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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동양화가 홍용선 시인이자 동양화가 홍용선이 시화집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월간 미술세계)을 펴내며, 같은 이름을 내건 전시회를 열었다.
시인이자 동양화가 홍용선시인이자 동양화가 홍용선이 시화집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월간 미술세계)을 펴내며, 같은 이름을 내건 전시회를 열었다. ⓒ 이종찬

 

버려진 스티로폼 조각을 주워다

물로 씻어내고 먹 선을 긋는다

송곳으로 파고 칼로 도려내어 색깔을 입혔더니

선 안에서 온갖 꽃이 끝도 없이 피어나

백화제방(百花齊防)

스티로폼 속으로 가득 차 오는 봄

 

오늘은 정원에 단풍 들고

열매마저 싱그럽게 열렸더니

어느새 눈 내리는 설원에

까치 한 마리가 서쪽하늘로 날아간다

 

그래도 버려진 내 마음 같은 스티로폼 속에서

꽃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피고 지고

내 꿈꾸었던 화려한 봄날이 마침내 무르익어서

만화방창(萬化方暢)

스티로폼 속에 가득가득 피어있는 봄 -21쪽,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 모두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시를 한몸으로 엮기 위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일사(一沙) 홍용선. 그에게 있어 시와 그림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시가 몸이 되면 그림이 마음이 되고, 그림이 몸이 되면 시가 마음이 된다. 이는 아호가 일사(모래알 하나)인 것만 보아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모래알은 처음 바위가 아니었던가. 이처럼 그에게 있어 시가 흩어지면 그림이 되고, 그림이 흩어지면 시가 된다.

 

서양 재료인 스티로폼에 동양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 풍경을 그려낸 그림에도 시가 스티로폼이 되면 그림이 조각칼과 물감이 되어 사르르 번지고, 그림이 스티로폼이 되면 시가 조각칼과 물감이 되어 은근슬쩍 퍼진다. 그에게 있어 경계란 없다. 하늘이 있고도 없으니 땅이 있고도 없고, 땅이 있고도 없으니 삼라만상이 있고도 없는 것이다. 

 

그는 지금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에서 삼라만상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그가 삼라만상이 되기도 하고, 삼라만상이 그가 되기도 하는 그곳에서 시를 찾고 그림을 줍는다. 몇 해 앞, 우연찮게 스티로폼이 화선지로 다가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만난 스티로폼은 그에게 마음을 쉬이 열어주지 않았다.

 

먹으로 그림을 그린 뒤 조각칼로 선을 따라 파내다 보면 조그만 실수를 해도 스티로폼 살점이 뚝 떨어져 나와 그림을 망치게 했다. 겨우 조각칼로 그림을 다 그려놓고 나면 이제는 물감이 잘 먹히지 않았다. 서양에서 태어난 스티로폼이 동양화로 거듭나기 싫어 앙탈을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홍용선이 누군가. 지구촌 곳곳을 여행하며 지구촌 곳곳을 시와 그림으로 다스린 이가 아닌가. 결국 앙탈을 마구 부리며 동양을 담기를 싫어했던 스티로폼도 홍용선 앞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촌 처음으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첫선을 보였던 스티로폼 동양화는 이런 어려움을 딛고 태어났다.        

 

"한숨이 시가 되고 그림이 되면 좋겠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이번 시화집은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이번 시화집은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다 ⓒ 이종찬

"사시사철 바뀌는 정원의 꽃들과 노을에 물들어 흘러가는 앞 강물을 보면서 나의 삶과 예술을 돌아보노라면, 나는 아직도 이 나이에 한 줄의 시와 한 획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도 스스로 행복하고 여유롭다. 매양 그런 감흥에 젖어 시를 짓다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림을 그리다가 시를 짓곤 한다."-'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이자 동양화가 홍용선이 시화집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월간 미술세계)을 펴내며, 같은 이름을 내건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 6월 30일(수)부터 6일(화)까지 일주일 동안 종로구 관훈동 '갤러리 K'에서 열렸던 스티로폼에 그린 동양화 전시회가 그것이다. 이번 시집에는 그림과 함께 시 63편이 실렸으며, 전시회에는 시화집에 실린 그 그림이 잠시 외출을 나온 셈이었다.

 

이번 시화집은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 제2부 '입동', 제3부 '사계', 제4부 '숲에서', 제5부 '겨울수묵화', 제6부 '마음의 길'에 스티로폼 동양화와 함께 실려 있는 '강변', '소나기' '풍경' 연작 3편, '세한', '유' 연작 3편, '사랑', '술' 연작 3편, '벌에게 쏘이다', '강이 말한다', '콩밭도 운다', '똥개들' 등이 그것.

    

지난 3일(토) 저녁 5시 30분쯤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K갤러리에서 만난 홍용선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문득 시상이 떠오르고 시를 짓다 보면 문득 화상(畵像)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나 시상은 시가 안 되고 화상은 그림이 안 된다. 아니 시도 그림도 모두가 잘 안 된다"라며 "그럴 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가슴이 저리지만 그 한숨만큼이라도 시가 되고 그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겸손한 속내를 털어놨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스티로폼 속에서 앞을 다투어 예쁘게 피어난 꽃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스티로폼 속에서 앞을 다투어 예쁘게 피어난 꽃들 ⓒ 이종찬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전시장

 

'꽃은 산 속의 달력이요

바람은 고요속의 손님'

이라 했던가

 

봄바람 모아다가 여름날에 풀어주고

여름 볕 잘라내어 봄날에 이어주면

 

이 봄이 더디 갈 것을

여름도 시원할 것을 -18쪽, '봄바람' 몇 토막

 

지난 주말,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촌에서 처음으로 열린 스티로폼에 그린 동양화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이란 이름을 단 아주 독특한 전시회에 갈 기회가 우연찮게 생겼다. 재야단체 일을 도맡아 한다 하여 '국민식모'라 불리는 이행자(69) 시인이 갑자기 손전화를 걸어 조계사 맞은편 골목에 있는 'K갤러리'로 무조건 나오라는 것이었다.

