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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46인의 천안함 희생자 영령과, 이들을 구하려다 산화한 고 한준호 준위 그리고 아직 바다 속을 떠돌고 있을 일곱명의 금양 98호 선원분들 모두에게 비통하고 안타까운 심경으로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영웅의 조건

유명을 달리한 46인의 천안함 승조원들과 이들을 구조하러 나섰다가 참변을 당한 금양98호 선원들 그리고 단 한 명의 생존자라도 구조하기 위해 애쓰다 순직한 UDT 대원 등의 희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기꺼이 자리를 지키려다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돈 있고 배경 좋은 사람이 왜 군대 가서 뺑이 치겠나?"는 시쳇말처럼 굳이 군대에 가지 않았어도 검사, 판사 심지어 군 통수권자인 총리 대통령도 될 수 있는 이 좋은 나라에서 희생한 분들께 "왜 당신들은 바보처럼 요령껏 살지 못했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길을 가는 데 무언가 아주 거슬리고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시 보니 '천안함 영웅들의 희생을 추모합니다'는 같잖은 문구가 담긴 대형 현수막이었다.

사실 '천안함 영웅들'이라는 수사를 이번에 처음 접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달보다는 특정 계층의 주장을 강변하기에 바쁜 언론의 측에도 끼지 못할 소의 '찌라시 언론'들이 희생자들을 영웅으로 묘사하며 북한을 상대로 피의 복수를 할 것을 촉구하는 무책임한 작태들은 익히 보아왔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펼쳐진 현수막을 보는 순간 '잠옷 바람으로 휴식을 취하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 영웅적이란 말인가?'는 반발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수년 전 보았던 영화 <커리지 언더 파이어>가 떠올랐다.

커리지 언더 파이어(Courage Under Fire)

보고서를 완성한 설링은 보일러 중위의 가족에게 찾아가 진실을 고백하고 용서 받는다.
▲ 월든에게 진심이 담긴 존경을 표하는 설링(덴젤 워싱턴 분) 보고서를 완성한 설링은 보일러 중위의 가족에게 찾아가 진실을 고백하고 용서 받는다.
ⓒ 영화 '커리지 언더 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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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당시 전차 부대장이었던 설링 중령(덴젤 워싱턴)은 알 바쓰라 전투에서 절친한 부하 보일러 중의의 탱크를 적군으로 오인하고 사격을 가했다. 군 당국은 보일러의 희생에 대해 적과 교전 중 전사한 것으로 무마하고 유족에게 진실을 고백하려던 설링에게 오히려 무공훈장을 수여하며 진실 고백을 만류했다.

상관은 군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실을 알리는 것이 군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키고 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라는 이유로 "전도양양한 군 경력을 지켜주겠다"며 설링을 회유 협박, 이라크 전쟁에서 순직한 여성 조종사 캐런 월든 대위(맥 라이언)가 최고 무공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긴다.

가족과 부하를 사랑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가족과 부하를 잃는 것 이었다. 그녀는 그런 부하들에게 배신당했다.
▲ 캐런 월든(맥 라이언 분) 가족과 부하를 사랑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가족과 부하를 잃는 것 이었다. 그녀는 그런 부하들에게 배신당했다.
ⓒ 영화 커리지 언더 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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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성이 제공한 파일이나 무사 귀환한 블랙호크 대원 그리고 작전에 함께 참가했던 월든의 부하들의 증언만으로 캐런 월든은 미 여성상 최로 최고무공훈장 수여자의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블랙호크 대원들은 구조 당시 월든이 고립된 방향에서 M-16소총 사격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 반면, 월든의 부하들은 새벽에 실탄이 떨어졌다고 증언한 것이다.

군 당국은 실탄이 언제 떨어졌느냐는 것은 월든의 자격 심사에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조사를 마무리하라고 압박한다. 하지만 부하를 죽게하고도 진실을 감추고 훈장까지 받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설링의 입장은 달랐다. 월든의 죽음과 관련된 감추어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자신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란 걸 알았다.

밝혀진 진실은 세간에 알려진 진실과는 너무 달랐다. 치열한 교전 상황에서 블랙호크 대원들을 구하려는 월든과 위험하니 돌아가자는 기관총수 몬프리즈의 대립이 있었고 대립은 추락 후에 더 심각해졌다.

부상당한 부하를 지키려는 월든과 그 곳을 빠져나가려는 몬프리즈의 대립은 적진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사태로 발전하고 몬프리즈는 적을 향해 총을 쏘는 월든에게 총격을 가한다. 적진에서 부하에게 배신당한 월든은 구조대가 온 후에도 부하들을 지키려다 적진에 버려졌고 아군의 네이팜탄에 의해 전사한 것이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 - 진실을 낱낱이 밝혀내는 것

바지선에 인양되는 천안암 함수
▲ 천안함 함수 바지선에 인양되는 천안암 함수
ⓒ TV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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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한 달이 지났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천안함과 관련된 진실은 여전히 깊은 물속에 잠겨 있다. 제기된 의혹의 단서들은 영화에서처럼 단지 관련자가 들은 총성 정도가 아니다.

대형 함정이 두 척씩이나 수심이 얕은 백령도 1마일 지점까지 왜 접근했으며, 국방장관의 사격 명령을 받고 함포를 백 수십 발 쏴야만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은 도대체 뭐였으며, 구조된 천안함 함장은 왜 속초함으로 황급히 건너갔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침몰 순간까지 위험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천안함과 수 십 분 간 주포까지 발사하며 난리 법석을 떨은 속초함과는 어떤 교신이 있었으며 왜 그것을 감추어야 했는지 등의 의혹들은 이제까지의 군 당국의 해명에서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특히 최근 은연 중 사건의 주범을 북측으로 몰고 대대적으로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여 참사에 대한 자신들의 직접적인 책임을 모면하려는 군 당국의 기도는 설사 북한이 관련된 물증이 전혀 나오지 않더라도 국민들은 북한을 의심할 것이라는 계산이 배후에 깔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북한의 타격에 의해 천안함이 침몰한 것이라면 국방장관, 합참의장, 해군참모총장, 함대사령관, 천안함 함장 등 군의 모든 지휘부가 경계와 작전에 실패하여 해상 방위에 큰 구멍이 생겼음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어떻게 본다면 북한이 관련된 물증이 나오지 않고 의혹만 확산시키는 것이 정부와 군에게는 훨씬 유리할 것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배에 탔다가 불의한 참변을 당한 천안함 희생자들에게 전사자에 준하는 예우를 한다거나 훈장 포장을 수여한다고 해서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런 보상들조차도 단 하나 뿐인 귀한 생명을 바친 그들의 희생에 대한 합당한 대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날 그 바다 속의 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그들의 희생만을 부각시키고 각색하여 거짓 추모로 무마시키려고 한다면 그들은 죽어서도 발을 뻗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안타까운 목숨들의 희생을 진정으로 추모하고자 한다면 첫 걸음은 그날 그 바다 속에서의 진실을 한 점 숨김없이 밝혀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희생하신 분들의 유족은 각색되지 않은 냉정한 진실을 알 권리가 있고,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지 않은 이 땅의 수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 역시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희생한 영혼들이 자신들의 죽음이 거짓으로 미화하거나 포장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월든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던 자리에서 설링의 발언이 귓전을 때린다.

"월든 같은 값진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아름답든 추하든간에 냉정한 진실은 낱낱히 밝혀져야만 합니다. "

이것이야말로 희생자의 죽음을 빚으로 살아남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마땅히 해야할 일일 것이다.


태그:#천안함 침몰, #커리지 언더 파이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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