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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자 선생님께.

선생님, 제가 살아오는 동안 숱하게도 많은 선생님을 만났지만 마음 속에 늘 남아 있는 분은 선생님 한 분 뿐이셨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그건 선생님이 무심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이 그만큼 희미한 존재였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그때 산골에서 열다섯 명도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학교를 다니다 느닷없이 도시로 전학 온 학생이었으니까요.

시골에서는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겠지만 큰 마음의 고생이랄까 그런 게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또래 친구들과 어려움 없이 잘 어울려 뛰어 놀았습니다. 그런 제게 도시로의 전학은 생애 최초의 시련 중 하나였습니다.

도시로의 전학, 생애 최초의 시련

평생 흙에서 삶을 일구시던 부모님이 큰아들 교육문제로 갑자기 도시로의 이주를 결정했으니 집안은 아수라장 같았습니다. 사진은 닥종이 인형 작가 이경숙씨의 작품 '이사 가는 날'
 평생 흙에서 삶을 일구시던 부모님이 큰아들 교육문제로 갑자기 도시로의 이주를 결정했으니 집안은 아수라장 같았습니다. 사진은 닥종이 인형 작가 이경숙씨의 작품 '이사 가는 날'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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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2학기에 도시로 간 저의 반 번호는 '74번'이었습니다. 한 학년이 10반까지 있었으니 그 숫자가 장난 아니었지요.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제 또래들은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 만큼이나 많았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듣던 아이들의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들. 뒷자리까지 꽉 들어 찬 책상과 의자 때문에 출입조차 어려웠던 교실 뒷문. 드센 사내아이들 때문에 복도를 걷다가 넘어져 손바닥이 다치는 바람에 오래도록 고생했던 일까지.

한 학년이 열다섯 명 정도밖에 안 된 옛 학교에서 그것도 위 아래로 오빠며 동생들과 같이 학교를 가곤 하던 시골아이가 하루아침에 한 학년이 700명 넘는 학교에 갔으니 얼마나 어리둥절했겠어요.

정든 아이들과 헤어져 외톨이가 돼 버린 것도 서러운데 거기다 평생 흙에서 삶을 일구시던 부모님이 큰아들 교육문제로 갑자기 도시로의 이주를 결정했으니 집안은 아수라장 같았습니다. 그런 속에 제가 섞여 있었으니 지금 와 생각해 보아도 말이 안 나오겠지요?

성격이나 무던해 그럭저럭 아이들 속에 섞였으면 좋았으련만 저는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어수선한 상황 속에 놓여 버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였을까요. 아이들과 섞이지도 못하게 된 저는 어느 날부턴가 말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말문 닫아버린 내 글을 읽어주신 선생님

시골에서 나고 자란 저의 도시로의 전학은 생애 최초의 시련 중 하나였습니다. 사진은 <내 마음의 풍금> 중 한 장면
 시골에서 나고 자란 저의 도시로의 전학은 생애 최초의 시련 중 하나였습니다. 사진은 <내 마음의 풍금> 중 한 장면
ⓒ 아트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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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가는 게 얼마나 싫은지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감고 뜨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학교를 안 갈 수도 없었지요. 지금 아이들이야 정 학교 가기가 싫으면 아프다는 핑계로 자리에 누워버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늘 서슬이 퍼런 엄마가 있는 집보다는 그래도 학교가 조금 더 나았거든요.

학교에 가도 말 한 마디 하는 일이 없으니 당연히 친구가 생길 일도 없었습니다. 그날도 옆에 어떤 아이가 앉아 있는지도 모를 만큼 저는 학교에 관심이 없었지요. 세월이 하도 많이 지나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일기를 써 보라고 하셨던 거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옮긴다는 게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수업시간이니 안 할 수도 없었겠지요. 아마 일기를 써 본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일기를 썼던 건 기억에 없는데 선생님이 제 일기를 읽어 주신 건 기억합니다.

그렇게도 많은 아이들 앞에서 제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 주시고 그 일기를 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선 저를 일어나라고 하시더니 아이들에게 (저를 위해) 박수를 쳐 주라고 하셨지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아이들 앞에 나서보지 못했던 저는 얼마나 부끄러운지 가슴이 떨려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선생님은 수업을 하시다가도 슬그머니 제 책상 옆을 지나시다가 가만히 어깨를 한번 짚어 주시기도 하고 수업 중에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슬며시 웃어주셨지요. 그렇게 보낸 5학년이 저에겐 장마철에 잠깐 비친 햇살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그런 선생님 모습이 기억납니다. 살도 찌지 않은 가늘한 몸에 짧은 단발머리 퍼머스타일, 거기에 안경을 쓰셨었어요. 그리도 고우시던 선생님께서도 지금 쯤은 정말 할머니가 되셨겠네요. 선생님, 이렇게도 오랜 세월 동안 선생님을 가슴에 품고 있는 아이가 있다는 거 모르시지요? 너무나 많은 세월이 가 버렸지만 그때의 선생님은 늘 제 마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선생님된 딸아이에게 당신 이야기를 해요

꿈도 가질 줄 몰랐던 아이가 그때 선생님을 보면서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었어요. 하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네요. 그래도 이젠 저도 나이가 들어 딸아이가 제 꿈을 대신 이루게 됐습니다. 어엿한 선생님이 됐습니다.

가끔씩 제 딸아이에게 선생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시절의 제 얘기도 포함해서요. 물론 요즘 아이들은 참 행복하게 자라고 있지만 모두가 그렇지도 않은 거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가끔씩 딸아이랑 얘기를 풀어 놓게 될 때는 제가 유일하게 마음 속에 품었던 선생님 얘기를 한답니다.

희미해서 존재조차 보이지 않는 아이가 있거든 행여나 티 내지 말고 가만히 안아주라구요. 그것이 아이들에겐 공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그 무엇을 갖게 하는 거라고. 제가 품었던 선생님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제 아이만큼은 당신처럼 그렇게 가슴 따뜻한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어디선가 그렇게 응원해 주실 거지요?

제 5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을 맡아 주셨던 김송자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마음이 그렇게나 따뜻한 분이셨으니 늘 행복하셨겠지만 앞으로도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차마 부끄러워서 말씀 못 드렸지만 정말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태그:#선생님, #도시,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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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부이자 직장인 입니다. 주변의 이야기나 일하면서 느끼는 일들을 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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