 

한동안 '대체 무슨 대단한 전시회를 하기에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 않는 이행자 누님까지 저렇게 나서서 설칠까'라 생각하며 서둘러 'K갤러리'로 갔다. 아! 그 전시장에 홍용선이 쓴 시 '봄바람'이 그가 그린 스티로폼 그림 속에서 그리운 사람 이름을 마구 부르며 "야속한 바람아 꽃이 섭섭해라 / 새들도 바람 피해 꽃을 떠나간다"라고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아! 그 전시장에 스티로폼 속에서 앞을 다투어 예쁘게 피어난 꽃들이 '꽃은 산속의 달력이요 / 바람은 고요속의 손님'이라는 김시습 시를 나직하게 읊다가 봄바람을 살랑살랑 일으키며 애간장을 간지럽게 녹이고 있지 않은가.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어 그렇게 꽃으로 화라락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홍용선에게 닿으면 곧바로 시가 되고 그림이 된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홍용선에게 닿으면 곧바로 시가 되고 그림이 된다 ⓒ 이종찬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 ⓒ 이종찬

"그림은 손이요 시는 머리인가"

 

누구는 술을 마시면

그림이 더 잘 그려진다는데

나는 술을 마시면

그림은 안 되고 시가 쓰여진다

 

손은 떨려도 머리는 맑아지니

그림은 손이요 시는 머리인가

그림은 술이 못 되지만

시는 술인가 보다 -81쪽, '술.2' 몇 토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홍용선에게 닿으면 곧바로 시가 되고 그림이 된다. 술도 마찬가지다. 홍용선에게 있어서 술은 시를 더 잘 쓰고,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한 펜과 붓, 물감이다. 그는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면 머리는 맑아지지만 손은 떨려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그가 말한 "그림은 손이요 신은 머리인가"는 사실 그림은 몸이고 시는 마음이란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림은 술이 못 되지만 / 시는 술인가 보다"에서는 그림이 곧 마음이고 시가 곧 몸이 된다. 까닭에 그에게 있어서 시와 그림은 어떤 때는 몸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즉, 시와 그림은 한몸이라는 것이다.

 

그는 가끔 정이 그리울 때면 술을 마신다. 하지만 그 술 때문에 다투기도 한다. "사람은 / 사람을 찾고 // 술은 / 술을 부르는데 / 정은 정을 / 끊어"(술.1) 놓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름 아닌 세상살이다. 삼라만상은 늘 그 자리 늘 그대로 늘 머물러 있지만 사람만은 늘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다가오지 못하는 그 봄을 스티로폼에 그린 동양화를 통해 물꼬를 트고 있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다가오지 못하는 그 봄을 스티로폼에 그린 동양화를 통해 물꼬를 트고 있다 ⓒ 이종찬

 

한몸이 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

 

요즘엔 한겨울에도

모기가 극성을 떨고

제 철도 아닌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한겨울에 수박을 먹으며

파리 떼를 쫓다보니

철모르는 철딱서니들이

어디 파리와 모기뿐이랴 -119쪽, '요즘엔' 몇 토막  

 

홍용선 두 번째 시화집과 이번에 열었던 전시회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은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살이를 꼬집고 있다.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도 시가 되지만 사람만은 철딱서니 없이 "한겨울에 수박을 먹으며 / 파리 떼를 쫓"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만든 스티로폼 속으로는 봄이 오지 못한다. 홍용선은 봄은 오지만 사람 마음속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그 봄을 스티로폼에 그린 동양화를 통해 물꼬를 트고 있다. 그가 서양에서 만든 스티로폼을 동양화를 그리는 화선지로 삼은 것도 한몸이 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다. 그 깊은 사랑을 통해 그는 스티로폼과 동양화를 한몸으로 묶는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홍용선 두 번째 시화집과 이번에 열었던 전시회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은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살이를 꼬집고 있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 홍용선 두 번째 시화집과 이번에 열었던 전시회 <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은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살이를 꼬집고 있다 ⓒ 이종찬

시인이자 동양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홍용선은 1943년 인천에서 태어나 1965~66년 문공부 주최 신인예술상전 장려상, 홍대신문사 주최 미술평론 현상모집에 당선되면서 화단에 발을 들여 놓았고, 2001년에는 <문학시대>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늦깎이+늦깎이'로 문단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중국, 인도, 히말라야, 유럽, 세계기행전 등 개인전을 14회 열었으며, 한.중 대표작가전, 아시아현대미술전, 국제현대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전 등 국내외 단체전 및 기획전, 초대전 등에 400여 회나 출품했다. 문공부 표준영정 한석봉상을 만들었으며, 검인정 미술교과서 심사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부산대, 부산여대, 세종대, 홍대 미술교육원 교수를 맡았다.

 

펴낸 책으로는 <소정 변관식> <청전 이상범> <산처럼 물처럼 바람처럼> <삼국지를 따라가는 홍용선 중국문화기행> <한국화의 세계> <현대한국화론> <인도, 히말라야 기행전> <길따라 그림따라 세계를 가다> 등이 있다.    

 

 

덧붙이는 글 | <북포스>에도 보냅니다


#시인 동양화가 홍용선#스티로폼 속으로 오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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