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연중 특별기획 '유러피언드림, 그 현장을 가다'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독자들의 많은 관심 속에 '프랑스는 어떻게 저출산을 극복했는가'를 27회에 걸쳐 심층보도한 데 이어 '스위스의 지방자치와 직접민주주의, 나의 한 표는 알프스보다 아름답다'를 현지에서 연재한다. [편집자말] |
[취재·정리] 오연호, 엔드류 그룬[공동취재]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스위스편' 특별취재팀오연호 대표기자(팀장), 안성호(편집자문위원, 대전대 교수), 윤석준(기획위원), 남소연 기자(사진), 박정호 기자(동영상), 엔드류 그룬(Andrew Gruen, 영문판)
스위스 취리히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동남쪽으로 달린 <오마이뉴스> 취재팀은 5월 2일 일요일 오전 7시 30분경 글라루스(Glarus)역에 도착했다. 북부 알프스 산맥의 자락에 위치한 글라루스는 동화책 속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시였다. 정상에 눈이 남아있는 산들이 녹색의 치마를 두르고 하늘 높이 솟아있었고 산뜻하고 작은 도시는 그 품안에 안겨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열띤 정치토론이 가능할까?
주민총회 란츠게마인데(Landsgemeinde)의 시작은 오전 9시부터지만, 인구 3만5천여 명의 작은 주(州, Cantons)의 정부가 들어서 있는 이 소도시는 아침부터 1년에 한 번 있는 이날의 정치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부산했다. 테이블 등을 설치하고 있는 상인들, 예행연습하는 군악대 대원들 사이를 지나 주민총회가 열릴 광장으로 가 보았다.
투표연령 16세, 젊은이들도 많이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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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스위스의 정치축제 란쯔게마인데 스위스 취리히에서 기차로 1시간 10여 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글라루스. 알프스 산맥의 한 산자락에 있는 작은 도시 글라루스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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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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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총회 광장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의 운동장 크기였다. 광장은 널빤지로 만든 긴 의자들이 빼곡히 빙 둘러 준비돼 있었다. 그 뒤에는 선채로 총회에 참석할 사람들을 위해 나무판자로 만든 스탠드가 설치돼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전 8시 30분, 이제 주민총회 시작을 30분밖에 남겨두지 않았고, 광장에서 2백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군악대의 식전 연주는 계속되고 있는데도, 광장에는 단 한 사람도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이가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군악대 연주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고작 2백여 명에 불과했다. 이 광장을 주민들이 다 채울 수 있을까? 오늘 비가 오기로 예정돼 있어서 참석률이 시작부터 저조한가? 마치 주최 측이나 된 것처럼 괜히 걱정이 됐다.
글라루스의 주민총회는 오전 9시, 행진으로 시작됐다. 주정부 청사 앞에서 군악대를 선두로, 주정부와 주의회 인사들, 초청받은 연방정부와 외국 대사들이 앞장서고, 주민들이 광장을 향해 행진했다. 대열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그들을 따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각양각색의 남녀노소가 모여들고 있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는 90대 할머니부터, 손을 꼭 잡고 걷는 50대 부부, 2명의 유치원생 아이들을 데리고 온 30대 부부, 진한 키스를 하면서 따라가는 20대 커플, 청바지에 손을 찔러 넣고 낄낄대는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 엄마가 끄는 유모차에 앉은 채 행진음악에 웃음 짓는 간난아이까지. 주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인 주민총회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양했다.
50대의 큐민 부부는 자동차로 10분 걸리는 동네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남편이 아내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고 행진하는 이들 부부의 손에는 오늘의 표결 안건들 22가지를 적은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 한 표 행사하러 온 거군요?"아닙니다, 그냥 커피 마시러 온 겁니다. 하하."
남편은 그런 농담으로 인사를 건넸다.
- 오늘 22가지 표결 안건이 있는데 어떤 것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나요?"7번, 21번, 22번이요."
그는 단박에 말했다.
7번은 식당에서 흡연실을 허락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고, 21번은 대중교통을 모든 주민에게 공짜로 해줄 것인지, 그리고 22번은 세금을 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지를 다루는 것이었다.
- 22번은 마지막 안건인데 그럼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겠네요?"물론이지요."
스무살 여대생 리아는 고등학교 다니는 동네 후배들과 행진을 하고 있었다.
- 젊은 사람들도 꽤 많네요."재작년부터 투표연령이 16세로 낮춰졌거든요. 그래선지 오늘 고등학생들도 더 많이 보이네요." (스위스 연방 차원의 투표연령은 18세)
주민총회 장소인 광장으로의 행진은 앞을 보고 걷는 것이 아니었다. 옆 사람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는 것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걷는 20대 엄마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 90대 할머니에게 "오랜만이시네요"하고 인사를 나눴다. 여기저기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을 멀리서 발견하고 이름을 부르고 손을 번쩍 들어 흔들며 반기는 모습이 보였다.
