가의 공정성, 나아가 정치적 의도까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 신용평가사들이 수많은 기업들에 컨설팅 서비스 등을 제공하며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국가 기관이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 기업들일 뿐이다. 30여 년 전인 1975년 미국증권거래소가 무디스, S&P, 피치 등 3개 신용평가사를 공식 평가사로 지정한 것이 이들이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이들의 역할과 권한은 어디까지나 미국 안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금융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이들의 평가 대상은 전 세계의 기업으로, 또 국가들로 늘어갔고 그에 따라 이들의 영향력과 권위도 자연스럽게 커져갔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 걸맞은 책임은 뒤따르지 않고 있다.

누구를 위한 신용평가? 반길 일만이 아니다

먼 곳에서 우리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정작 나라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가계빚이 1년 사이 32조 8000억 원이나 늘었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이번 조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의문을 둬야 할 곳이 단지 그들이 내뱉는 '신용 평가'만은 아니다. 그들의 거짓말로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악몽 같은 금융 위기를 지나온 오늘, 우리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마땅하다. 대체 신용 평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루어지는 평가인지, 만일 돌이키기 금융 세계화의 부속물이라면 어떤 식으로 신뢰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할지 등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들이다.

아울러 빙산의 일각이긴 하지만 투자은행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비로소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을 계기로, 또 앞으로 있을 G20정상회의를 계기로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개혁 움직임에도 다시 힘이 실리도록 해야 한다. 실효성 있는 공공의 감독과 규제, 과점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경쟁 구도의 보장, 나아가 공공 신용평가기관의 설립 등 실현 가능한 대안들도 이미 존재한다. 

금융 위기가 남긴 깊은 상처는 결코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무디스#골드만삭스#금융위기#신용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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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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