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희빈(이소연 분)을 파멸로 몰아넣은 실질적 장본인이자 영조 임금을 낳은 여인인 최 숙빈(숙빈 최씨, 한효주 분)의 성공신화를 그리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
현재,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동이는 중전 장 희빈의 오빠인 장희재를 피해 의주에서 하녀 생활을 하고 있다가, 만나야 할 사람들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 궁궐로 복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결국 동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궁에 귀환해 장 희빈과 본격적인 대결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럼, 실제 역사 속에서 두 여인의 대결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이들의 대결은 기본적으로 정치력 싸움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의 대결은 또 다른 무대에서도 벌어졌다. 그 '또 다른 무대'란 바로 다산(多産) 경쟁이었다. 누가 더 많이 왕자를 낳을 것인가를 두고도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왕의 여인들이 왕자 생산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하여 그것이 곧바로 남아선호사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현대 정치에서 잠재적인 대권후보를 많이 보유한 정당이 대중적 인기도 얻고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듯이, 왕조국가에서는 왕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어야 왕실의 통치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왕실의 '문제'로 떠오른 '저출산'평민들 입장에서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통할 수도 있었지만, 왕실 입장에서는 경우에 따라 '무자식이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왕자 생산에 대한 왕실의 집착을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코드에서 바라볼 게 아니라, 왕조국가 특유의 정치시스템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왕조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왕자의 생산. 이것은 숙종시대에 접어들면서 한층 더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그런 상황을 아래의 차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차트에서 X축은 27명의 조선 국왕을, Y축은 왕자의 숫자를 가리킨다. 붉은 수직선의 왼쪽은 제19대 군주인 숙종 이전의 상황을 가리킨다. 최 숙빈과 장 희빈이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인 것이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왕자를 가장 많이 낳은 군주는 한글창제와 과학진흥과 변방개척 등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제4대 세종 임금이다. 그는 무려 18명의 왕자를 생산했다. 그 뒤를 제2대 정종(17명), 제9대 성종(16명), 제14대 선조(14명), 제3대 태종(12명)이 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제1대 태조부터 제14대 선조까지 왕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생산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제14대 선조 이후에는 6명의 아들을 둔 제16대 인조, 제19대 숙종, 제26대 고종을 빼고는 왕자를 한두 명 낳는 데에 그치거나 아니면 하나도 낳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는 왕자를 전혀 낳지 못한 왕의 숫자만 해도 4명이나 된다.
숙종시대 들어 더욱 강조된 왕자 생산의 필요성한편, 아직 왕조의 기틀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기에 조선을 통치했던 태조·정종·태종·세종 시기에 왕자가 매우 많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제5대 문종이 이런 분위기를 잠재우기 전까지, 이 네 명의 군주는 도합 55명의 왕자를 두었다.
제19대 숙종이 등장하기 직전의 상황에 주목하면, 당시 왕실이 왕자 생산을 놓고 얼마나 노심초사했을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등장한 제15~제18대 군주 중에서 왕자를 비교적 많이 낳은 사람은 제16대 인조뿐이었다. 제15대 광해군, 제17대 효종, 제18대 현종은 왕자를 각각 한 명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숙종이 즉위하기 직전까지 조선 왕실은 '저출산'이라는 고민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 숙빈과 장 희빈이 등장했으니, 이들이 왕자 생산을 놓고 얼마나 신경전을 벌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여타 시대에도 왕의 처첩들이 왕자 생산을 놓고 경쟁을 벌였지만, 숙종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런 경쟁이 특히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자 생산의 필요성이 특히 더 강조되어서 그런지, 연달아 1명씩의 왕자만 생산한 효종·현종 시대와 달리 숙종시대에는 무려 6명의 왕자를 생산했다. 왕자 6명의 생산은, 조선 후기(제15~제27대)만 놓고 보면, 가장 높은 기록에 속한다. 숙종시대에는 이전 시대의 저출산 문제가 상당 정도 극복된 셈이다.