투표용지, 하늘로 치솟다
행진대열이 거의 입장을 마친 오전 9시 10분, 불과 40분 전까지만해도 텅비어 있었던 광장은 완벽한 변신을 했다. 알프스 산자락을 감고 있던 아침 안개가 걷히자 사방에서 글라루스를 품고 있던 절경의 산들이 다리뿐 아니라 몸통과 얼굴까지 화려한 자태를 드러냈는데, 바로 그 시각 광장에는 사람꽃이 피었다. 약 4천여 명이 만들어낸, 알프스 산자락의 사람꽃은 그렇게 순식간에 피었다. 광장은 3층 높이의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건물들의 창문마다 사람꽃을 지켜보려는 이들이 몸을 내밀고 있었는데 그들도 그 꽃의 일부가 되었다.
오전 9시 30분, 주민총회가 개막되었다. 4천 명이 만들어낸 박수소리가 알프스 산자락을 뒤흔들었다. 의회가 선임한 새 주지사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를 묻는 것이 첫 번째 안건이었다.
"동의하시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사회자가 가부를 묻자 대부분이 투표용지를 든 손을 높이 들었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번엔 광장에 투표용지의 꽃이 피었다.
기표를 한 투표용지가 하늘로 치솟을 수도 있는 거구나. 선택을 마친 투표용지가 사람의 손 끝에서 춤출 수도 있는 거구나.
그동안 우리가 본 투표용지는 투표함 속에 접혀져 있다가 개표를 위해 쏟아내지는 것뿐이었기에 새롭게 다가왔다. 투표용지는 별도로 마련된 것이 아니고 오늘의 안건 22개의 제목을 담은 용지였다. 개표는 '눈대중'으로 했다. 사회자가 투표용지를 쥔 손을 드는 것이 과반 이상인지를 바로 판단해 가부를 선언했다. 처음에는 웬 눈대중 개표인가 생각했는데 그것은 기막히게도 잘 통했다. 사회자 한 사람의 눈이 아니라 참석자 모두의 눈으로 개표를 하기 때문에 이의가 없었다. 새 주지사 선임 동의안이 가결되자 광장은 다시 한번 박수소리로 채워졌다. 5시간 동안의 마라톤 주민총회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됐다.
22개 안건 찬반 토론... 시민제안자 연단에 올라 열변
오전 10시 10분, 한때 햇볕이 내리쬐던 광장에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총회장을 가득 메운 유권자들은 거의 그대로 자리를 유지했다. 올해 마흔 두 살의 시골농부 안드레이 시겐톨러는 광장 뒤편에 마련된 나무 스탠드에 서서 주민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글라루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골에서 소 여섯 마리를 키우고 있는 농부인 그는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혼자 왔냐고 물어보니 눈으로 동행인 2명을 가르킨다. 부인이 간난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채 저만치에서 안건에 대한 찬반토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유창하지는 앉지만 영어를 잘 했다. 주민총회는 글라루스 주의 제1국어인 독일어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에게 즉석에서 영어통역을 부탁했다.
- 지금 한 시민이 연단에 올랐는데 무엇을 주장하고 있나요?"저 사람이 오늘 표결할 6번 안건을 직접 제안한 자입니다. 제안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한 평범한 시민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의 예비법안을 제안한다는 것이 얼마나 개인적으로 영광이겠습니까?"
그 시민은 주민총회에 더 많은 권한을 주는 안을 제안했다. 그 뒤를 이어 찬반 토론을 하는 다른 시민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 작년에도 참석했나요?"네. 나는 다른 주에서 살다가 와서 이번이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석입니다. 주민총회는 아주 좋은 제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투표가 아닙니다. 단순히 Yes냐 No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Yes but, No but하면서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것이니까요."
둘이 말하고 있는 사이 광장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일었다. 연단에 오른 시민의 연설이 길어지자 사회자가 "비가 곧 더 올 거 같으니까 가급적 제한된 시간에 맞춰 주장을 펼쳐달라"고 요청하자 그런 것이었다. 이렇게 주민총회는 심각한 토론과 한바탕의 폭소가 어우러지면서 진행됐다.
- 부인도 함께 왔는데 그도 오늘의 안건들에 관심이 많은편인가요?"물론입니다. 우리 부인은 글라루스 태생이기 때문에 나보다 더 관심이 많습니다."
40대 농부 "우리 부부 사이에도 의견 다르지만..."6번 안건에 대한 찬반토론이 끝나고 사회자가 가부를 물으려 할 즈음 유모차에 앉아있던 안드레이 부부의 간난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커졌지만 부부는 찬반투표를 마칠 때까지 아이를 달래지 않았다. 손을 드는 것을 보니 부부의 선택은 서로 달랐다. 남편은 찬성, 부인은 반대.
