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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윌슨 엉거 의료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여수애양원 교회. 한센병 1세대 환자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다음세대를 위해 한센병과 무관한 성산교회로 개칭했다
 1926년 윌슨 엉거 의료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여수애양원 교회. 한센병 1세대 환자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다음세대를 위해 한센병과 무관한 성산교회로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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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많은 의인의 순교의 피로 개척되었다. 그들의 피가 복음의 뿌리가 되어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세계 선교 역사 속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한국 교회에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많은 문제점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비난까지 받고 제2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 많은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 실추 현상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 실추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지나친 양적 비대 현상이다. 교회가 교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고 대형화에 초점을 맞춤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손양원목사 초상
 손양원목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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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부 교회의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주신 분이 손양원 목사이다. 지난 15일 오후, 여수 시민협회원들과 손양원 목사 순교지 탐방을 했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새벽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했으나 칠원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동방요배(東方遙拜)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동방요배'는 일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할 것을 강요하는 신사참배의 일종이다.

손 목사는 1916년 보통학교 3학년 때 매일 아침 동경을 향하여 종교적인 경의를 표하는 궁성요배가 십계명에서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여 궁성요배를 하지 않으므로 퇴학을 당했다. 일년 후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을 하여 18세 되던 해에 서울 중동학교에 진학했다. 낮에는 학업에 임하고 밤에는 만두 장사를 하면서 고학했으나 아버지가 삼일 독립 운동을 주도하게 돼 학업을 포기하고 낙향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심신을 달랜 뒤 1921년 일본 동경의 스가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한다. 아침과 낮에는 우유와 신문배달, 밤에는 공부를 하면서 동경의 판교 성결교회 목사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참된 신앙의 의의를 깨달아 1923년 졸업과 함께 귀국한다.

 여수시민협 회원들이 손목사가 순교한 장소에서 기념촬영
 여수시민협 회원들이 손목사가 순교한 장소에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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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지 옆에 자리한 순교기념탑. 미평에 위치하고 있다
 순교지 옆에 자리한 순교기념탑. 미평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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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교회에서 봉사하던 그는 1926년 부산 감만동 나환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한다. 당시 감만동 교회는 600여 명 대부분이 나환자들이었다.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나환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섭리의 시작이었다.

손 목사는 1935년 4월 5일, 33세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시절에도 뜨거운 기도 생활과 함께 성경 연구를 깊이 하였다. 그리고 학우들을 대할 때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교제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한국 교회가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온통 흔들리던 시기였다. 신학교 교장 나부열(Roberts) 목사와 손 목사 등이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 신사참배에 반대해 학교가 문을 닫게 됐다.

손 목사와 애양원

손 목사가 여수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인연이 됐다. 당시 애양원 교회는 외부 사람이 예배를 인도할 때나 방문할 때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손 목사는 교회에 들어가면서 흰 가운을 입는 것조차 거절하고 그렇게 했던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 온 사람이 호랑이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호랑이를 잡겠느냐. 이곳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병을 무서워해서야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설교에도 감동했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에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그를 애양원 교회로 초빙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던 중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그가 일본경찰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나환자들이 모여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하지만 1940년 9월 25일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 명의 형사에게 연행되었다. 처음에는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으나 구속기간까지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출옥할 날이 가까워지자 담당 검사가 손 목사를 불러 사상전환을 시도했다. 검사와 손목사간의 설전이다.

"덴꼬(전향 - 轉向)해야 나간다"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신앙-信仰)가 문제이다"

나환자의 영원한 안식처, 애양원

애양원 교회는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교회로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애양원 나환자 수용소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으나 1925년, 이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처음 9명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1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나환자 수용소가 되었다. 손 목사는 36세의 나이로 이곳에 와서 순교할 때까지 환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다.

 순교기념관
 순교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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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시민협 김경만 답사단장이 애양원 역사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09년 미국 포사이트 의료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것으로 1900년대 초기 우리나라 의료선교사의 소중한 자료이다. 김단장은 중학교시절 밀알선교단으로 방문해  강한 소독냄새에 충격을 받았고 위로하러 왔다가 위로 받고 받았다고--
 여수 시민협 김경만 답사단장이 애양원 역사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09년 미국 포사이트 의료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것으로 1900년대 초기 우리나라 의료선교사의 소중한 자료이다. 김단장은 중학교시절 밀알선교단으로 방문해 강한 소독냄새에 충격을 받았고 위로하러 왔다가 위로 받고 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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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에 약간 보이는 나환자집. 어른 두명이 안아야 할 정도로 큰 고목(왼쪽)이 애양원의 역사를 말한다. 1세대 환자들은 돌아가시고 남아있는 소수의 환자만 복지시설에서 치료와 요양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 약간 보이는 나환자집. 어른 두명이 안아야 할 정도로 큰 고목(왼쪽)이 애양원의 역사를 말한다. 1세대 환자들은 돌아가시고 남아있는 소수의 환자만 복지시설에서 치료와 요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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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쾌된 사람도 있었지만 심한 병마와 투병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 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부모형제가 없는 고아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해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 애양원에 일생을 보내려는 분들이 많았다.

14호실 중환자에 거주하는 몇 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한 모습이었다. 상처를 한 번 치료하려면 온 방안에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어 방바닥에 신문지를 세장 정도 깔아야 했다. 이러한 방을 손목사는 서슴지 않고 들어가서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우고 그 곳에 앉아서 그 흉한 환자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해 주었다.

원수를 사랑한 성자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과 기념촬영하는 손목사의 사모님. 손목사는 안재선을 양자로 삼았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과 기념촬영하는 손목사의 사모님. 손목사는 안재선을 양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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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이었다.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 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기관을 장악하고 순천까지 점령했다.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했다.

학교에 있던 공산 프락치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색출하여 인민 재판에 회부하였다.  두 형제들은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청했으나 그들은 두 형제를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말았다.

반란군이 어느 정도 진압된 26일에 애양원 성도들 앞에서 장례식이 진행됐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장례식 끝부분에 손 목사가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가 참석했던 모든 이들을 울렸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그가 말한 9가지 감사한 점이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한 점. 허다한 성도들 중에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내게 주신 점. 3남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된 점.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순교한 점.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한 점.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간 점.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점. 두 아들의 순교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 마지막으로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점을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을 찾아가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고 전도사로 키워냈다.

6·25동란이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인민군은 여수까지 내려왔고 애양원 교회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았다. 제직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하여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를 때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내렸다. 교인들과  손 목사의 대화다.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 내려가시는 겁니까?"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한센병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손양원목사
 한센병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손양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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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목사와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묘지
 손양원목사와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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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체포되어 9월 28일 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했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였다. 손 목사는 성경대로 하나님만을 섬겼고,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살았으며,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나환자와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한 성자다.

한때 천여 명에 달했던 나환자 대부분은 돌아가셨다. 남아있는 몇 명의 환자는 미국과 독일 교회, 한국정부가 지원한 복지시설에 수용돼 치료와 요양을 하고 있다. 여수시에서는 2015년까지 총사업비 400억을 들여 손양원 목사 유적지 기념공원, 순교지 기념관, 홍보관, 진입도로를 만들 계획이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여수신문에도 송고합니다



#손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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