첫째 낳은 지 2개월만에 둘째를 임신한 최 숙빈그럼, 그 6명의 왕자는 어떤 여인들의 몸에서 태어났을까? 두 번째 차트에서 그 점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차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6명의 왕자는 최 숙빈·장 희빈과 함께 박 명빈(명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최 숙빈이 3명, 장 희빈이 2명, 박 명빈이 1명을 낳았다.
이런 통계를 보면, 최 숙빈이 두뇌 싸움에서뿐만 아니라 다산 경쟁에서도 장 희빈을 눌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왕실의 사랑을 받으며 궐내 위상을 높여갈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를 이로부터 알 수 있다.
최 숙빈이 왕자들을 낳은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가 왕실의 환영을 특히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최 숙빈은 첫째아이(숙종의 삼남)를 낳은 숙종 19년(1693) 10월 6일로부터 1년이 약간 넘은 숙종 20년(1694) 9월 13일에 둘째아이인 영조(숙종의 사남)를 출산했다.
숙종 20년에는 윤5월이 있었기 때문에, 숙종 19년 10월과 숙종 20년 9월은 12개월 간격이 된다. 첫째와 둘째를 12개월 간격으로 출산했다는 것은 첫째를 낳은 지 2개월 후에 둘째를 임신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만큼 최 숙빈이 건강한 신체와 자궁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천민 출신인 최 숙빈이 왕실의 환영을 받은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숙빈이 희빈에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산과 건강또 '누가 더 많이 왕자를 낳았는가'하는 점뿐만 아니라 '누가 더 건강한 왕자를 낳았는가' 하는 점에서도 최 숙빈은 장 희빈을 능가했다.
숙종시대에 접어들어 조선 왕실은 여섯 명의 왕자 외에도 두 명의 공주를 얻음으로써 저출산 문제를 상당 정도 해결했지만, 높은 영아사망률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높은 영아사망률은 의료기술이 낮았던 과거에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높은 영아사망률의 극복'이라는 또 다른 과제와 관련해서도 최 숙빈은 장 희빈을 능가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숙종의 첫째 부인인 인경왕후가 낳은 두 명의 공주는 모두 일찍 죽었다. 숙종의 또 다른 후궁인 박 명빈이 낳은 아들은 21세 때에 사망했다. 최 숙빈이 낳은 세 아들 중 두 명은 일찍 죽었다. 장 희빈이 낳은 두 아들 중 하나는 생후 10일 만에 사망했고, 또 다른 아들인 경종 임금은 무사히 성장했지만 허약체질과 만성질병에 시달리다 37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영조 측으로부터 독살을 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 심각한 건강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들을 보면, 숙종이 낳은 2녀 8남 중에서 2녀와 7남은 다들 단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숙종의 자식들 중에서 유별하게 건강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21대 영조 임금이었다. 그는 무려 82년간이나 살았고, 52년간이나 통치했다. 최 숙빈이 낳은 아들들과 숙종이 낳은 아들들 중에서 유독 영조만이 건강과 장수를 누렸고, 또 그 혈통에서 제22대~제27대 조선 국왕이 배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숙종의 진정한 후계자는 단명한 경종이 아니라 장수한 영조였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점들을 보면, 최 숙빈이 천민 출신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후궁의 품계를 계속 높여 나가는 한편 숙적 장 희빈에 대해 최종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그의 다산능력과 건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는 고아 소녀로서 궁녀가 되어 궐내 봉제공장(침방)에서 젊은 나날을 보내다가 숙종을 만나고 정1품 후궁의 지위에 오른 최 숙빈의 성공 비결 속에는 판단력·정치력·대담성·의리·친화력 등과 더불어 건강이라는 요소가 있었다.
몸뚱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그 몸뚱이 하나가 튼튼하고 건강했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귀족 출신의 인현왕후와 부잣집 출신의 장 희빈을 모두 제치고 여인천하의 최종승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몸에서 영조 이후의 일곱 임금을 배출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최 숙빈의 사례는, 튼튼하고 건강한 신체가 재산이나 가문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건강이 가장 든든한 '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