- 집에서 미리 설득 좀 하지 그랬어요. "미리 토론도 하고 그랬는데, 내 말이 좀 약했나봐요, 하하."
이날 주민총회에서 가장 뜨거운 안건 중의 하나는 7번으로 식당에서의 금연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의사, 레스토랑 경영자 등 약 10여 명의 주민들이 나서 찬반토론을 벌였다. 금연반대 주장을 하는 한 시민은 "식당에서 전면 금연을 하면 흡연자들이 그 식당에 안가게 되고 그려면 종업원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주장을 너무 진지하게 열변을 토하면서 해서 광장을 다시한번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안건은 스위스에서 연방과 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연방에서는 이미 80평방미터 미만의 작은 식당에서 흡연을 허락하고, 그보다 큰 식당일지라도 따로 흡연실을 만들면 흡연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을 마련했는데 이날 논의된 주의 예비법안은 모든 식당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연방이 결정했다고 자동적으로 주에서도 따라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안에 대한 토론이 길어지는 동안 빗방울이 굵어졌다. 보슬비 정도는 그냥 맞고 있던 주민들이 우산을 하나 둘씩 피기 시작했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하얀…. 광장엔 금세 색색으로 수놓은 거대한 우산꽃이 피었다.
농부 안드레이 가족은 우산을 하나밖에 가져오지 않아서 부인이 유모차의 아이를 위해 우산을 펴들었다. 기자는 가지고 있는 우산을 펴서 안드레이와 함께 썼다.
- 비가 굵어지는데도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않은군요."일년에 한번 하는 총회인데, 이정도 비는 감내해야지요."
비가 굵어지고 바람까지 불기 시작해 우산을 펼쳤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총회 참석자들의 옷이 젖어들고 있었다. 80세 전후의 노인들도, 막 16세가 되었을 것같은 학생 유권자도 자리를 계속 지켰다.
비바람 맞고도 5시간 마라톤 총회 자리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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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대담] MB가 4대강을 스위스에서 추진했다면?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은 2일 직접민주주의의 상징인 스위스 글라루스의 주민총회 란쯔게마인데 현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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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비에도 사회자는 토론을 마친 안건에 대한 거수투표를 할 때는 모두 우산을 접으라고 했다. 그러자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일사분란하게 그 요청에 따랐다. 그러니까 약 30초간의 거수투표 기간에 총회장에 모인 모든 유권자가 함께 비를 맞은 것이다. 비는 계속오지만 우산꽃은 피었다 졌다를 반복했다. 그것은 점심시간도 거르고 오후 2시 30분에 22가지 안건을 모두 처리할 때까지 계속됐다.
안드레이 부부는 끝까지 총회에 참석했다. 이날 3대 논쟁법안이었던 식당에서의 전면적 금연안, 대중교통비 전면적 무료안, 외국인들에게 투표권 주는 안은 격렬한 논쟁 끝에 모두 부결됐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모두가 승자"라고 했다.
- 오늘 22개 안에 대해 결정이 이뤄졌는데, 당신 개인의 선택과 어느 정도 맞은 것인가요?"한 절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지지한 안이 모두 통과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화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함께 결정했으니까요. 결론은 다를 수 있지만 결론을 만들어가는 방법은 모두 같지 않았습니까?"
- 오늘 간난아기도 함께 고생했는데."우리 아기는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하겠지만, 부모 손잡고 온 어린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오늘의 이 모임이 그들의 기억에 평생 남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에겐 좋은 교육장이죠. 그들이 나중에 이 글라루스를 더 멋지게 만들어가겠지요."
사람꽃, 투표용지꽃, 우산꽃... 그리고 이야기꽃
오후 2시 50분. 사람꽃, 투표용지꽃, 우산꽃이 피었던 광장이 다시 아침처럼 텅 비었다. 유권자들이 남기고 간, 이날의 안건을 250쪽짜리 책으로 엮어 주정부가 펴낸 예비법안해설집이 여기저기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그 해설집은 한 달 전에 각 유권자의 가정에 배달된 것들이다. 아까 농부 안드레이에게 "다 읽어봤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누가 다 읽겠느냐"고 웃었다. 그러나 총회장 곳곳에서 그 두꺼운 해설집을 밑줄 그으면서 읽은 사람들도 드룰지 않게 보였다.
오늘 광장에 모였던 유권자들은 얼마나 진지하게 투표를 했을까? 글라루스의 유권자 3만여 명 가운데 4천 명만 광장에 나왔는데, 나머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이런 식의 주민총회는 가능할 수 있을까?
텅빈 광장에 머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전 첫 시작처럼 다시 군악대의 연주가 저쪽에서 들려왔다. 음악을 따라가보니 2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카페마다, 식당마다, 그리고 거리거리마다 한판의 정치축제를 마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투표에서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들도 맥주잔을 마주치면서 하나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